항저우 임시정부청사 탐방(25. 4. 3)
이번 황산, 삼청산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항저우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둘러 보았습니다..
항저우 임시정부 건물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 기념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상하이에서 조직되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에서 의거하면서 그 존재를 전세계에 알렸다. 동시에 이때부터 일본의 모진 탄압을 받아 더 이상 상하이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중국 여러 도시를 떠돌아야 했던 임시 정부의 첫 번째 피난처가 바로 항저우다. 1932~1935년까지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이 3년간 머물렀다.
옛 임시 정부가 있던 2층 건물을 전시관으로 꾸며 놓았다. 침실과 부엌을 재현해 놓아 임정 요인들의 생활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임시 정부였다는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 규모가 작은데, 실제로는 지금의 3분의 1 크기에 불과했다고 한다. 실내에는 임시 정부를 세우고 활약했던 선열들의 행적을 사진과 한글로 자세히 소개해 놓았다. 시 호 분수대가 있는 하얏트 호텔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다.
당시 국무원과 하원은 청사 주변 서호에서 열렸다. 청사는 2층의 작은 건축물이다. 2002년 중화인민공화국 당국은 항저우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 장소에 기념관을 짓기 시작하였고, 2007년 11월 공식적으로 개장하였다. 2013년에는 항저우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출처 : 위키백과 등에서 발췌)




항주 임정 당시 태극기로 지금의 태극기와는 쾌의 위치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정 피난 시기 일제의 거센 압박과 감시 속에서도 '파수꾼'을 자처하며 항주 임시정부를 지켜낸 분들인 김철, 송명조, 양기탁 의사 ..
김철은 1886년 10월 15일 전라남도 함평군(咸平郡)에서 출생하여 1918년 신한청년당 결성에 참여, 1919년 3월 하순 대한독립임시사무소 설치에 참여, 1919년 5월 3일 재무부위원, 1919년 7월 대한적십자회 상의원, 1919년 8월 5일 임정 교통차장, 1920년 1월 의용단 조직에 참여, 1920년 3월 10일 임정 지방선전부 부총판, 1920년 5월 28일 육군무관학교 교관, 1922년 3월 상해 대한교민단장, 1924년 5월 31일 회계검사원 검사장, 1926년 12월 16일 임정 법무장, 1927년 8월 19일 임정 군무장,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 1931년 11월 중한항일대동맹 한국측 상무위원, 1932년 7월 임정 자격심사위원, 1933년 10월 국무위원을 역임했으며, 1934년. 6월 급성페렴으로 광제의원(廣濟醫院)에 입원 치료 중이던 바 6월 29일 오후 6시에 사망하였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당시 숙소겸 집무실..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윤봉길 의사】
1908년 충남 예산 출생의 윤봉길 의사는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난 뒤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본군의 전승 경축식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리자, 오전 11시 40분경 수통형 폭탄을 단상 위로 투척했다. 이 의거로 시라가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이 사망했고, 노무라 중장과 시게미쓰 주중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상하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1932년 5월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25세 나이로 총탄을 맞고 순국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김구 선생의 요청에 따라 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1946년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뉴시스에서 일부 발췌)
상해시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시대(1919~32)】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상하이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던 시기. 이 시기 임시 정부는 안정적이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정, 교통, 군사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광복정책을 펼치며 입지를 굳건히 했다. 교통국을 세워 자본과 정보 등의 유통을 원활하게 했고, 연통제를 실시하여 국내의 각 지점들을 관리 감독했다. 동시에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중국을 비롯해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에 한국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였으며, 제2차 인터내셔널 회의인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키는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밖에 무장독립론을 기본으로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배출도 놓치지 않았다. 이후 이봉창의 일왕폭살의거가 미수로 그치고, 윤봉길의 투탄의거로 일본의 주력 인사들이 사망하자 일본의 보복을 피해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다.(출처 : 다음백과 요약)
미국인 피치의 집으로 은신하여 위험을 벗어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후 일제는 현상금을 걸고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려 하였다. 김구와 함께 신한청년당 당원이었으며 중국국적을 가진 상해교통대학 체육교사인 신국권(申國權)의 주선으로 미국인 피치(S. A. Fitch, 중국명 (費吾生))와 교섭하였다. 그리하여 김구를 포함해 4명이 피치의 집으로 이주하여 20여 일을 은신하였다. 일제의 추적이 심해지자 임정은 항저우로 이전하였다.
항주시기 임시정부..
항주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김철(임시정부 국무위원)이 거주하던 '청태 제2여사(현 한정쾌첩)' 32호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그곳을 계속 청사로 사용한다. 1933년 1월 중국 국민정부 주선으로 장생로 호변촌 23호로 이전한다. 호변촌 23호 청사도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자 임시정부는 1934년 1월 강소성 진강(전장)으로 이사한다. 그러나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항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해(1934) 11월 판교로 오복리 2가 2호에 청사를 마련한다. 오복리 청사 역시 1년 후인 1935년 11월 가흥(자싱)을 거쳐 다시 진강으로 옮겨간다.
【청태 제2여사 32호】
1932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항저우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다. 현재 군영여관 자리인 인화로 22로이다. 그러나 청태 제2여사는 1920년대에 호빈로와 연령로 교차점에 위치하였고 이후 1933년에 현 위치로 이전한 것으로 밝혀져 다른 위치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재는 두 지점이 임시정부청사 건물로 추정이 되고 있다. 현재 두 곳 모두 기존 건물이 사라지고 상업시설이 들어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1933년 5월에는 김구-장제스(蔣介石) 회담..
항주 임시정부는 김철 선생 생존 당시 국무위원 업무와 조직을 재편하고 군사, 외교, 재정 분야에 중점을 둔다. 중국 국민정부와 우의를 다지면서 일본과 대항하는 동아시아 국가와의 연대를 강화한다. 1933년 5월에는 김구-장제스(蔣介石) 회담을 통해 지원을 약속받는다. 항주 시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피신 상황임에도 독립운동 최고 기관으로서 체제 정비에 진력하였다.
임시정부 이동경로 : 상해('19.4~'32.4) ~ 항주('32.5~'35.11) ~ 진강('35.11~'37.11) ~ 장사('37.11 ~ '38.7) ~광주('38.7~'38.10) ~ 유주('38.10~'39.5) ~기강('39.5~'40.9)~ 중경('40.9~'45.8)
중경시기 임시정부 요인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重慶 大韓民國臨時政府 廳舍)】
충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내의 마지막 청사 위치로 1940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 머물렀다. 1937년 발생한 중일전쟁 전후의 영향으로 1932년부터 상해시에 있던 소재지를 항저우시 등으로 옮겼고 중국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1940년 중국 내에서 마지막으로 이 곳으로 옮기게 된다.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석판가ㆍ양류가ㆍ오사야항의 3곳에 청사 건물을 두어 사용하였고 마지막으로 1945년 1월부터 8월까지 이곳 연화지 청사를 사용하였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머물며 1940년 9월17일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는 등 활발한 독립 운동을 펼쳤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설립(1940.9.17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은 1940년 9월 15일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이다. 흔히 약칭해서 ‘광복군’이라고 불린다.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1940년 9월 15일 「한국광복군선언문」이 발표되었고, 9월 17일에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典禮式)이 거행되었다. 창설 당시 총사령은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은 이밤석(李範奭)이 담당했다.
임정요원들이 1945.11.3일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의 사진으로 조소앙, 이시영, 김규식, 김구, 신익희 선생 등이 앞줄에 있네요..
벡번 김구 선생의 흉상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기념관 안쪽..
동호회 회장님이 기부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항저우 임시정부청사 방문을 끝으로 이번 국방동우회의 중국 여정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