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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산행/몽골

승마체험 및 공연관람 등(몽골여행 4일차 / 12, 7, 21)

by 산사랑 1 201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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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체험(몽골여행 4일차)

 

전날 테를지 국립공원 트레킹과 별 관측 등의 멋진 체험에 이어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승마체험으로 08시에 식사를 한 후 한시간 가량 휴식 후 09:30분에 게르에서 짐을 버스에 싣고 10:00부터 약 1시간에 걸쳐 승마체험을 하고, 유목민 집에 들러 마유주도 마셔보고, 치즈에 몽고 건빵을 발라 먹어보는 체험을 하였다.

 

 

승마체험 중인 울님들(일출님 작품)..

 

 

 

이날 아침에도 평소와 같이 05시에 일어나 밖을 나오니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게르에 까지 말들이 진출하여 풀을 뜯어 먹고 있었으며, 풀 뜯어 먹는 소리가 마치 낫으로 풀을 베는 소리같았다..

 

햇빛이 게르 쪽으로 서서히 접근해 갑니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특이한 송이버섯(?) 바위가 오늘 눈에 띄였습니다..

 

게르쪽을 보니 가스가 있어 어제보다 그림이 좋지 못하네요..

 

서서히 출발합니다..

 

아기코끼리 형상의 구름이 보입니다..

 

멋집니다(일출님 작품)..

 

 

뒷모습이 아름답네요(일출님 작품)..

 

 

 

여유가 있습니다..

 

 

 몽골 승마체험 안내자..

 

드뎌 1시간의 체험이 끝났습니다..

 

가아드인데 몽골인이라서 그런지 말을 능숙하게 다루더군요(일출님 작품)..

 

 승마 체험 마치고 기념사진(일출님 작품)..

  

 승마체험 후 들렀던 유목민 게르에서 마유주도 마시는 등 유목민 체험을 하고(산누리님 작품)..

 

체험을 마치고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오보(샤마니즘)에 도착했습니다..

 

오보를 돌고 있는 울님들..

 

오보 전면의 전경이 아름다워서..

 

 이동 중 본 몽골 마지막 왕의 궁전(일출님 작품)..

 

식사 후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1955년에 고비사막에 떨어진 운석이라고 합니다(심통님 작품).. 

 

자연사 박물관에는 공룡을 비롯한 각종 동식물, 광물 등 약 2만종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일출님 작품).

 

 

 

 

공룡사진으로 고비 사막에서 발굴하였다고 하더군요(심통님 작품).. 

 

 

 

몽골 최초 우주인으로 구라차 위그더데미디(47년생)로 몽골공군 출신으로  1981년 소유즈호에 탑승..

 

징기스칸이 어린시절 머물렀던 곳이라고 하네요..

 

칭기즈 칸(Chingiz Khan :成吉思汗 ;1162-1227)은 몽고 제국의 창건자, 원의 태조. 아명은 테무진이다. 전통적으로 몽고 수령들이 모두 귀족층에서 세습적으로 자리를 차지했던데 비해 칭기즈칸은 집안도 몰락한 상황에서 맨주먹 하나로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집안도 원래 귀족이었다. 부친은 예수게이 바가투르, 모친은 허얼룬이다. 그러나 그가 9세 되던 해 아버지가 경쟁 부족에게 독살되었고,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테무친(칭기즈 칸)은 귀족들에게 고통당하는 몽고의 하층민과 약소부락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후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오랜 포로 생활에서 탈출한 테무친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쓰러진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출세하고 싶었다. 그러나 초원에서는 기득권층인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권력 기반이 전무했던 그는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기득권층에 맞서기 위해 부족에서 이탈한 노비, 대장장이 등 초원의 민중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다른 부족 사람들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초원의 기존 질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부족과 씨족의 장인 귀족들은 즉각 연합군을 조직하여 테무친을 공격했다. 그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은 그와 어린 시절 의형제를 맺었던 자무카였다. 그러나 테무친의 평민 군대는 자무카의 귀족 군대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족 등을 깨고 몽고 평원을 통일했다. 그는 1206년에 열린 쿠릴타이(몽고족의 의사결정 회의체)에서 칭기즈 칸의 칭호를 받고 초원의 패자가 된다.

 

일부 사람들이 예정에 없는 마사지를 받으러 가는 바람에 약 1시간 30분을 주면에서 머물 수 밖에 없었으며,

이 때 본 몽골씨름경기장이라고 합니다.

 

몽골에는 아직도 전차가 다니고 있으며,

도로는 먼지로 뒤덮여 있어 정말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몽골 전통공연 관람을 하였으며,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더군요..

 

 몇 장 찍은 사진입니다(심통님 작품)..

 

 

 

전통공연 후 잠시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수흐바타르 광장에 들러 사진을 찍었습니다..

몽골 혁명의 아버지라 칭호를 받는 수흐바타르 동상입니다.

 

 

 

징기스칸 동상이 있는 몽골 국회의사당입니다..

 

드넓은 초원에서 정처없이 흩어져 살던 유목민들의 내부 힘을 한데 모아 폭발시켜 「팍스 몽골리카」(몽골 아래의 평화)를 이뤄낸 것은 칭기즈칸의 탁월한 지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칭기즈칸이 이전의 유수한 정복자와 달랐던 것은 모든 민족과 종교를 인정하는 개방적인 리더십을 갖춘 점이었다. 요즘 말로 「세계화」의 시각을 갖춘 리더십이었던 것. 둘째, 칭기즈칸의 「자유무역주의」정책은 파괴됐던 실크로드 도시를 다시 번성하게 했고 몽골제국에 엄청난 부의 축적을 가져왔다. 14세기 초의 원(元)제국과 베네치아공화국의 상인 보호에 대한 통상조약을 보면 「캐러밴(낙타대상)의 도난에 대해선 원이 변상한다. 세금은 일률적인 매상세 3.3%만 내고 관세는 물리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셋째, 칭기즈칸이 세운 「역참(驛站)제도」라는 독특한 통신망은 광대한 제국의 통치를 매우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역참제도는 대칸의 명령과 각종 정보가 빨리 전해질 수 있도록 40㎞마다 「참」이라는 역을 두고 숙박시설 식료 말을 구비해 놓은 것. 전령들은 릴레이식으로 하루에 5백㎞씩 주파, 카라코룸에서 유럽까지 보름이면 도착했다고 한다. 이 통신로는 20세기 초까지 가장 빠른 길이었고 그 후 유라시아 횡단철도가 건설되어 군사로 겸 통상로로 쓰이고 있다.

 

다음날 출국을 위해 몽골공항에서 본 전통악기 대형 ‘모린호르’

 

몽골인들은 애절한 모린호르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면 두고온 고향의 초원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말이 젖이 잘 나지 않을 때도 어미말 옆에서 모린호르를 연주하면 신기하게도 젖이 돌아 새끼에게 젖을 먹일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이글을 읽으시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종재기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