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2016. 9. 7일 수요일)】
문경새재는 지난 2007년 국가명승지로 지정된 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관광 100선’ 중 1위로 뽑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옛길로 선비와 관리, 보부상 등 길손들의 애환과 사연이 서린 길이다. 한 해 400여만 명이 찾는 곳이다.
문경새재는 영남대로(嶺南大路)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다. 조선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며, 전국을 ‘X’ 자 형태로 대로(大路) 6개를 구축했는데, 내륙 천 리 길인 영남대로는 한양과 부산 동래를 잇는 최단코스로 총연장이 380㎞에 달한다.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길은 세 갈래의 큰 재를 넘었는데 영주에서 죽령을 넘으면 단양이고, 김천에서 추풍령을 넘으면 황간이며, 그 사이로 문경에서 새재를 넘으면 곧 충주 땅이었다. 새재는 높고 험한 고갯길이다. 새조차 힘들게 넘나들 정도로 높고 험하다 해서 ‘새재’라고 불렸지만 ‘억새(草)가 우거진 고개’, ‘새(新)로 뚫린 고개’,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間)의 고개’라는 뜻도 담겨 있다.
문경새재는 태종 13년(1413년)에 길이 열렸다. 그전 까지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계립령이 유일한 길이었다. 새재에 있는 세 개의 관문은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이 산성을 만들고 관문을 설치하자고 주장해 이뤄졌다. 첫 번째 관문은 주흘관으로 숙종 34년(1708년) 설치 됐다. 2관문인 조곡관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27년(1594년)에 세워졌다. 3관문은 조령관으로 새재 꼭대기에 있다.
영남의 선비들은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올라갈 때 으레 새재를 넘었다. 죽령이나 추풍령보다 시간을 하루 이틀 단축하는 이점도 있지만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며,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반면 문경(聞慶)이라는 이름이 ‘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고, 문경의 옛 이름이었던 문희(聞喜) 역시‘기쁜 소식을 듣는다’라는 의미여서 굳이 험하고 험한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로 난 이 길을 선호했다. 사람들만 아니라 영남에서 거두는 30만 석의 세곡 가운데 무려 20만 석이 새재를 넘어 남한강의 가흥창에 쌓였다고 한다.
(출처 : 연합뉴스(16. 6.21)를 중심으로 재편집)
문경새재 제1관인 주흘관의 모습(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3:20 고사리마을에서 트레킹 시작(약 2시간 35분 트레킹)
수안보 상록호텔에서 진행한 미래설계 교육 중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옛길인 문경새재길을 걸었다. 코스는 고사리마을 ~ 제3관(조령관) ~ 제2관(조곡관) ~ 제1관(주흘관) ~ 문경새재 관리사무소까지 새재길 9.1km로 길을 걷는 대다수 여행객들은 제1관 ~ 제3관으로 걷는데 우리는 고사리마을 ~ 제3관까지 밖에 오르막이 없는 길을 택해 걸었다.
고사리마을에서 문경새재 관리소까지 새재길 9.1km를 걷는 코스 입니다..
• 고사리마을(13:20) ~ 제3관문(13:50)(고사리마을에서 약 30분소요)
고사리마을에서 약 8분 정도 올라가면 조령산 자연 휴양림이 나오며 어느 길로 가도 되지만 평이한 우측 길을 따라 진행하였다. 이 길은 지난 15.12.12일 건강셀프등산회 제 464차 산행으로 괴산 신선봉~ 마패봉으로 이어지는 조망 산행당시 마패봉에서 하산할 당시 걸었던 길로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 약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조령산 자연 휴양림에서 우측으로 진행합니다..
고사리마을에서 제3관문 까지 약 30분이 소요되고..
제3관문 약간 못미쳐 있는 물레방아..
제3관문인 조령관에 도착하고..
【제3관문 조령관】
제3관문은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하고 북쪽인 충북 괴산을 향해 문이 나 있다. 이는 왜군이 아닌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선조 때 쌓고 숙종 34년(1708년)에 중창한 것이다.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홀관에서 조곡관을 거쳐 3관문인 조령관까지 길이가 약 6.5km다.
• 제3관문(13:55) ~ 제2관문(14:45)(제3관문에서 약 50분소요)
제3관문에서 제2관문 내려가는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이며, 문경새재길은 나무들이 우거져 빛이 잘 스며들지 못하기 때문에 여름에 걷기 좋은 길이다. 특히 제3관문에서 2관문에 이르는 길은 숲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제3관문을 지나 조금 진행하면 제3관문 휴게소인 동화원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제2관문까지는 2.3km(제3관문 1.2km, 제1관문 5.6km)가 남았다.
제3관문을 지나갑니다..
이 일대의 산들은 여러 번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ㅎㅎ
3관문에서 2관문 가는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입니다..
3관문 휴식처인 동화원입니다..
가다보면 일제강점기에 수탈당한 소나무 송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임진년 당시 신립장군의 제2진의 본부터를 지날 수 있었다. 이곳은 임진년 당시 신립장군은 조령(목이 좁고 외길인 고모산성 토끼비리와 문경새재)이 아닌 기병전이 가능했던 개활지인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쳐 몰살을 당한 비극이 있는 곳이다. 기병술에 능한 신립은 기병전과 농민군으로 급조된 조선군의 탈영병 문제와 연락체계 등을 고려하여 탄금대에 진을 쳤다고 하는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대하여 너무도 몰랐던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새재를 넘다보면 조금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일제강점기에 수탈당한 소나무 송진의 흔적이다..
이진터를 지나다..
신립이 험한 문경새재를 버리고 조선 기병이 우세하다고 여겨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쳐 몰살을 당한 비극이 있는 곳이다..
이진터를 지나면 새색시의 수줍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색시폭포와 주로 산악지대에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집인 귀틀집과 아름다운 전설이 있는 바위굴을 지나갔다. 계곡물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문경새재 아리랑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문경새재가 아리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어서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2016.5.22일자 경북일보에 의하면 문경시 옛길박물관은 문경새재아리랑의 역사적 근거가 되는 헐버트 아리랑이 수록된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1896년)'를 확보했다고 한다, 이 아리랑에는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라는 문경새재아리랑 사설이 영문으로 수록돼 있어, 문경새재아리랑의 근대사적 근거가 되고 있다. 노래비 앞 단추를 누르면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문경새재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색시폭포의 한 단면,,
한국식 통나무 집인 귀틀집..
바위굴로 상당히 넒더군요..
계곡에는 물이 그리 많지는 않고..
문경새재 아리랑비로 노래비 앞 단추를 누르면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문경새재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옛 과거길이 나오고 이어서 제2관문인 조곡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조곡관은 임진란 발발 2년 후인 선조 27년(1594년)에 충주의 의병장 신충원이 축성한 것이라고 한다. 매바위 앞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 육군 4만 병력이 무혈로 통과한 길목으로 신충원은 새재 개울 앞 매바위 길목만 지키면 적은 병력으로도 나라를 지키리라 믿었다고 한다.(출처 조선닷컴)
옛과거길..
제2관인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
조곡관은 선조 27년(1594년) 충주의 의병장 신충원이 축성한 것으로 그 후 1907년 훼손되어 1979년에 복원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새재를 넘을 때 팔도대원수 신립 장군은 천혜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고, 조선군은 전멸했다.
• 제2관문(14:50) ~ 제1관문(15:42)(제2관문에서 약 52분소요)
제3관문에서 제2관문 내려가는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이며, 문경새재길은 나무들이 우거져
조곡관을 지나면서 지형을 살펴보면 천하의 요새임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는데 천하의 명장인 신립장군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문경새재길에서 가장 웅장한 폭포인 조곡폭포와 응암(매바우)폭포를 지나면서 시원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천하의 요새 자리이네요..
조곡폭포가 시원하게 흘러 내립니다..
응암(매바우) 폭포..
응암폭포 앞에는 국내유일의 순수 한글 비석인 ‘산불됴심’ 표석(도지정 문화재 226호)이 있었고, 소원성취탑을 지나면 송아지를 먹을 정도로 큰 꾸구리란 물고기가 살았다고 하는 꾸구리 바위가 나왔다. 연이어 드라마 <궁예>의 마지막 촬영지인 팔왕폭포를 지나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뒤 마지막 소회를 밝히는 궁예의 마지막 독백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 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국내유일의 순수 한글 비석인 ‘산불됴심’ 표석(도지정 문화재 226호)..
소원성취탑..
꾸구리 바위로 송아지를 먹을 정도로 큰 꾸구리가 살았다고 합니다..
드라마 <궁예>의 마지막 촬영지인 팔왕폭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뒤 마지막 소회를 밝히는 궁예의 마지막 독백이 있는 곳..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
퇴계 이황을 비롯한 수많은 선비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경승지였던 용추를 지나 신·구 경상감사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던 교귀정을 지났다. 교귀정 옆에는 기품있는 노송 한그루가 있었는데 뿌리는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 있고 줄기는 남쪽으로 향해 있어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교귀정을 지나면 문경새재를 지나던 길손들의 목도 축여주고 배도 채워주었던 주점이 있었고, 도적 떼와 여행객이 번갈아 쉬어갔다는 마당바위도 볼 수 있었다. 무인주점이 있었다는 무주암에 올라서니 주변의 경치가 한 눈에 들어 왔으며, 옛날 출장 온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조령원터도 볼 수 있었다.
교귀정 앞 용추는 퇴계 이황을 비롯한 수많은 선비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경승지였다.
신·구 경상감사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던 곳에 세워진 정자인 교귀정..
【교귀정(交龜亭)】
교귀정은 신·구 경상감사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던 곳에 세워진 정자다. 교귀정은 1470년 경에 문경현감 신승명이 건립했다.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타 없어졌다가 1999년 6월 복원했다. 새재 계곡과 마주 보는 구릉에 세워진 교귀정은 문경새재에서 정취가 가장 아름답다. 정자 옆에 뿌리를 내린 노송 한 그루가 운치를 더한다.
교귀정 옆의 운치있는 노송으로 뿌리는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 있고
줄기는 남쪽으로 향해 있어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한 모양이다.
교귀정과 기품있는 소나무..
'교귀'는 '거북모양의 관인을 주고 받는다'는 뜻으로 신·구 경상감사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던 곳..
선비들이 새재를 넘어가면서 술 밥을 해결하던 문경주막터..
도적 떼와 여행객이 번갈아 쉬어갔다는 마당바위..
무인주점이 있었다는 무주암..
옛날 출장 온 괸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조령원터..
조령원터를 지나 조그만 못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조그만 물고기들이 많이 있었고, 계곡사이에 영화촬영 당시 설치한 다리인 것 같은 나무다리가 폐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잠시 뒤에는 기름을 짜는 도구인 지름틀 바위가 있었는데 마치 악어같이 생겼으며,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취약한 지점에 돌을 쌍아 놓은 조산도 있었다. 조산을 지나 우리나라 사극 대다수를 촬영한 문경새재 오픈세트로 들어가는 다리가 있었고 입장료로 2,000원을 받고 있어 그냥 지나쳤다. 이어 1996년에 설치된 경북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이 있었으며 400년 후에 개봉한다고 하며, 마침내 영남 제1관인 주흘관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많이 있더군요..
맨발로 걷기 좋은 길입니다..
계곡을 건너던 나무다리인데 폐쇄했네요..
기름을 짜는 도구인 지름틀 바위..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인 조산..
문경새재 오픈세트 들어가는 다리..
【문경새재 오픈세트】
광화문과 궁궐, 저잣거리, 양반촌 등을 그대로 옮겨놓은 드라마 촬영장은 세트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조선 시대 거리를 걷는 느낌을 준다. ‘태조 왕건’, ‘대조영’, ‘연개소문’, ‘뿌리 깊은 나무’, ‘대왕세종’ '광개토대왕', '해를 품은 달', '광해', '전우치' 등 인기 사극이 모두 이곳에서 촬영됐다. 이곳에서 조금 만 내려가면 초곡성으로도 불리는 문경새재 제1관인 주흘관이 나온다.
입장료가 2,000원 입니다..
근초고왕, 성균관 스캔들도 촬영하고..
장사의 신, 대박, 마녀보감 등도 촬영했네요..
1996년 경북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로 400년 후에 개봉한다고 합니다..
영남 제1관인 주흘관입니다..
【주흘관】
영남의 제1관문 주흘관은 영남지방과 서울을 이어주는 관문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은은한 곡선미를 보이는 팔작지붕을 머리에 이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으며 길이는 동쪽 주흘산 방향이 약 500m, 서쪽 조령산 방향이 약 400m로, 새재 3개 관문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옛 모습을 장 간직하고 있다.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공사 실명제를 실시한 곳이다.
파노라마로 본 영남 제1관(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문경새재 과거길은 2007년 국가명승지로 지정된 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관광 100선’ 중 1위로 뽑힌 길이다.
주흘관을 지나면 옛길 박물관이 나왔는데 아주 운치 있게 지었으며, 9.9일 ~9.11일 까지 이어지는 약돌한우 축제를 위한 준비가 한창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기간중에 왔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며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주차장에 도착하여 오늘의 트레킹을 마무리하였다. 트레킹 후 월악산 자락으로 이동하여 오리백숙 등으로 저녁식사를 한 후 오늘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 하였다.
옛길 박물관이 아주 운치가 있습니다..
약돌한우 축제가 9.9일 ~9.11일 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트레킹을 마치고 월악산 자락으로 이동하여 식사를 하고..
▶트레킹 후기
문경새재길은 조선시대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세 개의 고개 중 하나로 굳이 죽령과 추풍령보다 험하고 험한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로 난 이 길을 선호하였으며, 영남 지역은 물론이고 호남 지역의 선비도 일부러 길을 둘러 와서 문경새재를 넘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76년대 문경새재길을 개발하려고 하다가 박정희대통령에 의해 전면 백지화되어 현재와 같이 맨발로 걸을 수 있고 관광공사가 선정한 '걷고 싶은 길' 1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 이 길은 1995년도 사무관 승진 후 연수중에 걸었으며 언젠가 다시 한 번 걷기를 희망하였으나 주변 산만 오르다가 이번에 걷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였다. 새재길은 2과문에서 3관문에 이르는 구간이 가장 볼거리가 많으며. 지속적으로 '걷고 싶은 길' 1위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길이 아름다워, 걷는 것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될 수 있었다. 이번에 걷지 못한 소로길을 따라 다시 한 번 걷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므로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걸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