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여행(17.2.13~14일)
남미 43일 여행을 준비하면서 킬리배낭 50L를 구매하고 테스트를 하려고 준비하던 중 대마도 1박2일 여행이 정말 저렴(119,000원)하게 나와 신청을 하고 남미여행 갈 수준으로 배낭을 꾸려 대마도 1박2일/통영2박3일/부산1박2일 총 7박8일의 여행을 위하여 부산으로 고속버스(일반 23,000원)를 타고 출발하였다. 사실 백수는 남는 것은 시간이요 없는 것은 돈이기에 최소한 저렴하게 다니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 본다. 부산에 도착하여 모친을 뵙고 그 다음날 아침 부산국제여객터미널로 가서 가이드 미팅 후 09;00출발하는 ‘오션플라워’호를 타고 대마도 이즈하라항에 11:30분 도착하여 약 1시간에 걸친 입국수속을 마치고 대마도에 상륙할 수 있었다.
한국전망대에서 본 모습으로 낮에는 부산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해가 떠 오른 후의 모습으로 부산항 대교가 보이네요..
대마도 여행 첫째 날(17. 2.13 / 월)
대마도에 도착하여 점심으로 도시락을 먹고 14:00부터 첫째 날 투어를 시작하였다. 투어 코스는 신사(神社) ~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 조선통신사 비 ~ 최익현순국비를 도보로 둘러보는 순서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그렇게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신사의 경우 신사참배가 생각이 나서 그런지 별로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가이드에 의하면 신사는 조상신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토착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으로 일본의 종교는 조상신을 섬기는 것이 50%, 불교가 49%라고 할 정도로 나중에 시내를 구경하면서 곳곳에 신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마도의 첫인상으로 우리나라의 선척정과 별반 다른 느낌이 들지 않네요..
점심으로 먹은 도시락으로 가이드 말로는 대마도에서 알아주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첫 번째 코스인 팔번궁신사는 일본 천황을 모신 대마도 최고의 신사로 토리이의 지붕석이 위로 치솟지 않고 일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일본 천황을 모신 대마도 최고인 팔번궁신사입니다..
【신사(神社)】
신사는 일본의 토착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었다. 이 토착 신앙을 신토(神道)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의 악령에 대한 두려움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참배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신토는 뚜렷한 교리도 없이 취락별 민간 신앙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도시마다 그들이 받드는 주제신(主祭神)도 다양했다. 주제신은 천황가의 조상신이라고 생각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 가장 많고, 역대 천황·유명 귀족·무사·문신·조상신 등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사에 모셔놓고 있다.
이와 같은 공식화된 신사 이외에 일본에는 여러 희한한 귀신들을 모시는 곳이 많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는가 하면 술의 신을 모시는 신사, 남근(男根)이나 여음(女陰)을 제신으로 하는 신사도 있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신사는 부산 신사로 17세기에 일본인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1925년부터 우리나라 내에서의 신사 정책을 본격화하였으며 그해 서울 남산에는 5년여의 공사 기간에 걸쳐 조선 신궁이 건립되어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말살하려고 했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발췌)
신사 내부로 들어 가네요..
신사와 절을 구분하는 방법은 하늘천자 비슷한 형상의 문이 있는 곳은 신사이고 없는 곳이 절이라고 하며, 절에 들어가면 불상이 있으나 신사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만 있다고 한다. 이번에 방문한 신사는 규모가 상당히 크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신사 입구에는 물이 있어 신사를 참배하려면 물로써 입과 손을 씻어야 된다고 합니다. 대충 둘러보고 내려와 보니 한쪽에 홍매화가 예쁘게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봄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신사 입구에는 손과 입을 씻는 곳이 있습니다..
커다란 나무가 있고..
홍매화가 예쁘게 피어 있어 봄을 실감할 수 있네요..
신사를 구경한 후 이즈하라 시청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카네이시죠(금석성)안에 있는 덕혜옹주 결혼 봉축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이동 중 커다란 귤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동 중 이층집은 다다미로 대변되는 일본인들의 주거 형태요 단층집은 백제시대부터 내려 온 한국인의 주거 형태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가 있는 곳은 금석성 담벼락 부근이며 비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왕가(李王家)라고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당시 대한제국의 존재를 상당히 얕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카다란 귤이 달려 있네요..
전형적인 일본 집으로 이층에서 주로 생활한다고 합니다..
매화도 볼 수 있고..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금석성 입구..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가는 길에 예쁜 동백꽃을 볼 수 있었고,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부근에 활짝 핀 홍매화를 볼 수 있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를 둘러 본 후 뒤로 조금 돌아가니 ‘조선국통신사지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비석은 조선국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조금은 예의를 지켰다고 할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비는 통신사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활발한 문화교류와 우호관계를 21세기 한일우호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1962년 세웠다고 한다.
동백이 화사하게 피어 있고..
활짝 핀 홍매화를 볼 수 있습니다..
비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왕가(李王家)라고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덕혜옹주】
덕혜옹주는 1931.5월 쓰시마 번주 소 다케유기 백작과 결혼을 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정혜가 있었는데 평탄치 못한 삶을 살다가 자살을 하였다. 이때의 충격으로 덕혜옹주는 우울증 등의 병으로 시달리다가 해방 후 1953년 다케유기와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거절하여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승낙을 하여 1962년 귀국하여 196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를 하였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는 결혼을 축하하는 뜻에서 건립되었으며,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다.
여기도 동백이 피어 있네요..
1962년에 세워진 조선통신사비가 있고..
【조선통신사】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반적으로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일본의 입장에선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후기 까지 조선 통신사라고 불렀을 뿐 정확한 명칭은 통신사이다. 임진왜란 후 쓰사마 번은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고 그 결과 약 200년간(1607~1811) 12회에 걸쳐 통신사 사절이 일본을 방문하여 한국의 우수한 문화를 일본에 전파해 주었다.
통신사 행렬이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 데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배로 부산에서 오사카에 이르고, 다음에는 육로로 갔다. 통신사가 지나는 각 번은 통신사를 국빈으로 대우하며 대접하였고, 일본 유학자 및 문인과의 교류, 그 외에도 일본 민중 문화에 끼치는 영향 또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쓰시마 도주는 조선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조선과의 전쟁이 일어나면 쓰시마가 전진기지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주민들이 핍박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이후 남아도는 무사들이 처치 곤란하여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최초에는 루숀섬으로 대변되는 필리핀을 치려고 하였으나 당시 필리핀과 교역 중이던 오사카 상인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세계의 천자가 되라고 하면서 명과의 전쟁을 부추키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사카 상인들의 생각은 명과의 전쟁을 하라고 하면 히데요시가 전쟁을 포기할 줄 알았지만 히데요시는 전후의 남아도는 무사를 처치하기 위해서 전쟁이 불가피하였고 그 불똥이 조선에 떨어져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조선 통신사 비를 둘러본 후 대마도 첫째 날 마지막 코스인 최익현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란 절로 이동을 하였다. 906년 11월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 선생의 유해는 백제 비구니가 건립했다는 슈젠지(修善寺)에 며칠 동안 안치되었다가 부산항으로 이송됐었고 이러한 인연으로 1986년 8월 선생의 넋을 기리기 위한 순국기념비가 수선사에 건립되었다. 비의 전면에는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인들도 최익현 선생을 존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비석이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한쪽에 있는 것은 조금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백제인이 설립했다는 수선사란 절 입구입니다..
1986년 8월 최익현 선생의 넋을 기리기 위한 설치한 순국기념비
【면암 최익현 선생】
독립운동가 면암 최익현선생(1833-1906)은 순조 33년(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여 당시의 대학자 이항로 선생의 문학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철종 6년 정시문과(庭時文科)에 오른 조선말기의 거유(巨濡)로서 고종 10년(1873년)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대원군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이 물러나는 계기를 만들었고 선생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다음해 6월 74세의 고령으로 제자 임병찬과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치하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쓰시마 섬에 유배되었으나 일본인이 주는 음식을 먹을수 없다 하여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지장보살에 옷을 입혀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에 옷을 입히는 이유..
수선사란 절 한쪽에 불상에 옷을 입혀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가이드에 따르면 거기에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고 한다. 그 불상은 지장보살로 지장보살은 모든 나쁜 업으로 괴로움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보살로 특히 죽은 후 갈 길을 헤매거나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의 고통을 면해 주고 성불하도록 해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지장보살에 옷을 입혀준 이유는 일본 어머니들이 먹을 것이 없어 가족들이 굶어 죽을 정도가 되면 아이들을 죽여 입을 들었다고 하며 그 아이의 영혼 구제를 위하여 지장보살에 어린이들의 기모노를 입힌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조금은 우리의 사고와 달라 적어 보았으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수선사 절에 문이 잠겨 있는 이유는 스님이 일하러 갔다고 합니다..
일본의 스님들은 절을 운영하기 위하여 별도의 일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최익현 선생의 비에 참배를 한 후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해물, 육류 바비큐를 먹었는데 다양한 재료가 있었고 맛도 있었다. 식사후 자유시간을 갖고 하루를 마감하였다.
육류로 닭. 돼지. 소고기의 모든 종류가 있더군요..
해물은 가리비, 새우 등이 있고 채소와 옥수수 등도 있어 푸짐했습니다..
대마도 여행 둘째 날(17. 2.14 / 화)
숙소에서 아침에 일어나 동네 한바퀴를 돌아보고 아침 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둘째 날 일정을 시작하였다. 둘째 날 일정은 만제키바시 ~ 해궁인 와타즈미 신사 ~ 면세점 ~ 한국전망대 ~ 미우다 해수욕장을 들러보고 히타카쓰항에서 부산으로 출발하는 코스였다.
아침에 숙소 주변을 돌아 봅니다..
우리나라의 조그만 항구와 흡사 합니다..
일본인 마을이란 느낌이 듭니다..
메뉴에 한글을 병행 표기하고 있네요..
하루 머물렀던 숙소로 방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규모가 적었습니다..
공원 바깥에 있는 안내도로 한글이 표시되어 이것만 있으면 이즈하라에서 관광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도 신사이며 도시 곳곳에 신사가 있습니다..
이즈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면세점이자 마트입니다..
이 수로를 따라 물이 바다로 흘러 갑니다..
일본에서는 길조라는 까마귀 한마리가 날아왔네요..
만관교(만제키바시)
시청 앞의 버스를 타고 약 30분 정도 달려 첫 번째 방문지인 만관교(만제키바시)에 도착하였다. 원래 쓰시마는 하나의 섬이었으나 1900년 아소만에 있는 군함을 대마도 동쪽해상으로 빨리 이동시키기 위해 5년에 걸쳐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을 뚫어 인공해협을 만들었다. 인공으로 굴삭해 생긴 흔적으로 만조 시 생기는 여러 겹의 소용돌이가 인상적이다. 이후 이곳에 다리를 세워 현재는 둘로 나누어진 쓰시마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만관교 입니다..
일본 함대가 3년에 걸쳐 이곳을 뚫고 도고제독이 여기서 함대를 발진하여 러시아 발틱함대를 섬멸하였는데 여기에서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지구둘레의 약 3/4에 해당하는 2.9만km를 항해하여 지친 상태로 대마도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대마도에 숨어 있던 일본 해군의 기습으로 긴 항해로 지쳐있던 러시아 발틱함대에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대마도가 하나의 섬으로 된 지도를 갖고 있어 일본군이 숨어있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으며 지친 상태에서 일본군의 학익진을 본뜬 T자전술로 발틱함대에게 2일만에 49척의 발틱함대가 3척만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갈 정도로 대승을 거두게 된 것이다. 당시 러시아 측의 전사자는 4,830여명(포로 6,106명)이 달한 반면 일본군은 117명만 사망(부상 583명)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대마도해전으로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고 한반도에서 우위를 확보하여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관교에서 본 모습..
이와 같이 만관교는 단순한 다리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발판이된 다리로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가 있는 다리라 할 수 있다. 만제키 전망대가 보수중이어서 만제키다리와 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을 볼 수 없어 다소 아쉬웠다.
(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도 지장보살에 옷을 입혀 놓았네요..
해궁인 와타즈미 신사
만관교를 구경한 후 버스로 약 30분 이동한 후 해궁인 와타즈미 신사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버스에서 파는 이동커피가 성황을 이루고 있었고, 바다로 향한 신사가 특이하였다. 와타즈미 신사는 이즈하라의 팔번궁 신사와 더불어 대마도의 대표적인 신사로 꼽힌다. 풍어와 뱃길 안전을 기원하는 해신(海神), 토요타마 히매와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해궁으로 본전 정면의 다섯 개의 신사문(도리이/鳥居)중 바다위에 서있는 두 개의 신사문은 조수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어 잔잔한 아소만과 어우러져 있는 것이 볼만했다. 신사 뒤쪽의 우거진 숲을 따라 버스 대기소로 가니 아담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버스에서 파는 이동커피가 성황을 이루고 있고..
두 개의 신사문이 바다에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경치가 아름답네요(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신사로 들어 갑니다..
신사 뒤쪽의 우거진 숲을 따라 버스 대기소로 가니 아담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더군요..
일본 최장수 은행나무
와타즈미 신사를 약 15분 정도 둘러보고 다시 버스로 약 50분 정도 이동하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1500년으로 둘레가 12.5m, 높이가 약23m에 달하며, 1798년 낙뢰로 인하여 화재의 상태가 남아 있지만 상태는 아주 양호하게 보였다.
백제에서 건너간 일본 최장수 은행나무..
한국전망대
장수 은행나무를 구경한 후 히타카쓰항으로 이동하여 면세점에 들른 후 식사를 하고 한국전망대로 이동하였다. 면세점 앞에는 이등방문이 탔다는 차가 전시되어 있으며 눈으로만 봐 달라고 쓰여 있었다. 히타카쓰항에서 약 10여분 버스를 타고 한국전망대로 이동하여 경치를 보았으나 낮에는 부산이 잘 보이지 않고 밤에는 불빛이 있어 부산이 잘 보인다고 하며, 광안리 불꽃축제 등을 할 때에도 멋있다고 합니다.
면세점 앞에는 이등방문이 탔다는 차가 전시되어 있고..
히타카쓰항의 파노라마(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쓰시마 한국전망대(対馬 韓國展望臺)는 쓰시마 최북단 와나우리에 위치라고 있으며, 한국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 147km로 한국에 헐씬 더 가깝다. 맑은 날에는 부산시와 거제시가 보이는 곳으로 부근에는 해상자위대 레이더 기지도 같이 있다.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설계단계에서부터 한국학자에게 자문을 구하고 한국산 재료를 사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전망대 안에는 조선통신사 행렬 등의 그림과 여러 자료가 전시돼 있다.
한국전망대 입니다..
전망대 앞으로 보이는 섬이 해상자위대의 레이더기지이며, 전망대 옆 조선역관사순난비는 1703년 풍랑으로 배가 뒤집혀 타국에서 숨진 108명 역관사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1991년에 세운 추모비로 비석에는 10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망대 앞으로 보이는 섬으로 해상자위대의 레이더기지 입니다..
당겨 본 모습..
조선역관사순난비로 1703년 풍랑으로 배가 뒤집혀 타국에서 숨진 108명 역관사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1991년에 세운 추모비입니다..
전망대에서 본 모습으로 이 앞쪽으로 부산이 보인다고 합니다(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전망대 안에는 조선통신사 행렬 등의 그림과 여러 자료가 전시돼 있고..
미우다 해수욕장
한국전망대를 구경하고 버스로 5분 거리에 있는 미우다 해수욕장으로 이동을 하였다. 일본의 해변 100선에 선정된 해수욕장으로 대마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우다 해수욕장은 대마도에서는 보기 힘든 천연의 고운 모랫길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고, 에메랄드 빛 섞인 푸른 바다위에 작은 암초가 있어 멋진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암초 위에서 해변을 바라보는 풍경도 멋있었으며, 주변에 동백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해수욕장 위에 있는 전망대..
암초 위에 관광객들이 올라가 있고(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미우라 해변의 좌측면(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미우라 해변의 우측면(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뒷모습을 찍고 있는 것이 보기 좋네요..
동백이 예쁘게 피어있고..
미우라해수욕장 구경을 끝으로 히타카쓰항으로 이동하여 출항 수속을 받은 후 16:30분경 부산으로 출발하였으며, 약 1시간 10분이 지난 17:40분경 부산국제 여객터미널에 도착하여 대마도 1박2일의 여정을 마무리 하였다.
히타카쓰항에 정박해 있는 오션플라워 호..
▶대마도 여행 후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떠난 대마도에서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생각들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대마도 주민이 35,000여명에 불과한데 한국 관광객이 평일에는 천명, 주말에는 약 이천여 명이 대마도 관광을 함에 따라 일부 가게에선 한국인을 잡기 위해서 한글로 메뉴가 되어 있는가 하면 일부 가게에서는 아예 한국인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이중성을 엿볼 수 있었다. 대마도의 기후는 부산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동백도 피어 있고, 홍매화가 피어 잇는 것을 보니 부산보다는 조금 따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 대마도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후 조선 명종 때까지 경상도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선정벌의 전초기지로 주민들이 많은 고초를 겪은 곳이며, 임진왜란 후에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어 한국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근대로 넘어 오면서 도고제독이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응용한 전술로 발틱함대에 승리를 거두어 한반도에서 우위를 점하여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하는데 일조를 하였으며, 덕혜옹주가 대마도주 아들과 정략결혼을 하고,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이곳에서 굶어 죽은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이 있는 대마도에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 8. 18일 '대마도(쓰시마)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하였으며, 일본이 항의하자 외무부를 시켜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4. 27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있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된 적이 있다. 독도 영유권에 대하여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키는 시점에 대마도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 우리나라 영토임을 주장해 봄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