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청계산 산행을 마치고 신원역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몽양 여운형 생가·기념관】
양평군에서 태어났던 몽양 여운형의 생애와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2011년 11월 27일에 개관하였다.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던 몽양이 걸어온 길을 통해서 그가 활동하였던 업적과 1947년 암살되기까지의 연대기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몽양이 생전에 썼던 유품과 저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과 동시에 몽양이 태어났던 신원리 생가도 복원되었으며 2012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인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몽양의 생가는 원래 양평군 신원리에 있었으나 몽양이 사망한 이후인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소실되어서 터만 남았다가 원형의 가옥으로 복원되었다.
양평군에서는 2008년 몽양이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함에 따라 양평 출신인 몽양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가 활동했던 공적 등을 기리기 위해 몽양의 생가를 복원함과 동시에 기념관을 세우게 되었다. 양서면 신원리 623의 1 일원 생가는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안채, 사랑채, 방앗간, 닭장 등을 복원해 몽양이 살았던 시대와 공간 느낌을 되살렸다.
34억 원을 들여 생가 옆에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1천55㎡ 규모로 지어진 기념관에는 암살 당시 몽양이 입었던 피 묻은 옷, 생가 현판, 1946년 환갑 때 선물 받은 일주 김진우 선생의 수연연풍 등 유족이 기증한 20점을 포함해 모두 50점의 유품이 전시됐다. (출처 : 위키 백과를 중심으로 재편집)

몽양기념관 주차장이 예전 몽양이 1907년에 세운 광동학교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여운형 선생의 발자취(광동학교설빕, 국채보상운동 등)를 볼 수 있다..

【몽양 여운형】
일제강점기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준비했던 독립운동가 및 정치가. 본관은 함양, 호는 몽양으로 1919년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이후 해방에 대비하고자 1944년 조선건국동맹,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46년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났을 때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좌우합작위원회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47년 7월 19일 극우파 한지근의 저격으로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 3월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 추서, 2008년 2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 추서 하였다. (다음 백과 요약)
책을 읽고 계시는 몽양여운형 선생 동상..

1946년 환갑 때 선물 받은 일주 김진우 선생의 수연연풍..
김진우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화가로 대나무 그림에 능했으며, 그림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다고 한다..

여운형 선생 친필 '애오와"로 1940년에 쓴 글이며 '사랑하는 나의 집'이란 뜻이다.

‘朱子留客文’(주자유객문)이 발을 멈추게 한다..

1943년 6월경 몽양이 일제에 협력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고 찾아온 사람에게 보여주었다는 ‘朱子留客文’이다. 이 글은 주자가 귀한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이 글을 보이면서 “이걸 풀이하면 그냥 가도 좋고 만일 풀지 못하면 자고 가야 한다.”라고 했다 한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평하든지 거기에 대해 기뻐하거나 노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가 떳떳하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입방아를 찧어도 내가 정당할 것이고, 내 스스로 떳떳하지 않다면 사람들이 나를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치켜세워도 사실은 내가 정당하지 못한 사람이다. 즉, 나 자신의 됨됨이 여부가 문제이지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는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여운형 선생은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체육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에도 노력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보도하면서 일장기를 지웠는데,〈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이 알려진 후 이 사실이 발각되어 1937년 11월에 폐간되었다.

생가터에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 생가지 비문..

기념관에서 생가로 나오는 곳에 학생들의 그림을 타일로 제작하여 붙여 놓았더군요..

사랑채 입구에는 영회암(永懷庵)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름과 명예를 영원히 지키라'라는 뜻으로 자손들로 하여금 영원히 이름과 명예를 지키라는 선조의 유훈을 지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함양 여씨가 용문산 부용봉 아래 강과 산이 휘감아도는 완만한 묘골에 조선 숙종 41년 집을 지었으며, 선생이 부모 탈상을 마친 후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서울로 이사를 간 1908년(22세)까지 살았으며. 해방 전후 1940년 초중반에 종종 내려와서 지낸 곳이다.

마당에 디딜방아가 있습니다..

생가에 전시된 가구들은 1930년대 이후 선생이 거주하셨던 계동 집에서 있었던 물건들로 후손이 기증하여 전시되어 있다.

면도하는 모형..

가래, 지게, 물지게 등이 보이고..

물지게를 짊어지고 있네요..

짚신, 소쿠리, 키도 보이고..


몽양 여운형 선생의 발자취를 둘러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