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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3일차(23. 6. 25일) 인도 델리 암리차르/ 시크교 황금사원, 잘리언왈라 바그 공원

by 산사랑 1 2023.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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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노라마로 본 시크교 황금사원의 모습..

구르드와라 방글라 사히브(Gurdwara Bangla Sahib)  / 평등과 자비의 시크교 성지 
구르드와라 방글라 사히브는 델리에서 가장 유명한 시크교 성지다. 이곳이 성지가 된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1664년, 시크교의 8대 구루였던 7살의 하르 크리샨(Har Krishan)은 자이 싱 1세(Jai SinghⅠ, 1611~1667년)의 초대로 델리에 몇 달을 머물게 됐는데 그때 천연두와 콜레라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치료소로 삼아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치유력이 있다는 거처 우물의 성수를 나눠 주며 치료했지만, 그만 그 자신이 천연두에 걸려 그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방글라 사히브는 당시 그가 머물렀던 궁전 자리 위에 1783년 재건됐고 현대적인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47년이다. 시크교는 15세기 인도 서북부 펀자브 지역에서 탄생했다. 기본 교리는 이슬람교의 신념과 일치하지만 박티(Bhaki), 봉헌의 성격은 힌두교와 비슷하다. 하지만 단순하게 두 개의 기존 종교를 하나로 합쳐 만든 종교는 아니다. 시크교는 문헌을 검토해서 철학적으로 신앙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창시자 나나크(Nanak, 1469~1538년)가 체험한 결정적인 계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나크는 35세 때 숲에서 목욕을 하던 중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사흘 후 숲에서 나와 “힌두교도라는 것도 회교도라는 것도 없다”라고 선포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시크’라 불렸는데 이는 펀자브어로 ‘제자’라는 뜻이다. 시크교의 교리는 단순하다. 창조주 유일신 개념을 중심에 두고 힌두교의 의식과 순례, 극단적인 고행, 우상숭배 등은 배척하고 업(Karma)과 윤회 사상은 받아들였다. 또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이슬람교의 사상을 받아들여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노동과 금욕생활을 강조한다. 

나나크 이후에는 열 명의 구루가 있었다. 10대 구루인 고빈드 싱(Gobind Singh, 1675~1708년)을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시크교 성전인 <그란트 Granth>를 구루로 삼았다. 고빈드 싱은 정당방위를 위해 칼사(Khalsa)를 조직하고 이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싱(Singhs)’ 즉, ‘사자(獅子)’라는 이름을 주었다. 싱은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는 터번을 썼다. 또 짧은 바지에 쇠로 된 팔찌를 끼고 단검을 차고 다녔다.  시크교인은 인도에서 가장 훌륭한 군인이라 인정받는데 인도의 전 수상 인디라 간디의 경호원으로 일하다가 그녀를 암살한 이들도 시크교인이었다.*

 

방글라 사히브에서는 종교나 인종에 관계없이 사원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매일 무료로 식사를 제공한다. 황금색 돔이 빛나는 본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물에 발을 적셔 씻은 다음, 신발과 양말을 벗고 남자건 여자건 두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짐을 맡긴 후에야 입장이 가능하다. 본당 안에서는 화려하게 치장된 <그란트>에 극진한 예우를 바친다. 경을 읽는 사제와 헌금을 받는 사제, 찬가를 연주하는 악단들의 노래가 성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정성껏 기도하는 신도들이 가득하다. <그란트>는 아침에는 화려하게 치장된 차양 아래 옥좌에 안치되고 저녁에는 성스러운 방으로 옮겨진다.  본당 옆에는 성스러운 호수라는 사르오바르(Sarovar)가 있는데, 사람들은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이곳에서 몸을 씻기도 한다. 이 외에도 주방과 학교, 아트 갤러리 등이 경 내에 자리한다.

*인디라 간디 암살 사건 | 1980년 인디라 간디는 지역 정당들을 탄압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했지만 분리주의 운동이 거세졌다. 특히 펀자브 지역 시크교도들의 반발이 컸는데 이들은 1984년 독립을 요구하며 암리차르(Amritsar)에 있는 시크교 본사인 황금사원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때 군대를 앞세운 무력진압에 의해 400여 명의 시크교도들이 현장에서 사살됐고, 인디라 간디는 그해 10월 자신의 시크교인 경호원 3명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그 파장은 엄청나서 수상의 죽음으로 인해 델리에서만 시크교인 2,000명이 힌두교도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인도 내에서 시크교인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늘 소수에 속한다. 때문에 펀자브를 인도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어 인도 정부와 충돌을 빚기도 한다. ((출처 :  (주)여행신문  www.traveltimes.co.kr & 트래비 www.travie.com ) 

 

 

중앙아시아 ~ 카라코롬 3일차(23. 6.25일) 암리차르 : 시크교 사원인 골든템플(황금사원) 경내 둘러보기.  

오늘은 오전에 암리차르에 있는 시크교 사원인 골든템플(황금사원)을 둘러 보기로 하였다. 아침 10시 숙소를 나와 4명이 한 조가 되어 릭샤(100루피)를 타고 약 20분을 달려 황금사원 입구에 도착하였다. 릭샤에서 내려 도로를 릭샤에 내려 황금사원 가는 길에 많은 동상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뒷골목으로 들어가니 거리는 지저분하고 전선줄은 아무렇게나 얽혀 있고, 거리에서 이발을 하며, 당나귀와 차가  뒤엉켜 다니고 있었다.. 뒷골목을 빠져나와 잠시 걸어가자 순백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원에 들어서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원에 들어가려면 긴 바지를 입고 신발을 맡긴 후 두건을 머리를 싸매고 입장을 하는데 짐검사를 한다. 담배와 라이터를 소지하고는 입장할 수가 없다. 사원 입구에는 무료로 두건을 빌려주고 있었다. 

 

릭샤에 내려 황금사원 가는 길에 많은 동상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암리차르
영국 BBC방송이 선정한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 가운데 6위에 선정된 암리차르는 시크교의 총본산이 있는 곳으로 파키스탄의 주요 도시인 라호르와 대치하는 교통․군사상의 요지이다.  펀자브 주 최대의 도시로 파키스탄 국경에서 25㎞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서 상업·문화·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1577년 시크교의 제4대 구루(Gurū)였던 람 다스가 암리타사라스(Amrita Saras)라는 신성한 저수지 주변에 건설한 도시로 암리차르라는 지명은 이 저수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저수지 중앙에 세워졌던 사원은 구리로 된 돔형 지붕에 금박을 입힘에 따라 하리만디르 또는 황금사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시크교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교세가 점차 확장되면서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1849년에 영국령 인도로 편입되었다. 1919년 4월 13일에는 잘리안왈라바그 공원에서 암리차르 대학살 사건이 일어나 379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정부군이 정치집회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참극으로서 사건 발생지인 잘리안왈라바그 공원은 현재 국가기념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1984년에는 또다른 정치적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인도 군대는 황금사원을 장악하고 사원 안에서 저항하는 수백 명의 시크 분리주의자들을 공격해, 정확한 공식 집계는 아니지만 450~1,200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암리차르에는 오늘날 견직을 비롯한 섬유직조·제분·정미·곡물가공·제혁·통조림제조와 각종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델리와 파키스탄의 라호르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변에 위치한 철도의 주요 연결점으로 근처에 공항이 한 군데 있다. 시내에 의과대학·치과대학·예술대학·기술대학이 있으며, 1899년에 설립된 칼사대학이 외곽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암리차르 행정구는 라비 강과 베아스 강이 흐르는 대체로 평탄한 평야지대에 위치한다. 기후가 꽤 건조하여 농업은 주로 상(上) 바리도 아브 운하체계 등 관개시설에 의존하고 있다. 밀·콩·옥수수가 주요 작물이다.(출처 : 다음백과)

 

이층 버스와 릭샤가 공존하고..

뒷골목 풍경으로 거리는 지저분하고 전선줄은 아무렇게나 얽혀 있고, 거리에서 이발을 하며, 당나귀와 차가  뒤엉켜 다니고 있었다..

사원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사원에 들어가려면 긴 바지를 입고 신발을 맡긴 후   맨발에 두건을 빌려 쓰고 소지품검사(담배, 라이터는 소지불가)를 받고 들어갑니다..

북문을 통해 물에 발을 씻고 사원 안으로 들어서자 황금색 하리 만디르(Hari Mandir)가 눈에 들어왔다. 호수 가운데에 자리한 황금사원에는 경전인 그란트 사힙(Granth Sahib)이 있는데 다리(Guru's Bridge)로 연결되어 있다. ​1577년 시크교의 제4대 구루(Gurū)였던 람 다스(Ram Das)가 황금 사원(Hari 신, Mandir 사원)을 건립하여 시크교의 총본산이 되었고 후에 시크교 왕국의 마하라자(왕)였던 란지트 싱의 기부로 구리로 된 돔형 지붕에 금박을 입혔다고 한다. 호수 오른쪽에는 아딸 타캇(Atal Takhat = throne of timeless)이, 왼쪽에는 식당(Guru Ka Langar)이 자리하고 있다.

 

두건을 쓰고 황금사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호수 가운데에 자리한 황금사원에는 경전인 그란트 사힙(Granth Sahib)이 있는데

아침에는 화려하게 치장된 차양 아래 옥좌에 안치되고 저녁에는 성스러운 방으로 옮겨진다.

황금사원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고,,

호수 오른쪽에는 아딸 타캇(Atal Takhat = throne of timeless)이 있고..

호수 왼쪽에는 식당(Guru Ka Langar)이 자리하고 있다..

황금사원으로 들어오면 많은 사람들이 황금사원을 배경으로 경배를 하고 이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호수 안에 밧줄이 쳐져 있는 곳에 들어가 정화의식을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성스러운 호수라는 사르오바르(Sarovar)가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어 이곳에서 몸을 씻는다고 한다. 무료식당 방향으로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이동을 하였으나 배가 고프지도 않고 날씨가 너무 더워 그냥 통과하였다. 조금 지나가다 보니 잘린 자기 목과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의 그림 앞에 시주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유명한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 확인을 해 보니 찬가를 연주하는 악단들의 연주가 성전을 쩌렁쩌렁 울리며 많은 사랍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고, 커다란 나무 아래에는 더위를 피해 사람들이 휴식을 하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무더워 약 40분 정도 구경을 한 후 저녁에 다시 오기로 하고 황금사원을 나왔다

 

황금사원에 경배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스러운 호수라는 사르오바르(Sarovar)에서 정화의식을 하네요..

식사장소로 가기 위해 손을 싯고 있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식당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잘린 자기 목과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의 그림 앞에 시주를 하기 위하여 줄을 서고 있습니다..

 성스러운 호수라는 사르오바르(Sarovar)를 청소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찬가를 연주하는 악단들의 연주가 성전을 쩌렁쩌렁 울리며 많은 사랍들이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시크교인의 특징은 염색한 천으로 두껍고 정교하게 말아 올린 터번을 두르고, 길게 기른 수염으로 현실에 맞게 수염은 깎아도 되지만, 머리카락은 자르지 않는다고 한다.

커다란 나무 아래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약 40분 정도 구경을 한 후 황금사원에서 나왔습니다..

온도가 섭씨 36도로 땀이 가만히 있어도 줄줄 흘러내렸다. 인도에서 시크교는 1,600여만 명에 불과한 소수 종교지만 인도 전역에서 주요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사원을 빠져나와 일행들과 합류한 후 신발을 찾아 황금사원을 나왔다. 황금사원 바깥쪽은 현대식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날이 너무 더워 쉴 곳을 찾았는데 근처에 맥도널드가 있어 그곳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더위를 식힌 후 다시 햄버거와 콜라로 식사를 하고 인근에 자리한 잘리언왈라 바그(Jallianwala Bagh 정원)를 찾았다. 1919년 인도인들이 롤라트 법(선동 교사죄로 의심되는 인도인들을 재판 없이 투옥시킬 수 있는 권한)의 철폐를 요구하면서 잘리안왈라 바그(Jallianwala Bagh)에서 집회를 벌였는데 영국인들이 무차별로 사격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이다. 잘리언왈라 바그 가는 길은 부조로 된 통로를 따라 들어간다. 

 

황금사원 바깥쪽은 현대식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학살 당시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 같습니다..

잘리언왈라 바그 가는 길은 부조로 된 통로를 따라 들어갑니다..

잘리안왈라 바그 대학살은 간디를 중심으로 한 비폭력 저항 운동인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현재는 인도 독립운동의 교육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잘리안왈라에는 당시 기관총 자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물이 보존되어 있었다. 공원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마치 학살 당시의 상황을 묵묵히 지켜본 산 증인 같았다. 잠시 둘러본 후 공원을 나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은 후 릭샤를 타고(100루피)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휴식을 취하고 18시에 숙소 라운지에서 다시 만나 황금사원의 일몰과 야경을 기로 하였다.

 

잘리안왈라 바그 공원으로 들어 가는데 추모탑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추모탑입니다..

 잘리안왈라 바그 대학살

 1919년 4월 13일 잘리안왈라 바그로 알려진 펀자브 지방의 암리차르에서 영국군이 무장하지 않은 인도 시위대 군중에게 발포하여 최소 379명에서 최대 1500명이 사망하고, 1200여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시위는 경찰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시민을 체포할 권한을 주는 로우라트법에 대한 항의 집회였다.  이 사건은 간디의 무저항·무협조운동(nonviolent noncooperation movement)의 계기가 되었고, 결국 영국의 인도 통치의 끝과 인도 독립의 시발점이 되었다.
 
잘리안왈라 바그 대학살 사건은 인도인에 대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소한의 무력 사용(minimal force whenever possible)’ 원칙이 파기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도인들의 영국에 대한 신뢰도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파괴되었다. 영국 정부는 보리스 존슨 총리가 2019년 ‘깊은 유감(deep regret)’이라는 공식 사과를 할 때까지 이 사건에 대한 공식 사과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영국과 인도 두 나라 사이에 넘기가 힘들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당시 영국 전쟁장관(육군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이를 두고 ‘어불성설의 잔혹한 행위’라면서 영국 하원에서 성토했다. 영국 하원은 사령관의 처벌을 247대 37로 승인했다.(출처 : 월간조선/ 23.8월호에서 일부 발췌)
 

잘리안왈라 바그 대학살 당시 기관총 자욱이 그대로 남아 있고..

 

잘리안왈라 바그 공원에 있는 고목

공원을 나와 아이스크림 가게로 갑니다..

아이스크림 가게와 사장..

숙소로 가는 길에서 본 모습들..

 

18시 숙소라운지에서 황금사원의 일몰과 야경을 보기 위하여 다시 모였는데 일단 맥주를 한잔 한 후 출발하기로 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당초 가려던 맥주집은 문을 닫았고 다른 맥주집도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로컬 주점을 발견하여 그곳에서 맥주 한 잔을 하려고 들어갔는데 서빙을 하는 직원(?)이 자기 동생이 시흥에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살갑게 대해 주었다. 이곳에서 탄트라치킨, 생선튀김 등과 맥주를 마시면서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남자 싱글 다섯과 여성 자매 두 분 이었는데 정말 쟁쟁한 분들이었다. 이 분들에 대하여는 여행중 하나하나 자세히 소개를 하기로하겠다. 간략히 말씀을 드리면 싱글 팀 조장은 50대 후반의 이비인후과 의사로 현재까지 남미 잉카트레일, 킬리만자로 등반 등 90개국 이상을 혼자 여행을 한 사람이다. 60대 초반의 이대표는 연매출 5000억 이상을 했던 사업가로 오체투지하는 분들과 함께 6개월을 동반하는 등 전세계를 역시 혼자 여행을 하던 분으로 이번에 처음으로 단체여행을 한다고 하였다. 60대 초반의 지점장 출신은 나와 동남아 한달을 룸메이트로 같이 여행을 한 분으로 인도로 가는 여행사를 통하여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 조지아 등을 여행하였고 그외에도 수많은 국가들을 여행한 베타랑이다. 마지막 싱글 남자분은 60대 초반의 공무원 출신으로 이분도 남미, 아프리카 킬리만자르 등 많은 여행을 한 사람이다. 여성 자매 두분 중 언니는 60대 중반으로 여행작가로 여행 관련 책을 세권 냈다고 하며, 50대 후반의 동생은 사진작가로 전시회를 마치고 이번 여행에 언니와 함께 여행을 왔다고 한다. 두 자매도 그동안 수많은 여행을 함께한 베테랑으로 많은 에피소드를 공유하고 있었다. 정말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으며 이들과 함께 하는 이번 여행이 엄청 기대가 되었다.

 

로칼식당에서 탄트라치킨, 생선튀김 등과 맥주를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바깥에 잠시 나갔다 온 분이 바깥에는 비가 내렸으며, 물이 범람하고 있다고 하여 믿지를 않았는데 술 한 잔 하고 바깥에 나오니 정말 물이 범람하여 바지를 걷고 호텔까지 걸어왔는데 호텔 역시 물이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이곳만 해도 신도시와 같이 건물들도 새로 지은 곳이 많았지만 배수가 잘 되지 않은 것이 현재 인도의 모습인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황금사원 야경을 보려고 했던 계획은 비로 인하여 취소했지만 즐거운 모임을 가질 수 있어 더 좋았던 것 같은 하루였다.

 

호텔 앞도 물이 차 올라 직원이 물을 빼고 있네요..

내일은 라호르로 들어가는데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