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산행(2023. 12. 9일 토요일)】
인왕산(338m)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암반이 노출된 것이 특징이다.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지나며 동쪽 산허리에 북악산길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인왕산은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세종 때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이라 하였으나, 1995년 본래 지명인 인왕산(仁王山)으로 환원되었다.
경복궁 왼쪽에 자리한 인왕산은 예로부터 황제가 태어날 명당이 있다는 말들이 심심찮게 돌았다. 도성의 풍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풍경, 한양을 대표할 풍경은 모두 이곳 인왕산 주변을 맴돌고 있다. 특히 필운대(弼雲臺), 청풍계(淸風溪), 반송지(盤松池), 세검정(洗劍亭)은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의 '국도팔영(國都八詠)'에 꼽혀 한양 명승지의 절반을 인왕산 자락이 차지했다.
정상에 오르면 경복궁을 중심으로 인왕산과 함께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내사산인 낙산, 남산, 백악산이 펼쳐진다. 북한산에서 볼 때, 북악산을 중심으로 좌측에 낙산, 우측에 인왕산이 있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룬다. 특이한 형태의 암석과 암벽의 웅대함이 등산객의 감탄을 자아내며, 정상에 서면 서울 중심가의 빌딩들과 청와대 부근의 녹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출처 : Daum백과사전을 중심으로 재편집]
인왕산 명물바위& 소나무의 멋진 모습..
건강셀프등산회 제 911차 산행은 인왕산이 추진되어 산행은 경복궁역 ~ 사적단 ~ 황학정 ~ 범바위 ~ 인왕산 정상 ~ 기차바위 ~ 홍지문갈림길 ~ 세검정으로 추진하였다. 기차바위에는 작년에 발생한 산불의 흔적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에서 산행을 마무리하고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랑을 둘러보고 하림각에서 삼선짜장&탕수육으로 산행을 마무리하였다..
산행추진 : 경복궁역 ~ 사적단 ~ 황학정 ~ 범바위 ~ 인왕산 정상 ~ 기차바위 ~ 홍지문갈림길 ~ 세검정으로 추진
새로 지은 담벼락..
사직단입니다..
【사직단】
사적 제121호. 면적은 43,587㎡.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을 가리킨다. 두 신을 제사 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社稷壇)이다. 조선시대 사직단을 관장하던 관청은 사직서(社稷署)였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禮)』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사직단을 보면, 한가운데에 사단과 직단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너비는 2장 5자이고 높이는 3자였다. 유의 한쪽 면의 길이는 25보(步)였으며, 사방으로 홍살문이 있었다.
사직단은 임진왜란으로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단만 남았다. 신위는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묻어 보관되었다가 평양으로 옮겨졌으며,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게 되자 세자가 받들고 황해·강원도 등으로 다니다가 환도해서는 심의겸(沈義謙)의 집에 종묘의 신위와 함께 모셨다. 1596년(선조 29)에 신실을 지어 봉안하였다. 사직단이 완전히 중건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03년(선조 36)에 사직단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608년(선조 41) 종묘가 중건되기 전에 복건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사직의 규모가 매우 축소되었으며 부속 건물 가운데 재실(齋室)로 쓰이던 안향청과 정문만이 남아 있다. 조선의 사직 제사는 1년에 3번, 봄·가을 납일(臘日)에 제사를 지내고, 기고(祈告) 제사도 사직에서 지냈다. 주현에서 지내는 사직 제사는 봄·가을 두 번 지냈으며, 국왕 대신 그 지역의 수령이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국가’ 자체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일 정도로 상징적인 곳이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일부 발췌)
전통활터인 황학정..
【황학정】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197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정자는 1898년 어명에 의하여 경희궁의 회상전(會祥殿) 북쪽 궁장(宮墻) 가까이에 꾸며졌던 궁술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이다. 1922년 일본사람들이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를 짓기 위하여 경희궁을 헐 때,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한말에는 도성 안 서쪽에 다섯 군데의 사정이 있어서 이것을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이라 하였다. 옥동(玉洞)의 등룡정(登龍亭), 삼청동의 운룡정(雲龍亭),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누상동의 풍소정(風嘯亭), 필운동(弼雲洞)의 등과정(登科亭)이 그것이다. 현재 황학정이 서 있는 자리는 원래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이다. 오사정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버린 오늘날에도 황학정에서는 때때로 궁술행사가 거행되어 옛 무인들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황학정을 뒤로하고 인왕산 숲길 쪽으로 진행합니다..
인왕산 호랑이 상..
성벽갈림길에서 성벽 바깥쪽으로 진행을 합니다. / 성벽은 보수한 흔적들을 여기저기 볼 수 있습니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모자바위 뒤로 군부대 막사도 보이고..
퇴적과 풍화작용으로 구멍이 난 바위..
스님이 기도하는 모습인 선바위도 보이고..
【선바위】
인왕산 중턱 선바위가 묘한 기운을 풍긴다. 바위는 검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며 까마귀들이 주변을 선회한다. 선바위는 성곽 바로 바깥이고 주변에는 무당들의 굿당들이 산재해 있다. 선바위에는 정도전과 무학대사 사이의 일화가 전한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끼고 도성을 쌓길 원했고 정도전은 그 반대였다. 두 사람이 한창 논쟁하던 어느 겨울날 눈이 많이 왔는데 선바위 옆으로는 눈이 다 녹은 신기한 일이 태조에게 보고됐다. 태조는 눈이 녹은 곳과 녹지 않은 곳을 경계로 도성을 축성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래서 선바위가 성 바깥으로 놓이게 됐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이제 중은 선비들 책 짐이나 들어주게 됐다고 한탄했다.
인왕산 정상에서 성곽을 따라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선바위는 인왕산 동편과 서편 그 경계를 가르는 곳에 있다. 겨울철 해를 고스란히 받는 곳은 눈이 녹고 응달이 진 곳은 녹지 않는데 바위 주위에 그 경계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 것은 아닐까?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선(禪)'바위로 불리는 이 바위는 무속 신앙이 깊어 오늘날 아이를 낳기 원하는 부인들이 찾아와서 기도하는 곳이기도 하다.(출처 : 다음 백과)
성벽이 남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벽 길이 구비구비 이어져 있네요..
영욕으로 얼룩 진 청와대도 보이고..
범바위입니다..
인왕산 정상으로 가는길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래 인왕산 명품바위의 옆모습..
인왕산 명품바위와 소나무..
멋진 소나무 아래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산객..
성곽 위에 올라가는 돌을 옥개석이라고 하네요..
인왕산 정상 스케치..
인왕산 정상인증..
기차바위로 진행합니다/ 뒤로 북한산의 멋진 모습은 오늘 보이지 않네요....
기차바위로 진행하면서 본모습으로 족두리봉에서 보현봉~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능선이 그림 같습니다(22.9.12 사진)..
기차바위 가는 길에도 해골바위가 있고..
인왕산과 뒤로 안산이 보이고..
인왕산..
기차바위로 이곳에서도 뒤쪽으로 북한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습니다..
산불의 흔적..
23,4,2일 인왕산 기차바위 인근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산불이 발생
축구장 22개 면적에 달하는 임야 16.2ha(헥타르)가 소실됐다고 합니다..
북악산으로 올라가는 성벽길이 보입니다..
방카인데 특이하게 생겼네요..
산불에도 살아남은 멋진 소나무들..
홍지문으로 내려가는 성벽은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것 같네요..
한북문인 홍지문입니다..
【홍지문】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기능적으로도 1413년 폐쇄된 숙정문 대신 실질적인 북대문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홍지문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 그 역할을 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 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재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m 2로 우진각 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출처 : 위키 백과)
연산군 유흥을 위해 지어졌다는 세검정입니다..
【세검정】
세검정은 세검정(洗劍亭)은 서울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던 정자로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재위 1494∼1506)의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도 전한다. 세검정이란 이름은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한 데서 세검(洗劍)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정자는 평면상 T자형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영조 24년(1748)에 고쳐지었으나 1941년에 불타 없어져서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검정은 2009년 2월 5일로 세검정 터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유는 멸실된 유적에 건물을 완전히 새로 복원한 경우는 '터'라는 한글 표현을 붙여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현재 명칭은 세검정 터이다. 세검정은 평화를 상징하는 정자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는 점 등에서 한국적인 건축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 : 위키 백과)
조선말 최고의 경선지로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별당인 석파랑입다..
석파랑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서예가로 일본에 건너가 추사 김정희의「세한도」를 찾아온 소전의 집념이 지어낸 건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집을 짓기 위해 30년 동안 전국 곳곳을 수소문해 목재와 기와 등을 모았다. 운현궁·선희궁·칠궁·이완용의 별장 등의 자재들이다. 덕수궁 돌담이 철거될 때는 트럭 30대 분을 옮겨오기도 했다. 그 자취들을 모아 1963년부터 6년에 걸쳐 건축했다.
건물은 ‘ㄱ’ 자 형의 구조에 맞배지붕을 가졌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역대 대통령들이 방문한 중식당 하림각으로 이동을 하여 삼선짜장과 탕수육으로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삼선짜장(1인 14,000원) &탕수육(소 3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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