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송년산행으로 영하 14도의 강추위 속에서 남한산을 올랐다. 남한산의 경우 매년 수 차례 다녀 온 산이지만 강추위 속에서 진행한 적은 별로 없어 의미가 있었다. 또한 통상 종주를 남문 ~ 동문 ~ 북문 ~ 서문 ~ 남문으로 진행하였으나 이번은 반대로 남문 ~ 서문 ~ 북문 ~ 동문 ~ 남문으로 진행하였다. 이 코스는 개인적으로 남한산을 처음 종주(’07. 4. 23 )했을 때 진행하고 11년 만에 진행하여 감회가 새로웠다. 코스를 진행하면서 쌕다른 느낌이 들어 좋았으며, 일부 구간은 외곽으로 돌아 보았다. 날씨는 추웠지만 조망이 시원하게 열려있어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었다.
북문에서 서문가는 길에 있는 연주봉 옹성의 아름다운 모습..
【남한산성 산행 2018. 12. 29일 토요일】인기 백대명산 제95위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으로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 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官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22) 한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官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남문 올라가는 길에서 물이 얼어 폭포처럼 보이네요..
남문입구에 도착하고..
남한산은 경사가 급하여 .겨울에 결빙되었던 부분이 봄되면서 녹으면서 성곽 여기저기가 무너지고, 여름 폭우에도 성곽이 무너질 수 있는 구조로 끊임없는 보수 소요가 발생하고 있다.
남문에서 수어장대 올라가는 구간은 보수를 하려고 준비를 했더군요..
남문에서 본 모습..
오늘 날씨는 금년의 최강 한파가 이어진 가운데 서울이 영하 12도로 상당히 추운 날씨였다. 병자호란이 발생(1636년 12월)할 당시에도 강추위가 몰아쳐 전쟁을 치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보면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성 안에서는 비록 큰 전투는 없었으나, 적의 포위 속에서 식량은 점점 떨어져 배가 고픈 가운데 오늘과 같은 혹한과 싸워야 했으니 당시 얼마나 힘들었나 하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운 겨울 풍경..
보수를 하기 위하여 철망을 설치해 두었네요..
청의 12만 대군에 포위되어 추위와 배고픔으로 약 50여일을 견디다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자등이 포로로 잡혀온 후 마침내 1637년 1월 30일 청의 압력에 굴복하여 삼전도(잠실 석촌호수 부근)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 치욕스런 '삼배고구두(三排九叩頭)'의 예를 행한 후 항복을 하였다.
잠실롯데타워와 멀리 남산도 보이네요..
뒤 돌아 본 모습으로 길이 너무 환상적이며, 멀리 검단산이 보이네요..
영춘정 앞에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들..
팔각정으로 되어 있는 영춘정..
수어장대에서 남문 가는 성곽 길..
수어장대에서 서문으로 나가는 제6암문(서암문)
보호수인 향나무..
현재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수어장대..
《장대》
장대는 전쟁시 장군의 지휘소로 남한산성에는 5개장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영조때 증축한 수어장대만 보존되어 있다.(수어장대는 최초 서장대로 단층이었으나 영조가 2층으로 증축하였다.)
수어장대 옆에 멋진 소나무가 있네요..
수어장대에 있는 소나무들도 기품이 있고..
성곽 안에 소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문입니다..
서문 밖에 있는 전망대로 가는 길..
바깥에서 본 서문의 모습..
전망대에서 본 모습(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연주봉 옹성가는 길..
연주봉 옹성에서 본 모습들..
연주봉 옹성에서 다시 제5암문으로 돌아 갑니다..
보석처럼 빛이 나네요..
도처에 멋진 소나무들이 있고..
북문에 도착하고..
성곽길이 마치 뱀이 푸른 숲으로 기어 가는 것 같습니다..
성곽 바깥으로 멋진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습니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멋진 성곽 길이 이어지고..
당겨 잡은 모습..
벌봉으로 갈 수 있는 제 3암봉의 모습..
《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로 대다수 규모가 작으나, 이곳 제3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이다.
보수가 필요한 부분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네요..
이곳은 11월달에도 보스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완전히 보수가 되었네요..
옹성출입문과 신지옹성이 돌출되어 있는 모습이 보이네요..
장경사 신지옹성입니다..
소나무들이 멋지게 도열하고 있네요..
정말 멋집니다..
장경사 절입니다..
누군가가 조망을 하고 있어 잡아 봤습니다..
행궁의 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송암정 방향으로 멋진 바위가 보이네요..
생과 사 입니다..
성곽의 웅장한 모습..
새로 깨끗하게 보수된 성곽이 때로는 생경하게 보입니다..
동문에 도착했습니다..
동문의 모습..
새로이 단장한 동문부근의 모습이 보기 좋네요..
장경사도 보이고..
동문과 장경사..
동문에서 남문가는 길에 언제 눈이 왔는 지 아직 잔설이 남아 있고..
산성 마을이 조망되고..
복원 중인 옹성치..
바깥으로 돕니다..
제2옹성 앞에도 복원중인 옹성치가 있고 , 멀리 검단산이 보입니다..
성곽 바깥쪽에서 본 제2옹성의 한 단면..
제2 옹성의 돌출부..
성곽 안의 소나무,,
다시 성 안쪽으로 들어 갑니다..
남문에서 수어장대 가는 길이 보인네요..
남문으로 보수를 위해 우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시 남문에 도착하여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합니다..
▶산행 후기
남한산성은 「칼의 노래」작가 김훈 선생의 작품에서 병자호란 당시 한겨울 고립무원의 남한산성내에서 벌어지는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 간의 말싸움과 '죽어서도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처절한 고뇌를 엿보게 해주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당시 사정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조선은 싸움다운 싸움을 할 수 도 없는 전력으로 청나라에서는 포위만 한 채 조선의 자중지란이 일어나도록 기다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결국 청의 뜻대로 이듬해 당시 임금인 인종이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남한산성은 한 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항전 전적지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치욕을 간직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의 상황과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을 비교해 보면서 걷다 보면 상황과 이에 대처하는 위정자들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작금의 우리나라 현실은 북한은 말로만 핵폐기한다고 하고 실질적인 조치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만 마음이 조급하여 북한에만 매달리다 보니 국민들에게 정말 절실한 경제는 뒷전으로 밀려 땜질 처방으로 일관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외적으로 미중무역전쟁으로 글로벌 경제가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고, 대내적으로는 시장이 감내할 수 없는 최저임금인상의 여파 등으로 국민들의 삶의 질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데 이 정부의 위정자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화자찬만 하고 있으니 걱정이다. 하루빨리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최선의 대책을 강구하기를 기대해 본다. 남한산성의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 성곽 길은 걷다보면 마치 우리네 삶의 한 단편처럼 느껴지는 곳으로 기회가 되면 조용히 사색하면서 걷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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