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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 3월초 단상(19. 3. 2)

by 산사랑 1 2019.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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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산행(2019. 3. 2일 토요일)】인기 백대명산 제95위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으로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 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官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22) 한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官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문 위에서 본 모습.. 


 

건강셀프등산회 제630차 산행은 남한산이 추진되어 미세먼지가 좋지 않음에도 2명이 함께 하였으며, 여유롭게 진행 하였다. 트레킹은 남문 주차장 ~ 남문 ~ 동문, 북문, 서문 ~ 남문으로 일주룰 하였으며, 약 4시간이 소요되었다. 미세먼지가 많아 시야가 다소 제한되었지만 봄기운이 서서히 밀려오는 가운데 제법 많은 산꾼들이 트레킹을 즐기고 있었으며, 서문쪽에는 막걸리를 파는 사람이 있어 조금은 좋지 않았다. 즐거운 트레킹을 할 수 있어 좋았으며, 다음 주는 남산 둘레길을 걸을 예정이니 많이 참석하여 봄기운이 움트는 소리도 들으면서 즐거운 추억을 공유하시길 기대해 봅니다..


조선시대 왕의 출입문인  남문.. ..


남문은 남한산성의 정문으로 4대문 중에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시대 임금들의 출입문으로 1,779년(정조 3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고 한다.


문 위에서 본 모습..


남문에서 동문까지는 약 1.7km로 여기에는 옹성이 3개가 있으며, 남문에서 약 15분쯤 (0.6km)가면 남한산성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제2옹성(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이 나오는데 이곳은 다른 옹성과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으로 현재 제2옹성 앞 쪽을 옹성치(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 중의 하나로 남한산성에 5개가 있다)를 돌출시켜 복원 중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문에서 수어장대 가는 길은 복원을 하려고 준비중입니다..


복원중인 옹성과 검단산이 희미하게 조망되고..


남장대터..






바깥쪽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복원 되었고 이곳이 포토 죤이라고 합니다..


보수 완료 된 동문입니다..



동문에서 북문까지는 2.9km로 성문간의 거리가 가장 길며 길도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해야 하므로 힘이 가장 많이 드는 구간이라 할 수 있으며, 가는 도중에 송암정, 장경사 신지옹성, 동장대지터, 돌탑 및 작은 군포지터 등이 있다.


동문..


멀리 행궁이 보여 당겨 보는데 미세먼지가 많아 희미합니다..


황진이가 심명한 불도를 설법하여 이에 감명 받은 기생 하나가 자괴하여 투신 자살한 지역인 송암정은 동문에서 약 5분 거리에 있으며, 커다란 바위에 生과死의 나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송암정에는 生과死의 나무가 보이네요.. 


소나무들이 멋지게 도열하고 있는 이런 성곽길을 거는 것 자체가 힐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송암정에서부터 장경사지옹성을 지나 오르막까지 보수가 완료된 모습..


소나무들이 멋지게 도열하고 있는 이런 성곽길을 거는 것 자체가 힐링이라 할 수 있겠지요..


문으로 들어가서 본 장경사 신지옹성..


올라가면서 내려다 본 장경사 신지옹성..



벌봉으로 갈 수 있는 제 3암문의 모습..  


성 바깥에 있는 멋진 소나무..



여기도 멋진 곳입니다..


문입니다..



보수를 위해 준비한 모습..


문입니다..


막걸리를 팔고 있네요..


진 소나무..


현재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수어장대..

《장대》

장대는 전쟁시 장군의 지휘소로 남한산성에는 5개장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영조때 증축한 수어장대만 보존되어 있다.(수어장대는 최초 서장대로 단층이었으나 영조가 2층으로 증축하였다)



수어장대에서 남문 가는 길에는 멋진 소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춘정..


남문가는 길의 멋진 소나무..


성곽 길이  마치 숲속으로 뱀이 기어가는 것 같네요.. 



정말 멋진 곳입니다..


종로에 도착하여 약 4시간이 소요된 산행을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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