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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20.11.3)

by 산사랑 1 2020.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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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숭례문 ~ 정동 구간 답사 후 종로 1가까지 걸으면서 보았던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등입니다..

 

경희궁 숭정전 전경..

【경희궁】

사적 제271호. 5대 궁 중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다. 인조, 효종, 철종 등 10여 명의 임금이 살았지만 기간이 짧았고 거의 빈 궁궐로 있었다. 원래 ‘경덕궁’이었는데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경희궁지〉에 경희궁의 규모와 배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둘레는 6,600자였으며 흥화문, 흥 -원문, 개양문, 숭의문, 무덕문의 5개 문을 두었다. 숭정전은 신하들의 조회를 받던 곳이며 뒤쪽에는 자정전은 임금이 업무를 보던 곳이었다. 1908년에 일제의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면서 조선왕조의 5대 궁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88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2002년 자정전과 숭정전, 숭정문 등을 복원하는 1차 복원공사를 마치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출처 : 다음 백과)

 

신하들의 조회를 받던 곳인 숭정전 들어가는 숭정문 / 아래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흥화문(興化門)은 조선시대 광해군 10년(1618)에 세운 경덕궁(현재 경희궁)의 정문이다. 1910년 일제가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고 몇몇 건물들을 매각하고 이건하였다. 현재 복원된 흥화문은 원래와 달리 남향으로 되었다.

 

신하들의 조하를 받던 숭정전으로 궁성의 서쪽에 위치했으며, 주위는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다

 

바위 아래에서 물이 나왔던 서암..

【서암】

서암은 원래 ‘왕암’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해 광해군이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숙종 때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사방석에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었다. 이후로 서암은 조선왕실의 관리를 지속적으로 받아오며 일종의 후원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지속적으로 훼손되다가 1990년도부터 정비가 시작되었고, 2000년도에 경희궁이 복원되며 경희궁의 권역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출처 : 다음 백과)

 

서암에서 내려다본 경희궁..

 

태령전 내의 영조 어진..

 

경희궁 내에 있는 보호수(느티나무 398년/2020년 기준)

 

경희궁 뜰의 단풍..

 

느티나무 구멍에서 본모습..

 

 

경희궁 관람 후에 서울역사박물관을 들렀는데 내부는 코로나 19 여파로 문을 닫아 야외전시되어 있는 것만 둘러보았다. 야외 전시품은 경성전차 중 2대 남은 전차 중 전차 381호가 있고 2007년 철거된 콘크리트 광화문의 건축 부재가 해체돼 전시돼 있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 청사 건축 부재의 일부와 2010년대 들어와서 철거된 아현고가, 홍제고가, 서대문 고가의 표지석 등이 전시돼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 경내에 있는 서울의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는 도시 역사박물관. 원래 이 자리에는 경희궁이 있었는데 이 궁이 해체된 이후, 1980년까지 서울고등학교가 있었다. 이후 서울시교육청 등이 들어서기를 반복하다가, 현재에 이른다. 현재의 박물관 부지는 서울고 대운동장 자리였다고 한다. 개관 전에는 '서울시립박물관'이었으며, 1993~1997년까지 4년간 공사에 들어간 후 유물 수집 절차 등을 거쳐 2002년 5월 21일에 현 명칭으로 출범/개관되었다.

 

역사박물관이기 때문에 광화문 앞 대한민국 역사박물관과 포지션과 전시물이 겹치기도 하나 이쪽은 이름답게 서울특별시에 한정한 도시 내 역사에 좀 더 집중한 느낌. 특히 근현대 도시생활상에 있어서는 이쪽이 가치가 근소하게 더 높다. 서울특별시에서는 2019년에 추가로 노원구 구 서울북부지방법원 부지에 서울생활사박물관을 개설하였다. 서울생활사박물관은 해방 이후 서울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집중한 전시물로 서울역사박물관을 보완 중이다. (출처 : 나무워키)

 

고려시대의 5층석탑

 

11월의 장미..

 

서울역사박물관 야외 전시되어 있는 381호 전차는 서울시를 약 38년 운행한 전차..

 

1972년 지하철 공사 도중 발견된 조선 전기 종로 네거리에 세워졌던 종루(보신각) 주춧돌..

 

선총독부 청사 철거부지..

 

조선총독부 건물은 1916 ~ 1926년 완공한 건물이었으나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1995 ~ 1996년에 철거를 완료하였다. 현재 전시된 유물은 1998년 독립기념관에 보관 중이던 조선총독부 건축부재중 장식 기둥과 주두의 일부이다.

 

 

 

복청교의 원 이름은 혜정교로 태종 12년 1412 석교로1412 1926년 도로를 개수하면서 교체 /

소의교는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합류하는 만초천 다리 중 하나

 

화문 콘크리트 구조 부재

 

광화문은 1935년 태조 4년 경복궁 정문으로 세워진 후 몇 차례의 소실과 이동을 겪어 석축만 남았다가 1968년에 이르러 석축을 수리한 다음 문루는 콘크리트로 복원하여 2006년까지 경복궁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광화문의 콘크리트 구조 부재는 2007년 해체된 콘크리트 문루의 부재 일부를 보존 처리하여 전시한 것이다.

 

여장과 우물천장..

 

추녀와 선자연..

 

주심포..

 

귀포..

 

간포..

 

서울역사박물관 외부를 구경한 후 종로 1가까지 이동하여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그런데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식당은 우리가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마무리할 때까지 들어온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시장상인들의 고충을 실감할 수 있었다.

 

 

 

충무공 동상 뒤로 청와대와 북악산이 보이고..

 

아일보 무지개 빌딩....

 

 

 

청계천의 시작 모전/ 이중 폭포....

【모전교】

남산 서쪽 기슭에서 발원해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창동천 위에 있던 다리를 무교(武橋) 또는 모전교(毛廛橋)라 불렀다. 다리 앞에는 조선 시대 무기와 군수물자를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군기시가 있었는데 오늘날 중구 태평로 1가 서울신문사와 시청 일대에 해당한다. 무교동(武橋洞)이라는 지명도 이 다리에서 유래했다.

 

무교는 때로는 역적을 처단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고종실록》에는 본래 사형은 서소문 밖에서만 거행했는데 급히 처형해야 할 죄인이 있으면 무교에서 집행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형수들을 무교 다리 앞에 모두 모아놓고 참수한 적도 있었다고 하니 사뭇 살벌했던 다리임은 분명하다.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종로구 서린동 11번지와 중구 무교동 14번지 사이 청계천 무교동길에 다리를 만들고 옛 이름을 따서 모전교라고 하였다. 폭 23m, 길이 19.5m로 대림산업(주)과 삼성건설(주)에 의해 2005년 9월 30일 준공되었다. (출처 : 다음 백과)

 

대화된 피맛골은 예전의 멋이 사라져 아쉬웠다,,

 

조선시대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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