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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세계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경주양동마을, 독락당, 옥산서원(10. 9. 2)

by 산사랑 1 2010.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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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양동마을이 안동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소식에 출장길에 들러 보았습니다.

양동마을은 이언적 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로

독락당, 옥산서원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므로

양동마을 방문시에는 독락당과 옥산서원도 들러 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양동마을 세계문화유산 등재】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이 2010년 7월 31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의안에서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은 주거 건축물과, 정자, 정사(精舍 : 학문과 휴식의 공간), 서원 등의 전통 건축물들의 조화와 그 배치 방법 및 전통적 주거문화가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와 독특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지속되고 있는 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우리나라는 총 10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지난 1995년 석굴암·불국사와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가 세계유산으로 첫 동시 등재된 후 1997년 창덕궁과 수원화성, 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와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2007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 2009년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양동마을】

 

양동마을은 씨족마을로 사돈 관계에 있는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 가문이 거주하여 오면서 대외적으로는 서로 협력하고, 내부적으로는 서로 대립과 경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유교가 근간인 조선사회에서 가문은 지켜야 할 절대가치 중의 하나로, 두 가문의 이러한 경쟁의식은 마을 내에 세워진 건축물들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하였고, 오늘날 전통마을 중에 가장 수준 높은 건물들을 보유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양동마을에는 무첨당(보물411호) 향단(보물412호) 관가정(보물442호) 손소선생영정(보물 1216호)등 4개의 국가지정 보물과 12개의 중요 민속자료가 있어 하나의 살아있는 건축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양동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민속마을로 경주시 중심시가지에서 동북부인 포항 쪽으로 약 16㎞ 떨어진 형산강 중류지점에 있으며,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이 마을을 서남방향으로 휘둘러 안고 흐르는 형상이다. 마을 서쪽에는 마을의 부를 상징하는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동쪽에는 비교적 큰 한계저수지가 있다. 안동하회마을과 함께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1984년 12월 24일에 월성양동마을이란 명칭으로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면서 경주양동마을이 되었다.

 

양동마을은 조선 오백년의 양반문화와 현대문화가 함께하는 지역으로 8·15해방 직후까지도 양반집마다 한집에 평균 한집 반씩 노비집이 딸려 있어 가랍집· 하배집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모두 밭이 되었다. 마을주민들에게는 아직도 유교사상이 짙게 남아 있어 매년 4, 10월에 선조를 제향하는 의식을 마을 공동으로 거행하고 있다. 마을의 가옥은 ㅁ자형이 기본형이며, 정자는 ㄱ자형, 서당은 一자형을 보이고 있다. 주택의 규모는 대체로 50평 내외이고, 방은 10개 내외이다.

 

 

 

손종로 정충비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향단

  【향단 (香檀) 보물 제412호】

향단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이 병든 모친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자 중종이 그를 경상감사로 임명하면서 모친의 병간호를 하도록 지어준 집이다. 이언적은 1540년에 이 집을 지어,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 노모를 모시고 집안을 꾸려 형의 출사를 도운 동생 이언괄에게 선물하였다고 한다. 향단은 원래 99칸이었으나 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현재 51칸만 남아있다.

 

향단 가는 길에 있는 초가..

 향단 뒷문에서 나오면 있는 집

 향단에서 본 반대편 가옥들 1

향단에서 본 반대편 가옥들 2 

 향단에서 본 반대편 가옥들 3

향단(香檀) 뒤편에서 찍은 모습1

향단(香檀) 뒤편에서 찍은 모습2

 

 

 

 

 전형적인 예전 시골 초가집..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네요.. 

 

 수졸당..

 

 수졸당 뒤편으로 올라가면 그네가 있고요..

 

 

 

 

 

 초가 앞에 빨래가 널려있는 모습이 정겹네요..

 

 【서백당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양동마을을 관람 하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가봐야 할 곳은 안골에 있는 서백당이다. 서백당은 양동 마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건물이며, 양동마을의 모든 건물의 시작점으로 양민공 손소 선생이 지은 건물로 월성 손씨의 종택이다. 손소의 아들 우제 손중돈 선생과 외손자 회재 이언적 선생 두분 모두 이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서백당에는 3명의 인물이 태어나는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중 2명은 손중돈 선생과 이언적 선생이고 한명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외손자인 회재 선생이 태어난 후부터 시집간 딸이 서백당의 산실에서는 마지막 인물은 손씨 가문에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몸을 푸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심수정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동생인 농재 이언괄 공을 추모하여 1560년에 지은 정자로

여주이씨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보기 위하여 건물을 ㄱ 자로 꺽고 그 자리에 누마루를 지었다고 함.

 【심수정(心水亭) 중요민속자료 제81호】

심수정은 수령이 수백년은 됨직한 회화나무 네그루가 정자를 둘러싸고 있다. "물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겠다" 는 뜻으로조선 명종 15년(1560년) 이언괄의 아들 이응기나 손자 이의주가 처음 지은것으로 추정되며 철종 때 화재로 소실된것을 1017년에 중건했다고 한다.

 

심수정 마당의 향나무가 멋지더군요.. 

 심수정 정자에서 본 모습..

 

 전통한지 뜨기 공예체험장..

 

 우측이 향단

 

 

 관가정

 

 【관가정 (觀稼亭) 보물 제442호】

조선 중종 때 관리이며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우재 손중돈의 옛집이다. 관가정은 손중돈이 원래의 종가인 서백당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 분가하여 지은 집으로 서백당이 세워진 1458년 보다 한 세대 뒤인 148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손중돈은 차남이었지만 맏형이 결혼 후 마을을 떠남으로서 장손의 역활을 해야했다. 손중돈이 관가정으로 분가한 후 관가정은 손씨 대종가로서 역활이 시작되었고  그 후 400여년 동안 손씨종택이었다. 지난 20세기 초에 원래의 서백당으로 대종가는 옮겨가고 관가정은 손씨 일가의 별장으로 쓰였으나 현재에는 빈채로 관리하고 있다.


 

 

 

 

 

 

양동마을은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으로 출장중 잠시 시간을 내어 양동마을을 찾았으며, 잠시 둘러 보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들어 갔으나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볼 곳도 너무 많아 결국 다 보지 못하고 일부분은 나중을 기약하고 이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양동마을을 떠나 포항에서 물회로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안강 출장지로 가는 길의 플랑카드에 양동마을, 독락당, 옥산서원이 세계문화유적으로 등록되었다는 것을 보고 회의시간이 잠시 남아 독락당과 옥산서원을 찾아 갔다.

 

 독락당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로 일명 옥산정사라고도 하며,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다. 독락당 뒤쪽의 시내에 있는 정자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독락당 들어가는 문

 

 

 

독락당을 들러본 후 700m 떨어진 옥산서원을 들렀습니다.

 

 옥산서원..

 

【옥산서원】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옥산서원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것이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문루,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최초 이산해의 글씨였으나, 불탄 후 1839년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가 다시 썼다)

 

 

 

 

 

 

 

 

 

 

 Only Yesterday / Isla Grant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