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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충청)

천주교 배론성지(20.6.6)

by 산사랑 1 2020.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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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원주 감악산 산행 후 귀경길에 미륵불과 탁사정을 둘러 본 후 마지막으로 들렀던 천주교 배론성지..

 

【배론성지】

제천, 원주 간의 국도변에 위치한 배론성지(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 소재)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 교회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은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이다. 배론성지는 지리적으로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산악지대로 외부와 차단된 산골이면서도 산길로 10리만 가면 박달재 마루턱에 오르고, 이어 충주, 청주를 거쳐 전라도와 통하고, 제천에서 죽령을 넘으면 경상도와 통하며 원주를 거쳐서 강원도와도 통할 수 있는 교통의 길목으로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재한 산골짝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이기 때문에 유래한 것으로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徘論)이라고도 한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

 

배론성지 입구..

 

* 배론성지의 유래와 걸어온 길 *

 

조선시대의 행정지명으로 제천현 근우면 팔송정리 도점촌으로 옹기를 굽던 곳이다. 배론에 천주교 신자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791년에(정조 15) 일어난 신해박해 이후로 추정되는데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숨어든 교우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 상황과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을 요청하는 백서를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하여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순교했다.

 

황사영이 순교하고 관련된 신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배론 교우촌도 파괴된 후 배론에 교우촌이 다시 형성된 것은 1840년대였다, 1855년에는 배론 공소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교장 푸르티에 신부, 교사 프티 니콜라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고, 1861년 최양업 신부가 문경(聞慶)에서 병사하자 푸르티에 신부 일행이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다. '성요셉 신학당'은 한문이나 한글뿐 아니라 수사학·철학·신학 등도 가르쳤으며 한국 천주교 교육의 요람이 되었으나, 1866년 병인박해 때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 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폐쇄되었다.

 

또한 1861년 별세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한 지역인 동시에 1866년 병인박해의 순교자인 남종삼의 생가가 있는 지역(산 넘어 묘재)이다. 배론성지는 1911년 경성교구에 속해 있다가 1968년 원주교구에 속하였으며 1970년대 들어 개발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이곳에는 신학당 터와 최양업 신부 묘소, 박해시대의 옹기굴 흔적 등이 남아 있다. 1932년 몇몇 사제들이 매입하여 보존해오다가, 1977년 원주교구에서 성지개발위원회를 구성하여 개발을 시작했다. 양기섭 신부에 의해 '성요셉 신학당'이 복원되고 각종 기념물이 세워져 순례지로 되살아나고 있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

 

 

 

배론성지는 잘 가꾸어져 있었으며, 초여름인데도 마치 가을 단풍철인 것 같네요..

 

단풍이 곱게 들어 있고..

 

 

 

무명 순교자의 묘..

 

 

 

1855년에는 배론 공소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진 곳(?)

 

굴뚝이 조금은 특이하네요..

 

배론 공소회장 장주기(張周基)..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 교장 푸르티에 신부(좌), 교사 프티 니콜라 신부(우)

 

'성요셉 신학당'은 한문이나 한글뿐 아니라 수사학·철학·신학 등도 가르쳤으며 한국 천주교 교육의 요람이 되었으나, 1866년 병인박해 때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 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폐쇄되었다.

 

 

황사영이 8개월 동안 토굴에 은신하여 백서를 작성하던 곳..

 

황사영 백서는 황사영이 1801년 8개월간 제천 배론의 토굴에 은신해 있으면서 작성하였다. 내용에는 조선 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설명하고, 특히 신유박해 동안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술하였다. 이어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위한 방안을 적었다. 원본은 1801년 9월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압수되었다가, 1894년 교회에 입수되었다. 그 후 1925년 조선 교구장 뮈텔(Mutel)[민덕효(閔德孝)]이 원본을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하여,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황사영(黃嗣永)[1775~1801]은 1790년(정조 14) 사마시에 입격(入格)하여 진사가 되었다.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운 뒤 1790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후 전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1795년(정조 19) 주문모 신부를 만난 뒤 더욱 활동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여주와 원주를 거쳐 제천 배론에 피신하여 조선 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책을 작성하였다. 이문건을 북경에 보내려고 하였으나 9월 29일 체포되었다. 그 뒤 서울로 압송된 뒤, 11월 5일 사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옹기 굽는 토기..

 

 

순교자들의 집..

 

 

 

이곳은 납골당 인것 같고 아직 자리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 최양업 신부(2002년 동상 제막)..

 

최양업(崔良業)[1821~1861]은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인 모방(Maubant)에 의해 김대건(金大建)·최방제(崔方濟)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에서 공부하였고, 1844년(헌종 10) 김대건과 함께 부제(副祭)가 되었다. 사제 서품을 먼저 받고 페리올 주교와 함께 김대건 신부가 귀국한 이후 최양업은 여러 차례 귀국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849년(헌종 15) 상하이에서 마레스카(F. Maresca)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출국한 지 13년 만인 1849년 말에 귀국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충청도 진천의 배티를 사목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전국에 걸쳐 있는 100여 개의 공소를 방문하면서 전교 활동에 힘썼다. 1861년(철종 12) 영남 지방의 전교 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문경에서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말 베르뇌(S. F. Berneux) 주교의 집전으로 제천 배론으로 이장, 안장되었으며, 김대건 신부가 ‘피의 순교자’였던 것과 비교하여 최양업 신부는 ‘땀의 순교자’라고 일컬어졌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96년도에 세워진 최양업신부기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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