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2020. 8. 1일 토요일)】
경기도의 수부(首部) 도시 수원은 조선 제22대 정조 대왕이 생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향한 효심과 웅대한 개혁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세운 계획된 신도시로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왕세자의 산소)을 경기 양주 배봉산에서 지금의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조선시대 최고 성곽 기술이 녹아 있다. 도심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997년 등재)인 화성(華城. 사적 제3호)이 팔달산을 중심으로 5.7㎞ (면적 37만1145㎡/약 11만 2400평)에 걸쳐 펼쳐져 있는데, 정약용 등 당대 최고 지식인들과의 협업 속에서 완성한 것이다.
화성은 화기 공격과 방어에 대처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는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과학적인 설계로 축성된 성곽이다. 성의 부속 건물들 또한 모두 다르게 지어져 있는데, 다양한 건물군의 동시적인 건축물은 전 세계에서 화성이 유일하다고 한다.
수원 화성(사적 3호)은 정조의 애민하는 마음과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법을 살펴볼 수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성곽으로 꼽힌다. 아름다운 주변 풍광뿐만 아니라 역사성과 과학성, 축성에 대한 이야기가 그 매력을 더해준다.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지점에 행궁을 포함한 새 도시를 건설하는 일인 한편 부친의 넋을 달래려는 효심이 깃든 대역사(大役事)였던 것. 정조 18년(1794년)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해발 143m의 수원 팔달산을 중심으로 성을 쌓기 시작한 지 2년 8개월 뒤 총길이 5,700m의 성이 완성됐다. 당초 10년은 걸릴 것으로 생각이 들었던 것이 28개월 만에 완성하게 된 것 중의 하나가 거중기(擧重機)로, 거중기는 40근(24kg)의 힘으로 625배나 되는 2만 5000근(15,000kg)의 돌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실사구시의 과학정신이 화성 축조에 응용된 것. 화성의 동서남북으로는 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이라는 큰 문을 만들었고 그 사이사이에 5개의 암문, 2개의 수문도 두었다. 그 밖에 적대, 공심돈, 봉돈, 장대, 각루, 포루도 만들어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화성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만들어진 도시 성곽으로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성곽을 따라 걷는 동안 조선시대 아름다운 건축미에 흠뻑 빠져들고 건강도 다질 수 있어 화성의 매력을 더해준다.
화성은 약 200여 년 동안 성곽과 시설물 일부가 무너졌다. 특히 6·25전쟁으로 크게 소실됐다가 1975년 보수·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화성의 사대문 중 팔달문은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성문만 남아 있다. 장안문은 1920년대 수원시 시가지 계획사업으로 문 좌우의 성벽이 헐리고, 1950년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누각이 소실됐다. 1978년 문루는 원래대로 복원됐다.
현재 수원 화성의 70~80%는 현대에 복원된 구조물로 이렇게 새로 복원된 건축물이 세계문화유산에 당당히 선정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래 세계문화유산 중 기록유산으로 '화성성역의궤'가 선정이 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이 얼마나 치밀하고 완벽했는지, 그 의궤에 따라 복원된 수원화성도 덩달아 인정을 받아 선정이 되었다고 한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돌 무게가 얼마고, 어떤 목재를 사용했고, 심지어 공사비로 얼마를 지출했는지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설계와 시공 부분은 그림과 해설을 따로 붙여 놓아 '화성성역의궤'만 있으면 화성은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다. 이는 화성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과학적이라는 반증이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도 당시 소견에서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한 과학적 특징을 골고루 갖춘 근대 초기 군사 건축물의 모범"이라며 "성곽은 이제 겨우 200년에 지나지 않지만 제각각 지닌 예술적 가치를 감안할 때 마땅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려야 한다."라고 극찬했다.
서장대와 화서문 중간에는 정조대왕의 동상이 서있고 그 아래쪽에는 최근 복원한 화성행궁이 있다. 행궁은 임금이 지방 행차 시 머물던 별궁으로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으로 행차할 때 이곳을 자주 임시거처로 삼았다고 한다. 이는 봉수당, 장락당을 비롯한 총 576칸 규모의 거대한 행궁이다.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모친인 경의왕후(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 경로잔치를 여는 등 백성에게 효를 실천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었다.
장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인 봉수당에서는 정조대왕과 왕비가 경의왕후에게 회갑연을 베풀어드리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화성행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신풍루 앞에서는 관람객을 위한 다양한 행사가 펼쳐져 볼거리를 제공한다. 3월부터 11월까지 매주 일요일(오후 2~3시)에는 정조 17년(1793년)에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금위조직인 장용영(壯勇營) 수위식이 열린다.
화성을 돌아보는 동안 최소한 세 번은 반하게 된다. 처음에는 보호와 방어라는 성곽의 1차적 용도를 뛰어넘은 우리나라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흠뻑 매료되고, 그다음에는 한 임금의 부모 공경에 감탄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성곽 트레킹으로 자신의 건강을 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매력이다. 또한 웅장함과 화려함, 실용성을 두루 갖춘 화성의 야경 역시 일품으로 다가온다.
(출처 :파이넨션 뉴스 등을 중심으로 재편집)
유려한 곡선의 화성과 아름다운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수원 최고의 전망대인 서장대..
▶19:55 트레킹 시작(약 3시간 트레킹)
건강셀프등산회 제710차 산행은 수원화성 달빛 트레킹이 추진되어 정조의 자취가 남아있는 노송지대와 행궁을 돌아본 후 팔달문에서 트레킹을 시작하였다. 수원화성 성곽일주는 팔달문 ~ 서장대 ~ 화서문 ~ 장안문 ~ 동장대 ~ 창룡문 ~ 팔달문으로 원점회귀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수원화성은 그동안 개인적으로 한 차례, 건셀에서 두 차례 총 세 차례를 다녀온 바 있으나 야간 트레킹은 이번이 처음으로 기대가 되었다.
화성 성곽일주추진(파란색)
행궁에서 팔달문으로 가는 길에서 본 용 모습..
성곽을 올라가는 매표소를 지나 처음 맞이하는 것은 남치와 남포루이며, 그곳을 지나면 서남암문이 나온다. 서남암문을 통과하여 안쪽으로 들어가면 서남각루(화양루)가 나오며, 비록 달빛은 없었지만 조명 불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화양루는 아주 멋있었다. 각루는 주변을 감시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으로 화성에는 총 4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막걸리 한잔을 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곳에서 약 20분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서남 암문을 지나 서포루로 진행하였다.
팔달문을 지나 성곽으로 올라가는 매표소에서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됩니다..
남치(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는 꿩을 의미하며, 꿩이 자기 몸을 잘 숨기는 모양을 닮았다 하여 "치"란 단어를 붙인 이 곳은 성곽 바깥쪽으로 돌출되어 있어 병사들이 외벽을 감시하기가 수월했는데 그 이전의 성들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시설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남포루(포루(砲樓)는화포를 쏠 수 있는 곳으로 화성에는 5개 포루가 있다)..
서남암문..
【서남암문 西南暗門】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이 문은 용도(甬道: 담을 양쪽으로 쌓아 만든 길)의 출입문이기도 하다.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으로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5개의 암문 중에서 유일하게 포사(舖舍)를 만들어 침입을 대비했다. 1796년(정조 20) 8월 6일 홍예가 완성되었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거쳐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이다. 포사(舖舍)는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위급 신호를 전달하였다(출처 : 나무워키)
이곳을 지나 용도(甬道: 담을 양쪽으로 쌓아 만든 길)를 따라 서남각루로 갑니다..
서남각루가 있는 이곳은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지역으로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서남암문에 용도(甬道: 담을 양쪽으로 쌓아 만든 길)를 내어 그 끝에 각루를 세웠다고 한다. 각루는 주변을 감시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으로 화성에는 총 4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화양루(서남각루)..
서남각루의 아름다운 모습..
3,1 독립운동기념탑..
서남암문..
성곽길에 황금색 불빛이 길을 밝히네요..
서포루..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수원 화성의 70~80%는 현대에 복원된 구조물로 이렇게 새로 복원된 건축물이 세계문화유산에 당당히 선정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래 세계문화유산 중 기록유산으로'화성성역의궤'가 선정이 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이 얼마나 치밀하고 완벽했는지, 그 의궤에 따라 복원된 수원화성도 덩달아 인정을 받아 선정이 되었다고 한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돌 무게가 얼마고, 어떤 목재를 사용했고, 심지어 공사비로 얼마를 지출했는지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설계와 시공 부분은 그림과 해설을 따로 붙여 놓아 '화성성역의궤'만 있으면 화성은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다. 이는 화성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과학적이라는 반증이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도 당시 소견에서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한 과학적 특징을 골고루 갖춘 근대 초기 군사 건축물의 모범"이라며 "성곽은 이제 겨우 200년에 지나지 않지만 제각각 지닌 예술적 가치를 감안할 때 마땅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려야 한다."라고 극찬했다.
효원의 종(모든 이에게 효성심을 심어주고, 나라의 평안과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수원시민의 염원을 담아 만든 종)
유려한 곡선의 화성과 아름다운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수원 최고의 전망대인 서장대가 보입니다..
수원 화성행궁 뒤편 팔달산 정상에 우뚝 솟은 서장대(화성 장대)는 화성의 남서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장대는 동장대와 함께 장수가 성의 안과 밖은 물론 인근 지역까지 살피며 지휘하던 곳으로 화성을 축성한 정조대왕이 다섯 번을 오르며 화성장대라는 편액을 직접 썼다고 한다. 현재의 서장대는 2006년 방화로 불탄 것을 복원했으며, ‘화성장대’의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 있는 고궁박물관 편액을 모각해 달았다.
서장대와 서노대..
화성 행궁과 수원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2013년에 서장대에서 본 화성 행궁의 모습..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한 시설로 서장대에 있는 서노대로 노대는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노대 두 군데가 있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립니다..
서포루와 서장대 사이에 있는 서이치..
서북각루와 서장대 사이에 있는 서포루..
포루(砲樓)는
서북각루(각루는 주변을 감시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으로 화성에는 총 4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4대 문 중의 하나인 화서문..
벽돌로 쌓은 반원형 옹성이 문을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수원 서북 공심돈..
공심돈은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의 일종..
정면에서 본 화서문..
화서문에서 장안문 가는 성곽길은 현재 보수 중이더군요..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
대부분의 성은 남문을 정문으로 쓰는데 화성만 북문인 장안문을 정문으로 쓴다. 그 이유는 정조가 서울에서 출발해 가장 먼저 성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장안문이었기 때문이다. 장안이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북동포루에 설치되어 있는 화포(홍이포)..
화성의 성곽도 남한산성의 성곽같이 곡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데도 기구가 떠 있는데 이 기구는 일정 시간 간격으로 하늘로 올라가고 끈이 달려 있어 수직으로만 올라갈 뿐 비행은 없습니다..
북동포루와 동부각루(빙화수류정), 동북포루 등이 보입니다..
지나 온 장안문..
수원천의 북쪽에 세운 북수문(화홍문)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지니고 있다..
수원 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이 여름에 자주 범람하자 성곽을 신축하면서 준설하고 남북에 각각 수문을 만들었다. '화(華)'는 화성, '홍(虹)'은 무지개의 의미다.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은 '수원팔경'에 꼽힌다.
동부각루(방화수류정)..
'방화 수류'는 꽃을 찾아 버들을 따라 앞 내를 건넜다는 뜻이다. 방화수류정에서 보는 풍경은 화성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꼽힌다. 방화수류정은 전시에는 망루, 평시에는 정자의 기능을 했다.
성곽을 따라 불을 밝혀놓은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불빛 받은 성곽이 마치 황금띠를 두르고 있는 것 같네요..
동북포루..
군사를 지휘하던 동장대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패스합니다..
연무대(동장대, 東將臺)는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과 북쪽 수문인 '화홍문(華虹門) 사이의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방이 트여 있어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펴보기에 좋은 군사요충지이다. 1796년에 수원화성이 완공된 뒤, 연무대는 병사들의 훈련장이었다. 칼과 창, 활을 다루는 공간으로 200년이 넘은 소문난 활터이다. 또한 연무대는 사직공원(社稷公園)의 황학정(黃鶴亭), 남산의 석호정(石虎亭), 전주의 천양정(穿楊亭)과 더불어 유서 깊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 Daum백과]
동북 공심돈..
수원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 중의 하나로 중국 요동 지방에 있는 평돈을 모방하여 벽돌로 동그랗게 돈대를 쌓아 만들었다..
지나 온 동장대와 동북포루..
4대 문 중의 하나인 창룡문
창룡은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으로 동문을 뜻한다..
창룡문 정면..
창룡문은 화성의 동문으로 규모와 형식이 화서문과 비슷하다. 주목할 것은 성문 왼쪽 벽에 있는 실명판이다. 화강석 벽을 다듬어서 글씨를 새겼는데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팔달문, 화서문, 장안문의 실명판이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데 반해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수원제일교회로
봉돈(봉수대로 성벽에 총안을 두어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계속 진행하면서 다른 각도에서 본 수원제일교회..
팔달문(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을 의미)으로 화성 4대 문 중의 남문(보물 402호)..
팔달문은 4개 성문 가운데 남문으로 화강암으로 된 석축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여장을 돌린 다음 2층 누각을 세웠다. 누각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에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다. 아래층과 위층의 공포는 다포식이며, 쇠서의 끝이 강하게 위로 솟아 있고 끝이 장식화되어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성문의 좌우에는 적대를 설치하여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성문은 북문인 장안문과 형태가 같으며, 규모와 건축수법 등이 서울의 숭례문과 비슷하다. 화성의 성문은 조선시대 성문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이며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팔달문 시장과 팔달문..
측면에서 본 팔달문..
정면에서 본 팔달문..
수원화성 달빛트레킹이 되려면 달빛이 있어야 되는데 이날은 비가 올 확률 70%여서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은은한 불빛 속에 드러나는 수원 화성의 아름다운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수원 화성은 당대 과학의 결정체요 멋진 경치까지 아우르는 소중한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장안문을 지나면서 많은 비가 내려 빨리 진행할 수밖에 없어 방화수류, 동장대 등의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지나온 점이 조금 아쉬웠지만 대체로 만족할 만한 트레킹이었다. 기회가 되면 달빛이 은은하게 비칠 때 다시 찾아봐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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