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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세계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인 독락당과 옥산서원(21.11.03) 탐방

by 산사랑 1 2021.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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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2박 3일 첫째 날 두번째 여정으로 세계문화유산인 독락당과 옥산서원을 들렀다. 독락당괴 옥산서원은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직전에 들렀던 곳으로 다시 방문하여 감회가 새로웠다.

 

옥산서원은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아홉 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옥산서원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다음 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다. 구인당의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扁額)은 원래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1839년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썼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문루,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이다.(출처 : 다음백과를 중심으로 재편집)

 

 

독락당은 회재 선생이 벼슬에서 내려와 7년간 기거한 고택으로 1516년 세웠으니 500년 세월을 헤아린다.

독락당은 경주 양동마을이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때 포함됐다. 

독락당

독락당(獨樂堂)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로, 여주 이씨 구암공파(求菴公派) 파종택(派宗宅)이며 파조는 이전인(李全仁)이다. 조선 중종 11년(1516년)에 건립되었다. 1964년 11월 1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었다. 2010년 양동마을의 일부 구성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로 일명 옥산정사라고도 하며,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다. 독락당 뒤쪽의 시내에 있는 정자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출처 : 위키백과를 중심으로 재작성)

 

경청재(敬淸齋)는 독락당 살림집은 1601년(선조34) 회재  이언적의 손자들이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유지하기 위해 지은 집..

경청재

본 고택(古宅)은 1601년(선조 34년) 3월 12일 회재 이언적 선생의 손자 휘(諱), 준(浚)과 순(淳). 두 형제가 옥산별업 (王山別業)을 봉수(奉守)하기 위해 화의문(和議文)을 작성하면서 세운 집이다. 선생은 1538 년(중종 33년) 3월에 청백리(淸白吏)에 가자(加資)되었다. 청백은 공경지심 (恭敬之心)에서 나온다 하여 후손들이 본 집을 경청재(敬淸齋)라 이름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독락당은 옥산서정이라고도 한다..

어서각으로 집안에서 전해오는 중요한 전적들을 보관했다고 한다. 중요 유물로 , 이언적 수필고본 일괄(보물) 등이 있다.  

해동명적

해동명적(海東名蹟)은 조선 중종(中宗) 때의 서예가(書藝家)이며 문신(文臣)인 신공제(申公濟)(1469∼1536)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가 돌에 새겨 있는 것을 탁본하여 상하 2책으로 묶은 것이다. 상권에는 조선시대 문종(文宗)과 성종(成宗)의 어필을 앞에 따로 놓고 다음에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 김생(金生), 영업(靈業) 3인과 고려시대 탄연(坦然), 이암(李嵒), 신덕린(申德隣)등의 3인을 합한 6인의 글씨를 모아 놓았다. 하권에는 이강(李岡), 승려 혜근(慧勤), 성석린(成石隣), 박초(朴礎), 권근(權近), 이첨(李詹),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민자복(閔子復), 신색(申穡) 등 12인의 글씨가 실려 있다.

 

계정으로 계곡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계곡(옥산천)을 향하는 방향은 벽이 없는 넓은 마루를 두고 있다..

독락당에 있는 향나무..

 

 

독락당을 둘러본 후 700m 떨어진 옥산서원으로 이동합니다..

정문인 역락문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누각인 ‘무변루’가 보이고 무변루를 통해 들어가면 강당인 ‘구인당’과 양쪽으로 동재와 서재인 ‘민구재’ ‘암수재’가 위치하고 있다..

 

옥산서원 입구 역락문.

누각인 '무변루'를 통해 강당인 구인당으로 들어갑니다..

무변루..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옥산서원)에 유치원 아이들이 관람을 왔네요..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최초 이산해의 글씨였으나, 불탄 후 1839년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가 다시 썼다)

신도비각으로 1577년에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로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으며

건립 당시에는 이 서원 앞의 계곡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으려고 서원 안으로 옮겼다고 한다..

후손들이 현재 거주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