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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지역

개화산 들레길(22. 5. 7일)

by 산사랑 1 2022.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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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산

강서구 개화동에 있는 산으로서, 開火山,주룡산,開化山,봉화뚝이라고도 한다. 개화산의 원래 이름은 주룡산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신라 때에 主龍 선생이라는 한 도인이 이 산에 살면서 매년 9월 9일에는 동자 두 세 명과 더불어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구일용산음이라 하였으므로 주룡산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돌아간 후에 그 자리에는 이상한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개화산이라 일컬었다. 선생이 살던 곳에 언제부터인지(고려 때) 절이 생겼고 절 이름을 개화사라고 하였다. 개화사 절에는 약효가 좋다고 하는 약수 때문인지 조선 말기쯤에 절 이름이 약사사로 바뀌었다. 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사용했던 봉화대가 있었다. 또 산의 형상이 꽃피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산이라고 한다. 전라도 순천에서 오는 봉화를 받아 남산 제5봉수에 전하였다.

 

해맞이공원(정상)에서 바라보는 방화대교의 풍경과 무심히 흐르는 한강의 조화가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정상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약사사(藥師寺)가 있다. 약사사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겸재 정선의 자취를 볼 수 있는 사찰이다. 정선은 <양천팔경첩>과 <경교명승첩>을 통해 한강변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 화첩에 약사사가 나온다. 안으로 들어서면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3층 석탑이 보이고 대웅전 내부에는 돌부처를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족히 700년을 넘는 역사의 흔적이므로 둘 다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출처 : 서울지명사전을 중심으로 재편집)

 

개화산 정상..

산행추진 : 개화산역 ~ 하늘전망대 ~ 신선바위 ~ 아라뱃길 전망대 ~ 전망대 ~ 약사사 ~ 미타사 ~ 개화역

개화산은 숲길이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하늘전망대에서 본 6.2 지방선거에서 이전 문제로 이슈가 된 김포공항..

하늘이 잘 보인다고 하늘전망대가 아니라 김포공항 하늘길이 잘 보여서 하늘전망대다, 이곳 하늘전망대에서는 김포공항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 비행기 이착륙 활주로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게 이어지고 김포비행장 끝 지하철 기지와 맞은편에 우뚝 솟아있는 검단산 일대까지 서울과 김포, 그리고 인천의 삼각지대기도 하다,

 

검단산이 우뚝 서있고..

숲이 좋아 걷기가 정말 좋은 곳입니다..

개화산 정상의 이모저모..

운동시설도 있고, 예쁜 화단도 조성되어 있네요..

조계종 직속사찰인 약사사가 초파일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약사사

약사사는 서울시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암이다. 겸재(謙齋)도 감탄했던 절경, 개화산 약사사(藥師寺)조선 후기의 화가로 이름 높은 겸재(謙齋) 정선(鄭?, 1676~1759)은 개화사(開花寺)란 제목으로 개화산과 절 그리고 주변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바로 이 개화사가 지금의 약사사이다. 절의 창건은 삼한 시대 혹은 신라 시대로 전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창건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고려 시대의 유물인 석불과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도 법등이 이어져 왔음을 짐작해볼 따름이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는 별다른 역사를 찾아 볼 수 없다가 1737년(영조 13)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에 의해 크게 중수된 후 송씨 가문의 원찰이 되었다. 송인명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어려서 아주 가난했는데 개화사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공부를 하였고, 1736년에 좌의정에 오르자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절을 크게 고쳐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영조 때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병연(李秉淵)이 송인명에게 보낸 시를 통해 더욱 잘 알 수 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사천시초(?川詩抄)』

 

또한 이병연과 교류하고 있던 겸재 정선은 이 시를 보고 ‘개화사’라는 그림으로 절경을 남겼던 것이다. 이후 개화사는 약수암(藥水庵), 약수사(藥水寺), 약사사(藥師寺) 등으로 절의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절에서 솟아나는 약수와 법당에 모셔져 부처님과 매우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은 영험이 있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병이 치유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하여 향화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출처 ; 대한민국구석구석)

 

개화산(開花山) 약사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사찰이다. 도량 중앙에 삼층석탑(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9호)과

석불(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이 모셔져 있다,

친수공간 인공폭포..

개화산 전망대에서는 양화대교가 보입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선생은 이곳 양천 현감을 하였기에 서울과 개화산 주변의 그림들이 많이 있다..

세부적인 내용은 겸재정선미술관 편에서 다루겠다..

개화산 봉수대..

개화산 봉수대에서 250여 m 떨어진 곳에 1994년 11월에 설치한 봉수대 터 표지석으로 강서구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적임을 알리기 위해 이곳에 원형복원이 아닌 상징적 의미로 2013년 11월 개화산 봉수대 모형을 설치했다,

 

개화근린공원의 새와 꽃과 나무들..

정자도 있고..

군부대 교통호..

아라뱃길 전망대..

한강 김포(행주대교 아래)에서 정서진(영종대교)으로 이어지는 아라뱃길, 아라뱃길은 한강과 서해를 이어주는 뱃길로, 아라뱃길의 아라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후렴구인 아라리오에서 따온 말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야심 차게(?) 만든 것인데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 실패작인 것 같다..

 

이곳에서도 김포공항이 조망되고..

신선바위는 표지판 아래에 있는 절벽을 말한다..

거대한 바위가 절벽처럼 솟아 있다..

6.25 당시 김포 강화 전투에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호국충혼위령탑이 미타사 옆에 있다..

호국 충혼비는 6,25 전쟁 때 김포비행장을 지키든 육군1사단 12연대 전사자들 1,100여명의 영령을 추모하는 비다, 38선접경의 황해도 연백지역에서 서부전선을 지키든 1사단 병력은 김포공항 쪽으로 후퇴하여 이곳 개화산에 방어진을 치고 인민군 6사단과 전투에서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한 부대원 1,100명이 전사했다, 6,25전쟁때 조국을 지키다 죽어간 무명용사들의 애국충정을 기리며 1993년 충혼비를 세웠어며 매년 6월 위령제를 올린다,

미타사에도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연등이 걸리고..

미타사

미타사는 서울시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 서남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암이다. 서울의 서쪽 끝 김포평야와 행주나루 끝에 걸쳐 있는 미타사는 도심 속에 있는 사찰이면서도 평온함과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동산에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나무들과 앙증맞게 피어 있는 들꽃들, 하나같이 예쁘게만 보인다. 그러나 이곳은 한국전쟁 때 육군과 인민군이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격전지로 김포공항을 사수하던 육군 1000여 명이 전사했으며 그로 인해 절의 모든 당우들이 전소되는 비운을 맞이하기도 했다. 현재 미타사의 당우는 작은 법당과 요사가 전부인 단촐한 가람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아마도 100여 년 전 창건 당시의 모습과도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다. 다만 건물들이 현대식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미타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법당 옆 커다란 바위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미륵불입상이다. 절의 창건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이 불상은 무수한 일화를 남기고 있는데, 이야기 속에 이 미륵부처님은 하나 같이 땅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미륵경전에 의하면 미륵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가 열반에 든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나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니, 미륵부처님이 출현하였으니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을 듣기 위해 절을 창건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미타사에서 개화역으로 진행하여 전철을 타고 서울식물원으로 갑니다..

다음은 서울식물원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