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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여주 신륵사(23. 5. 27) 부처님 오신날

by 산사랑 1 20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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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 여주 보검산 ~ 마감산 산행전에 신륵사를 들렀다. 신륵사는 대부분 평지나 산에 위치한 여타 절들과는 달리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인근의 여주 도예단지에서는 여주 도자기 축제도 열리고 있었다. 

 

신록사 전경..

여주 신륵사(神勒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인 신륵사는 봉미산(鳳尾山) 끝자락, 1500여년의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고찰로서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선사 혜근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던 나웅선사가 잠시 머물다가 병사하여 다비식을 치렀다는 기록이 아직도 비석에 똑똑히 남아 있다. 한때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인근 영릉의 원찰로 삼아 보은사라고 불렸다고 한다.  한 때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그후 수차례 증수를 통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955년 용주사의 말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국가지정 8점, 도지정 7점 등 총 15점의 문화재가 있는데, 본사가 아닌 말사에 상당히 많은 문화재가 소재하고 있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미륵(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가 있다.

 

이 밖에도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신륵사가는 길에  연밭이 있고 도자기 축제도 열리고 있습니다..

여주 전통가마 소성기술 계승 발전 체험

봉미산 신륵사 일주문과 불이문으로 불이문이 상당히 크네요..

경내의 소나무..

신륵사 앞의 남한강에는 황포돛배가 다니고 있습니다..

세심정..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서 행사 후 식사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강월헌이라는 6각의 정자와 삼층석탑..

강월헌이라는 6각의 정자로 나옹선사를 추념하여 누각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삼층석탐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탑돌이를 하고 있네요..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이 전탑은 주재료가 벽돌이어서 옛 기록에는 ‘벽탑’이라 표현되었고, 동대 높은 곳에 위치한 탑이라 하여 ‘동대탑(東臺塔)’, 나옹의 사리가 봉안되었다 하여 ‘나옹탑(懶翁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건립시기는 화강암 기단, 벽돌 사이 백토를 바른 공간 처리, 벽돌의 무늬, 이색의 『목은집』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고려 말로 추정된다. (출처 : 중부일보)

 

신록사 대장각기비..

신륵사 대장각기비

1963년 보물 230로 지정되었다. 1383년(우왕 9) 건립. 높이 1.33m. 신륵사에는 원래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 말의 이색(李穡)과 승려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경률론(經律論) 삼장(三藏) 즉 대장경을 인출(印出)·수장하던 집이었고,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여러 가지를 기록한 석비이다. 『동국여지승람』권7 여주목불우조 (驪州牧佛宇條)에 신륵사의 다른 이름은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甓寺)라는 것과 나옹이 일진당(日眞堂)을 세우고 대장각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일부 발췌)

 

봉미산을 잠시 들러보는데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봉미산 산행을 한 후 다시 불이문을 통해 신륵사로 들어 왔으며, 구룡루(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입니다..

신륵사 창건설화에는 지금의 절터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하늘로 승천한 후에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소개되어 있다.(출처 : 중부일보) 

 

부처님 오신날에 다수의 사람들이 줄을서서 봉양(?)을 합니다..

보물225호인 다층석탑..

다층석탑

극락보전 앞에 있는 다층 석탑은 흰 대리석을 재료로 사용한 특이한 예로 조형감각이 뛰어난 매우 우아한 석탑이다. 현재 탑의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으나 탑 아래 부분에 새겨진 용과 구름 문양의 세부 조각은 우수한 기량이 돋보인다. 그리고 이 탑에 조각된 오조룡(五爪龍)은 임금의 높은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서, 각기 네 방향으로 머리를 향하고 있어 세종대왕 영릉의 능침사찰에 건립하는 석탑에 왕실을 상징하고 불교의 호법신장 역할을 하는 도상을 조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중부일보)

 

극락보전..

극락보전..

신륵사가 영릉의 능침사찰로 지정되었으므로 극락보전은 왕실의 안녕과 선왕의 명복을 비는 기능을 가진 전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일부 부재 및 양식에서 17세기의 양식이 확인되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정조 대의 모습을 근간으로 몇 차례 보수가 이루어진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중부일보) 

 

조사당(위 우측)과 범종, 관음전(아래)..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영정을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스님인 나옹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이다. 사방 단칸의 조촐한 규모이나 겹처마 팔작집에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는 등 최대한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출처 : 중부일보)

 

부처님 오신날 행사 중입니다..

 

보호수인 600년된 향나무(높이5m. 둘레1.3m, 지정연도 1982년. 지정번호 여주-65)..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앞쪽은 원구형석조승탑, 뒤쪽은 팔각원당형석조승탑)..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인동초..

초롱꽃..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신륵사 은행나무보호수.

수령600년, 높이22m. 둘레3.1m. 고유번호 여주-66. 지정연도 1982. 안내문에는 은행나무에 오신 관세음보살님 - 고려말 공민왕사 나옹스님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며 불법승 삼보를 상징하듯 세 줄기의 가지로서 모습을 갖추었고, 관세음보살님이 대자대비로써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발원으로 신륵사 은행나무에 나투신 것처럼 보인다. 고 소개하고 있다. 

 

은행나무 사이로 관음보살상이 보입니다..

원호(元豪·1533~1592)장군 임진전승비..

원호(元豪·1533~1592)장군 임진전승비, 징비록1권에 여주 구미포(龜尾浦)에서 왜적을 섬멸시켰으며 충주 여주 지평 양근의 백성들이 왜구의 칼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춘천의 왜적을 치러 갔다가 복병에 의해 피살당해 강원도에서는 왜적을 막아낼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여ㅈ 도자기축제 현장을 잠시 들러보는데 아직 시간이 일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토끼가 2마리 있는데 도망을 치지 않더군요

떡메도 처보고..

여주 신접리 지석묘 고인돌..

여주 신접리 지석묘. 향토유적 14호. 지석묘는 큰돌을 몇 개 둘러 세우고 그 위에 넓적한 돌을 덮어 놓는 선사시대의 무덤이다. 이 지석묘의 고임돌(굄돌)은 동서에 있으며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가로195cm, 세로185cm, 두께35cm이며 신접리에 있었으나 천송동297-20으로 옮긴 북방식(탁자식) 고인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