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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북알프스
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명성황후 생가(23. 5.27)

by 산사랑 1 2023.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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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비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능은 청량리에 있었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으로 함께 합장되었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1687)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담벼락에 예쁜 꽃이 피어 있고..

 

민가마을에서 막걸리 한잔하고  감고당 ~ 명성황후생가 ~ 기념관 순으로 관람을 하였습니다..

민가마을을 둘러보니 도자기가 유면해서 그런지 항아리를 예쁘게 꾸몄네요..

웃는 모습이 넘 좋네요..

양귀비와 장독대..

파전에 막걸리 한 잔을 합니다..

연자방아를 돌리고 있습니다..

소달구지(임성훈 씨가 불렀던 시골길의 소달구지 덜컹대던 길이 절로 생각납니다)..

명성황후 생가 소원바위에서 건강셀프등산회 산행 천 회를 무사히 달성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명성황후가 8살에서 왕후로 책봉될 때까지 살았던 감고당입니다..

감고당(感古堂)은  조선 후기에 건축된 건물로,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의 생가이자 숙종비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관리하면서 지키던 묘막이었다. 인현왕후가 친정을 배려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었다. 본래 한성부 안국방 37번지(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37번지)에 인현왕후가 자신의 친정에 특별히 내려 준 건물과 1687년(숙종 13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에 숙종의 장인이자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한 묘막이 각각 건립되었다.

 

그러나 안국동의 감고당은 후일 덕성여고가 설립되면서 현재의 여주 능현리로 일부 시설물이 옮겨졌고, 간판 역시 여주의 민유중 묘막에 옮겨졌다. 당시 건물로 현재 전하는 건물은 27평이며 나머지 건물은 해방 이후 복원되었다. 이후 민유중 가문의 종손들이 대대로 거주하면서 묘막을 지켰으며, 1851년 9월 고종의 비명성황후가 여기서 태어났다. 이후 민치록은 1858년에 사망했으나 민자영(명성황후의 어린 시절 이름)은 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어머니 한산 이씨와 감고당에서 계속 거주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고 6,25 전쟁 때 다시 파괴되었으나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복원공사가 시작,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5년에는 행랑채와 사랑채, 초당 등이 복원되었다.

 

감고당으로 전통 다도를 무료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감고당 입구...

한양도성 북악산길 걷고 보았던 감고당터(율곡로와 정독도서관 사이에 있는 종로구 덕성여고 자리)..

 

흰소가 있네요..

성질이 급한 단풍..

명성황후 생가로 들어갑니다..

명성황후 생가 안채와 사랑채(위), 명성황후가 어릴 때 공부하는 모습(아래)..

안채..

사랑채..

명성황후 영정..

인현왕후 아버지 민유중의 신도비..

명성왕후 탄강구리비로 고종이 1904년 명성황후가 어릴 때 공부하던 별채 자리에 세운 것이다..

명성왕후 탄강구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에 있다. 화강암으로 된 비의 전체 높이는 268㎝, 방형기단석(方形基壇石) 위에 세워진 비신(碑身)의 높이는 150㎝, 너비 64㎝, 두께 46㎝이다. 비 앞면에는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明成皇后誕降舊里)”, 뒷면에는 “광무 8년 갑진 오월 어느 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라는 의미의 글이 새겨져 있어, 이 비가 1904년(광무 8)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부만 남아 있으며, 비각은 1970년에 새로 보수하였다. 필자 미상이나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이며,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글씨로 추측된다.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1866년 고종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가 왕비로 있은 시기는 조선사회의 대변혁기였으며, 명성황후는 이 시기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날로 그 세력이 강대해지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1895년 삼국간섭(三國干涉)의 틈을 타 친러반일정책(親露反日政策)을 쓰다가, 일본자객에게 경복궁에서 시해되었다. 1897년 명성황후로 추봉 되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명성황후순국숭모비..

명성황후기념관을 둘러봅니다..

명성황후 기념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하였으며 명성황후(明聖皇后, 1851~1895) 생가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전시실은 면적 520㎡로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등의 유물·같은 시기에 활약하였던 여흥 민 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한다. 명성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복제품), 시해장면을 재현한 매직비젼 영상물 등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옆에 있는 161석의 공연장에서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영상물을 단체 관람객들에게 상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명성황후의 개화사상과 민족 자주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명성황후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생가 옆에 “명성황후탄강구리”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 옆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 선생의 신도비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우측 산쪽 150m 지점에 그분의 묘가 있다.(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구석)

 

고종과 명성황후 영정..

명성황후

흥선대원군에 맞서 개화정책을 펼친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왕비.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의 실각 후 정권을 장악하여 개화정책을 펼쳤으며, 여성부원군 치록의 외동딸로 16세에 왕비가 된 후 대원군과의 불화가 지속되자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하여 탄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있었다. 3국 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친러성향으로 굳혔다. 명성황후와 그 세력을 일본의 조선 병합에 가장 큰 장애로 여겼던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으킨 1895년 을미사변 중에 시해당했다. 사후 명성황후로 격상되었으며 양주 숙릉에 묻혔다가 1919년 고종 사후 홍릉으로 이장되었다.(출처 : 다음백과)

 

명성황후의 한글편지

명성황후의 발자취/ 아래 우측은 명성황후 국장의 모습..

명성황후추모비..

연못이 잘 조성되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