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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우즈베키스탄

중아아시아 ~ 카라코롬 26일차(23. 7.18/화) 부하라 / 시토라이 모히 호사 여름 궁전, 차쉬마 아유프, 아르크성 등

by 산사랑 1 2024.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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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란 미나렛(Kalon Minaret)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칼란 모스크, 왼쪽의 미르 아랍 마드라사가 보입니다..

 

카라코롬 26일 차(23. 7.18/화) 부하라 자유여행
라비 하우즈, 칼리얀(Kalyan)미냐렛, 아크(Ark)성 둘러보기. 숙소 : Kamelot Hotel 또는 동급(조식포함)

2016. 7. 15 (금) 부하라 :  칼란 미나레트(Kalan Minaret), 바하우딘 낙쉬반디 사원, 시토라이 모히 호사 여름 궁전, 초르 바크르, 이스마일 샤마니드 영묘(Ismail Samanids Mausoleum), 차쉬마 아유프, 아르크 성, 마고키 아토리 모스크, 초로 미노로 마드리사

부하라

부하라는 고대부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번영했던 도시이다. 그리스계 박트리아 왕조 시절의 금화가 출토되었으며 사마르칸드, 발흐와 함께 불교가 매우 융성했던 지역이었다. 도시 이름 부하라는 승려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사찰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비하라 혹은 바하라(Vihara, Vahara)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에는 인도 쿠샨 왕조와 중국 사이의 중개 무역으로, 사산 왕조와 튀르크족 사이의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마니교의 영향도 많이 받은 국제도시였다. 무역만 했던 것은 아니고 기원원년 전후로 인도의 관개 농업 기술을 도입하여 양질의 과일을 많이 생산했다.

이슬람화 이후에는 중세 초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사만 왕조 시절에 부하라의 번영은 절정에 달하였다 전해진다. 부하라 시민들에게 물어보면 이슬람에서 가장 권위있는 하디스 편집본인 사힛 알 부하리가 바로 부하라 출신 학자 무함마드 알-부하리(부하라 사람 무함마드)에 의해서 수집되고 편집되었다고 자랑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무함마드 알 부하리는 아랍어에 매우 능통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중앙아시아 문화 풍습의 영향을 적잖이 받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이슬람에서 결혼을 권장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앙아시아의 마니교나 불교 승려들과 유사하게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하며, 성직자이자 학자로서 자신이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 때 몽골군의 의해 도시 인구가 전멸했던 적도 있지만, 탁월한 지리적 입지 덕분에 다시 복구되었다. 티무르 제국이 몰락한 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부하라 칸국의 실질적인 수도이기도 했다. 사마르칸트, 히바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역사 도시이기도 하다. 아르크(성)과 구시가지는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었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부하라는 원래 성곽 도시였지만, 현재 도시 성벽은 일부만 남아 있다. 인구 약 26만 명 규모의 도시이지만, 구시가지가 그렇게 크지는 않아 전부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다. 과거 에미르가 살던 아르크나 부하라의 랜드마크인 칼론 미나렛, 구시가지의 중심 랴비하우즈를 둘러싼 수많은 모스크와 수백 년 된 가옥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주로 부하라 칸국 당시 만들어진 건축물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부하라 칸국 당시 건축된 감옥인 진단이나 성곽인 부하라 아르키, 부하라 북부에 있는 시토라이 모히 호사 여름궁전 등이 있다. 이외에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마드라사 중 하나인 압둘라지즈 칸 마드라사, 10세기 경 일대를 지배했던 샤머니드 왕조 당시 왕이었던 이스마일 사마니의 영묘, 구약 성서에도 등장하는 차슈마 욥의 무덤,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의 모스크와 건축 양식이 다르며 소위 '천상의 연못'이라 불리는 연못이 있는 볼로 하우즈 모스크 등이 압권이다.

또한 관광지들이 대부분 부하라 서부와 부하라 중부 일부분에 몰려 있으며 대부분의 관광지들이 걸어서 10 ~ 15분 거리에 있어 관광이 매우 편리하다. 그냥 하루는 부하라 서부 위주로, 하루는 부하라 동부 위주로 돌면 이틀이면 관광이 끝난다. 다만 시토라이 모히 호사 여름궁전이나 부하라 칸국 아미르 궁전의 경우 도시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 자동차나 택시가 필요하다. 부하라 칸국 아미르 궁전은 부하라 역에서 5분 거리에 있어 기차로 이동하는 관광객이라면 기차역에서 내린 직후, 혹은 부하라에서 떠나는 날에 둘러봐도 좋다. 부하라에서 동쪽으로 약 30분 정도 차를 타면 나오는 투다쿨 호도 매우 아름다워 휴식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사마르칸트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관광지는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선 돈을 내야 하는데 이스마일 사마니의 영묘와 같이 규모가 작은 관광지의 경우 5천 솜 정도, 진단이나 부하라 아르키 등은 2만 솜 정도이다. (출처: 나무위키)

 

이른 아침 산보를 겸하여 숙소 주변인 부하라 구시가지 둘러 보았다. 부하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답게 곳곳에 마드리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칼란 미나레트(Kalan Minaret)  구경하고 내친 김에 아르크 성(Ark Fortress)까지 갔으며, 자세한 것은 나중에 다시 와서 볼 생각으로 숙소로 되돌아갔다. 

 

울루그 벡 마드라사는 3개가 있는데 그중 2개는 사마르칸트에 있고 나머지 하나가 이곳에 있다.

보석 상점이 있었던 타키 자가론(Toqi Zargaron) 바자르..

칭기즈칸이 부수지 말라고 한 칼란 미나렛(Kalon Minaret)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칼란 모스크, 왼쪽의 미르 아랍 마드라사가 보입니다..

부하라의 칼란 미나렛(Kalon Minaret)
카론 미나렛, 칼리얀 미나렛 등으로 불리는 이 미나렛은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중앙아시아에 존속했던 카라한 칸국(Kara-Khanid Khanate)의 칸이었던 무하마드 아슬란 칸(Mohammad Arslan Khan)은 12세기 초반 부하라에 이슬람교의 부흥을 위해 대규모 건축을 명령했다. 부하라에서 가장 큰 카론 모스크와 함께, 부하라에서 가장 높은 카론 미나렛이 세트로 건립되었다. 1127년, 카라한 왕조 때 지어진 칼란 미나렛(첨탑)은 무아진이라 불리는 사람이 꼭대기에 올라가 하루에 다섯 번씩 예배 시간을 알리는 코란을 낭송하던 곳이다. 칼란 미나렛(첨탑)은 낮에는 코란 낭송 소리와 높이로, 밤에는 불빛으로 끝없는 사막에 지쳐 있는 실크로드의 상인들에게 등대 구실을 해 주었다.

칼란 미나렛은 불로 구워 낸 벽돌을 색과 모양을 다르게 놓아서 문양을 만들고 들쑥날쑥하게 배열해 놓았다.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벽돌을 쌓아 놓은 것이 한 치의 비뚤어짐도 없이 딱 맞게 직선을 이루고 있다. 첨탑 아래에 서서 푸른 하늘과 맞닿은 꼭대기를 바라보노라면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높이는 약 48미터이며, 바닥의 직경은 9m 정도로 거대한 첨탑이다. 조각이나 형태도 독보적으로 뛰어나지만, 칭기즈칸의 파괴에 살아남아 더 의의가 깊다.

 

 1만 명의 예배자를 수용할 수 있는 칼란 모스크..

칼리얀 모스크(Kalyan Mosque)
칼리얀 모스크는 부하라의 가장 큰 모스크인 회중모스크(금요일 모스크)로  1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다. 지금의 모스크는 16세기의 건물로, 정면에 위치한 카론 미나렛에 비해 400년 차이가 난다. 원래 카라한 칸국의 아슬란 칸이 미나렛과 함께 칼리얀 모스크도 건립하였지만, 칭기즈칸에 의해 모스크만 파괴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모스크 재건과 붕괴가 있었고, 지금의 모습은 1514년 우바이둘라 칸(Ubaidulla-khan)이 샤이반 왕조의 칸이 되기 이전 이 지역의 총독이었던 시기에 맞은편에 위치한 미르 아랍 마드라사와 함께 만들었다. 

칼리얀  모스크는 130m x 80m의 규모인데, 이는 12세기 카라한 왕조 시기에 만든 모스크의 크기와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모습은 4개의 이완, 넓은 안뜰과 주 건축물의 대형 돔, 수백 개의 작은 돔과 아치로 구성된 288개의 예배공간이 있다. 사마르칸트에 위치한 비비하눔 모스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동시 1만 명의 예배자를 수용할 수 있다. 안뜰은 방대한 넓은 공간으로 인해, 사방으로 막혀있음에도 열린 공간의 느낌을 가진다.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중앙 광장엔 뽕나무가 있고, 그 뒤엔 칭기즈칸에 의해 학살된 수많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팔각형의 작은 건물이 있다.

 

칼리얀 모스크..

 

칼란 모스크 맞은편에 는 미르 아랍 마드라사

미르 아랍 마드라사(Mir Arab Madrasai)
미르아랍 마드라사(Mir-i-Arab Madrasa)는 카론미나렛, 칼리얀 모스크와 함께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는 마드라사. 16세기 부하라 칸국의 사이바니 왕조, 우바이둘라 칸(Ubaidulla-khan) 시기에 만들어졌다. 미르 아랍이란 아랍의 왕자라는 뜻인데, 이 왕자는 당시 부하라에서 지지를 얻었던 예멘의 왕자 셰이크 압둘라 야마니를 지칭한다고 한다. 미르 아랍 마드라사의 평면은 73m x 55m로 동서로 긴 직사각형 구조이다. 내부는 일반적인 마드라사와 같이 직사각형의 중앙 정원이 있고, 정원을 둘러싼 건물은 2층 구조로 후즈라(hujra)라고 불리는 학생들의 기숙사가 있다. 지금도 여전히 신학교로 사용하고 있어 안뜰로 들어갈 수 없지만, 그만큼 마드라사로서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러시아 제국 시대에 대부분의 마드라사들이 폐쇄되었는데, 이곳만은 남겨졌다고 한다.

​미르 아랍은 예멘 사람으로 이곳에서 신망을 얻었기에 그의 이름이 모스크의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마드라사는 부하라 왕 압둘라(Abdulla Khan)가 노예를 판 대금으로 건설하였기에 ‘피의 마드라사’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는 학교로 중정을 중심으로 회랑의 1층에는 회의실, 도서관 등이 있고, 2층은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도 교육 중이어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사진만 찍을 수밖에 없었다.

 

대낮인데 해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곳은 현재 복원 중입니다..

칼란 미나렛(Kalon Minaret) 이 멀리 보이고 칼란 모스크가 우뚝 서 있습니다..

부하라의 상징과도 같은 기념물 중 하나인 아르크 고성..

아르크 고성(Ark of Bukhara)

부하라의 고성의 위치는 기원전 2~3세부터 도시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성을 쌓은 것은 5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여러 시기를 거치며 붕괴와 복원을 반복하며 지금의 형태에 이른다. 정면의 거대한 성문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성은 1920년까지 지배자의 거처로 사용하였지만, 소련에 병합되며 더 이상 성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부하라의 상징과도 같은 기념물 중 하나인 아르크 고성은 아르크(Ark)' 자체가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 3~4세기부터 이 지역은 부하라의 중요 거점지역으로 사용되었다. 5세기 경에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소련의 침략으로 더 이상 궁성으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거의 박물관으로 대체되었다.) 잔존하고 있는 기념물 중 눈에 띄는 건물들은 역사가 긴 편은 아니다. 중앙 입구는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성벽의 울긋불긋한 흔적을 보면 얼마나 많은 보수가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아르크 성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인 발라 하우즈 모스크(Bala khauz Mosque)..

발라 하우즈 모스크(Bala khauz Mosque)는 ‘연못(khauz) 위쪽(Bala) 모스크’란 뜻을 가진 발라 하우즈 모스크로 1718년 아르크 성의 맞은편에 왕의 기도처로 지어졌다고 한다. 특히 목재에 아름다운 무늬가 조각된 사원의 기둥이 인상적이었다. 화려하고 높은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1920년에는 부하라의 회중모스크로 사용되었다. 모스크 앞의 연못과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포함되어 있다.

발라 하우즈 모스크를 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본 칼란 미나렛(Kalon Minaret), 칼란 모스크, 미르 아랍 마드라사..


아침 식사 후 일행 3명과 함께 9시 호텔을 나와 예약(30만 솜) 택시를 타고 약 20분 정도 달려간 곳은 바하우딘 낙쉬반디(Bakhauddin Nakshbandi) 사원이다. 부하라 동쪽 카스리 오리폰(Kasri Orifon)에 위치한 바하우딘 낙쉬반디 모스크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수피(이슬람 신비주의) 학교를 세운 바하우딘 낙쉬반디(Bakhauddin Nakshbandi)의 영묘가 있는 곳이라 한다. 내부에 들어가니 천장을 청소하고 있어 자세히 보니 청장의 무늬가 다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사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온 상태라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특이한 기둥과 많은 영묘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약 20분 구경을 하였다.

 

바하우딘 낙쉬반디(Bakhauddin Nakshbandi) 사원..

14세기 복합단지로 유네스코에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단지 안으로 들어갑니다..

바하우딘 낙쉬반디 사원의 내부 모습..

천장을 청소하고 있더군요..

천장의 무늬..

연못에는 고니들이 노닐고 있고..

​다시 택시를 타고 약 17분 달려 시토라이 모히 호사(Sitorai Mohi-Khosa) 여름 궁전에 도착하니 9시 58분이었다. '시토라이'는 '별'을 '모히'는 '달'을 의미하고, 호사는 궁전을 의미한다. 입장료 40000솜을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걸어가니 궁전 광장이 있었다. ​광장을 둘러싼 아담한 건물들은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손님을 접대하던 접견실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유럽풍으로 호화롭고 도자기들도 비치되어 있었다. 궁전 뒤쪽은 왕의 여인들의 공간인 하렘으로 하렘 내부에는 카펫, 도자기와 집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앞에는 인공 연못 하우즈가 자리하고 연못 옆에 자리한 높은 망루는 왕이 수영하는 여인들을 구경하던 곳이다.  부속 건물에는 16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부하라 왕궁에서 사용했던 의복과 장신구와 신발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었다.

 

시토라이 모히 호사(Sitorai Mohi-Khosa) 여름 궁전..

궁전광장..

여름궁전(Sitorai Mohi Xosa) : 유목민들의 지배자들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절에 따라 거처가 옮겨졌다. 이러한 습관이 부하라에도 남아 있었다. 지배자들은 더운 여름 가장 시원한 지역에 여름의 궁전을 만들어 기거하였다. 부하라 칸국의 건축 유산으로 유럽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지금은 박물관의 형태로 사용 중이다

 

접견실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유럽풍으로 호화롭네요..

채색이 화려하고 

도자기들도 비치되어 있고..

부하라 출신의 궁전 공사 책임자의 흉상..

공작새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하렘....

하렘 내부에는 카펫, 도자기와 집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여름 궁전 뒤로는 후궁들의 거처인 하렘이 나오고 제법 큰 연못도 보이고 이곳에서  왕의 여인들이 수영을 하였을 것입니다..

연못 옆에 자리한 높은 망루는 왕이 후궁들이 수영하는 것을 보면서 하룻밤을 함께할 여인을 뽑았을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포도나무에는 포도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부속 건물에는 16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부하라 왕궁에서 사용했던 의복과 장신구와 신발 박물관으로 사용 중..

​10시 50분 궁전을 나와 약 20분 택시를 타고 부하라 서쪽 약 6km 지점(Sumitan)에 위치한 죽음의 도시라 불리는 초르 바크르(Chor Bakr)에 11시 03분 도착하였다. ​입장료 10,000 솜을 지불하였다. 무덤군을 구경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서니 무덤가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초르 바크르 영묘 주위에는 일반인들의 무덤도 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모스크 내부는 2016년 새로 단장을 하여 아주 깨끗하였으며, 길가로 천도복숭아가 많이 심어져 있어 하나 따 먹으니 맛이 있었다.

 

초르 바크로 가는 길에 천도복숭아가 많이 열려 있어 따 먹어보니 맛이 있더군요..

초르 바크르로 들어갑니다..

쵸르바르크(Chor-Bakr)는 부하라에서 서쪽을 5km 떨어진 곳의 역사단지로 대형 모스크와 마드라사, 그리고 수많은 영묘들이 있다. 10세기 사마니드 시대에 무하마드의 후손들을 시작으로 성지로 알려졌다. 16세기에 가장 번성하였다. 고요한 영적 공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무하마드 후손인 아부 바크르(Abu-Bakr)의 4명 형제(Chor-Bakr)의 묘를 중심으로 커진 넓은 묘지로 순례자의 숙박지(khanaka), 모스크, 마드라사 순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물이다. 그리고 옆쪽에는 많은 무덤들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으로 숙박지인 하나카가 보이고 오른쪽에 푸른 돔이 있는 모스크가 보인다. 모스크 오른쪽에는 마드라사가 자리하고 있다. 마드라사 앞과 옆에는 많은 성인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무덤은 남북 방향으로 자리하고 얼굴은 메카 방향인 서쪽으로 향한다고 한다.

 

초르 바크로 내부의 모습으로  순례자의 숙박지(khanaka), 모스크, 마드라사와 연못이 보이네요..

 

초르 바크로를 둘러본 후 다시 택시를 타고 11:30분 이스마일 사마니의 영묘로 출발하였다. 약 20분 후 시내로 들어와 이스마엘 영묘 옆에 있는 차쉬마 아유프(Chashma Ayub)를 지나 이스마일 샤마니드 영묘(Ismail Samanids Mausoleum)에 도착했다. 티켓 창구도 없는데 돈 받는 아가씨가 입장료 10,000 솜을 요구(7년 전 5.000솜)하였다.

 

 이스마일 사마니의 영묘..

​이스마일 사마니의 묘당은 현재 남아 있는 중앙아시아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인정받고 있는데, 사만 왕조의 가족들을 묻은 왕족 무덤이다.  9세기말에 지어진 건물인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이슬람 건축물이 손에 꼽힌다. 그 이유는 징기즈칸의 군대가 우즈벡 고대 오아시스 도시들을 휩쓸면서 대부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한 사마니 왕조의 건축양식이기도 하다.  규모가 작은데, 알면 알 수록 놀라운 건물이다. 1925년 흙더미 속에서 발견된 이 건물은 햇볕에 말린 벽돌이 요철 모양으로 차곡차곡 벽을 이루고 있고, 지붕은 둥근 반원 모양이다. 사각의 바닥은 땅을, 지붕은 우주를 의미한다. 정교한 조각과 기하학적인 벽돌 건축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가로, 세로가 10m인 정사각형 건축물은 비록 크지는 않지만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무늬의 빛깔이 변화하여 신비감을 준다고 한다. 

 

지붕은 둥근 반원 모양으로 천장의 모습..

 

9세기 말 부하라를 점령하고 수도로 정한 페르시아 왕조(819-996)인 사마니드(Samanids) 왕조의 이스마일(Ismail)은 아버지를 위해 이 무덤을 지었다. 그 후 자신과 후손들이 묻히면서 사마니드 왕조의 왕족 무덤이 되었다. 특히 입구 문 위의 중앙에 있는 역삼각형은 죽은 사람을 뜻하고, 양쪽에 있는 사각형의 무늬는 이슬람교와 불교, 조로아스터교의 혼합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다양한 형태의 창문도 특이하였지만 돔 가운데 열려있는 구멍도 무척 신비로운 것 같았다. 이슬람 초기의 영묘라고 하는데,  후대의 영묘들보다 더 화려한 느낌이 있다. 이스마일 영묘의 형태는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사원 (Temple of Fire)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입구 문 위의 중앙에 있는 역삼각형은 죽은 사람을 뜻하고, 양쪽에 있는 사각형의 무늬는 이슬람교와 불교, 조로아스터교의 혼합을 나타내고 있다..

​벽면의 포인트마다 달라지는 조적기법이 신비롭다. 

이런 화려한 느낌은 정말 다양한 벽돌 쌓기 기법에서 볼 수 있다. 벽면의 다양한 무늬가 인상적이었다. ​벽돌의 패턴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 도무지 질리지 않는다. 포인트마다 달라지는 조적기법이 신비롭다. 어느 한 곳 한 곳 뺄 곳이 없다. 특히 지붕 상부 구조의 창문들은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모서리 부분도 멋지다. 이 지역은 큰 지진이 몇 차례 있었기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붕괴되었는데, 이렇게 벽돌로 화려한 조적 기법을 사용하였는데도 천년 이상 버티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대단하다. 놀라움은 내부로 가면 더욱 더해진다. 화려한 돔이 눈에 들어온다. 벽돌 건물이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이었던가. 특히 모서리 부분의 아치가 이슬람 건축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후대에 지어진 건물은 모두 이런 모서리 아치를 모방했다.

 

 모서리 부분의 아치는 후대에 지어진 건물이 모두 모방했듯이 이슬람 건축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발길을 돌려 바로 곁에 자리한 차쉬마 아유프에 도착하였다. ​차쉬마 아유프 입장료는 20.000솜 이었다. 입장료가 조금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물을 의미하는 차쉬마와 구약 성경 욥기서의 주인공인 욥을 의미하는 아유프가 결합한 명칭으로 돔형의 지붕을 가지고 있다. 예언자 ‘욥’이 부하라 주민들이 식수난으로 고생하자 자신의 지팡이를 내리쳐 샘물이 솟아나게 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물을 받아 마시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도 물을 한 잔 마셨으며, 우물에 대한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구약 성경 욥기서의 주인공인 욥의 우물이 있는 차쉬마 아유프..

차스마이 아윱 영묘(Chashmai Ayub Mausoleum): 차스마이 아윱이 지팡이를 꽂자 치유의 연못이 솟아났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건물 자체는 13세기 초반에 만들어져, 부하라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문화유산이다. 이스마일 영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욥의 우물이라고 합니다..

차쉬마 아유프 앞에 있는 건물..

차쉬마 아유프를 구경하고 택시를 타고 숙소 근처에 도착하여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고 택시와 헤어졌다. 숙소에서 간단히 란과 커피 한 잔으로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했다. 16:40분 일행 한 명과 함께 아침에 갔었던 아르크 성(Ark Fortress)으로 다시 출발하였다.


아르크 성 가는 길에  칼리얀 미나렛(Kalon Minaret), 칼란 모스크, 미르 아랍 마드라사를 들렀으며, 칼란 모스크에 들어가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칼란 모스크를 둘러본 후 아르크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갔다 온 분이 성 전체를 둘러보는 것이 아니고 성 앞쪽만 조금 둘러본다고 하여 생략 하였다.

 

칼리얀 미나렛..

칼란 모스크 내부로 들어갑니다..

칼란 모스크 내부..

 아르크 성도 잠시 둘러보고..

아르크 성을 본 후 9세기 건축물로 남아 있는 마고키 아토리 모스크를 찾았다. 이곳은 아침에도 들린 곳이지만 특별히 관심 가지말한 곳이 아니란 느낌이 들었는데 함께 간 분이 부하라에서는 반드시 봐야 할 곳이라고 하여 다시 찾았다.. 5~6명의 현지인에게 위치를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겉으로 보면 보잘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9세기 건축물인 마고키 아토리 모스크..

마고키 아토리 모스크를 둘러본 후 아침에 찾지 못한 초로 미노로 마드리사를 찾아갔다 이곳은 구글 지도상 목적지보다 조금 더 먼 곳에 있었다. 이곳을 관람한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커피점이 있어 그곳에서 커피 한 잔과 피자. 햄버거 등 을 구매한 후 커피를 마시고 피자 등은 테이크 아웃하여 숙소에서 저녁으로 먹었다. 숙소가 낮에 불이나 경찰, 소방, 군인들이 몰려왔다고 하며, 아직 수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21시 30분경 수리가 완료되지 못하여 짐찔퉁에서 대기하였다.

 

초로 미노로 마드리사..

탑 뒤쪽에 있는 모형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