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동우회에서 안보관광으로 24.6.25~6.28일(4일)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 여행을 다녀왔다. 사실 작년 가을에 건강셀프등산회 제900회 특집산행으로 작년 가을 백두산이 추진되어 최고로 멋진 경치를 보았기에 이번에는 가지 않아도 되지만 국방동우회 안보관광으로 백두산을 추천한 당사자로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팀은 건셀 900회 특집산행 당시 백두산에 갔었던 '산이 좋은 사람들'을 통해서 계약(1인 115만원)하고 압록강 보트체험을 포함시켰다. 백두산은 6월 말에 가면 눈과 야생화를 볼 수 있고 최성수기인 7~8월을 피할 수 있어 행운만 따른다면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고 가격도 절약할 수 있기에 6월 말로 계약을 하게 되어 이번에 24명이 함께하게 되었다.
광개토 대왕릉..
장수왕릉(장군총)..
인천에서 선양(심양) 가는 비행기는 08 : 15분에 이륙하여 09 : 40분(중국시간 08 : 40분/ 1시간 시차)에 도착하였다. 이제부터 중국시간으로 작성하며, 수화물을 찾고 통관절차를 마치고 가이드를 만나 10시 버스에 탑승하여 집안으로 이동하였다. 가는 길에 강이 나오는데 이 강이 훈허 강(渾河)으로 심양이란 지명이 여기서 나왔다. 즉 훈허 강의 옛 이름이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는 뜻인 '심수지 양(瀋水之陽)'으로 선양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심주, 심양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가 봉천을 거쳐 다시 선양이 되었다. 병자호란(1637. 1. 3일~ 2. 24일)때 삼학사(척화파인 윤집, 오달제, 홍익한)와 소현세자가 끌려가 8년간 머물었던 곳도 바로 이곳 심양이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날에 선양에 있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청 태종의 능을 다녀 올 계획이다.
첫째 날 일정은 집안으로 가서 광개토대왕비 & 능, 그리고 장수왕릉, 환도산성(공사 중이라서 통과하였음)을 둘러본 후 압록강에서 보트를 탈 계획이다. 선양에서 점심 식사 장소인 집안까지는 2시간이 소요되고 그곳이 누루하치 고향이다. 동북삼성이 닭머리 부분이고 요령성, 흑룡강성, 길림성을 뜻한다.
동북산성
중국의 최동북쪽에 위치한 지린성[吉林省]·랴오닝성[遼寧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 등 3성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중국의 대표적인 낙후지역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총면적은 79만㎢(중국 전체의 8.2%), 인구는 1억 595만 명(중국 전체의 8.3%)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둥베이삼성 [東北三省(동북삼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인천공항에서 동우회 회원들이 아침 6시까지 집결을 합니다..
백두산 여행은 89년부터 시작되었고 당시에는 트레킹을 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트레킹이 금지되었다. 11시 무순을 통과하는데 이곳은 노천탄광이 유명하다고 한다. 11:30분 휴게소에 들렀는데 화장실은 무료인 점이 왼만한 국가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중국의 땅은 국가 소유인데 농민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데 현재는 거의 사유화가 되었다고 한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야 되며. 농사를 짓지 못하면 정부에서 다시 사 들인다고 한다(몰수한다는 설이 있음). 그래서 농부들은 옥수수를 많이 심고 도시로 나가서 일을 하기 때문에 중국에 옥수수가 많은 이유라고 한다. 집안(고구려 시대 국내성)은 후금 당시 수도였고 여기에 조선족 학교도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이민족 거주지가 11퍼센트를 넘으면 자치구가 된다.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조선족이 약 3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휴게소에 잠시 쉬어 가는데 화장실은 무료였다..
12:03분 요녕성으로 들어와 현지식으로 식사를 했는데 의외로 맛이 있었다. 식당에는 만주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생활용기들이 있었다. 식사 후 13: 10분 출발하였으며, 집안까지 약 2시간 소요된다고 한다. 들녘에는 옥수수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집들이 단층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골에는 약 20퍼센트의 주민만 살고 있고 나머지는 도시로 나가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고속도로는 2019년 뚫렸다고 하며 속도제한이 있었다. 버스는 80km, 택시는 110km라고 하며, 새벽 2시에서 5시까지는 차량운항을 통제한다고 한다. 15시 집안을 지나 남포시의 헐벗은 북한 지역의 산들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 아래 압록강이 흐른다고 하며, 철도는 북한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점심식사를 한 현지 식당입니다..
현지식 점심식사가 의외로 우리 입맛에 잘 맞습니다..
만주족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는 생활용기들입니다..
연기가 나오는 굴뚝 너머가 북한땅입니다..
철로는 북한 땅으로 이어집니다..
광개토태왕릉으로 가는데 능은 방형이라고 한다. 처음 방문한 곳은 광개토 대왕릉비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사방을 방탄용비각으로 막아 놓았고 비각 안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고 있다.
광개토 대왕릉비로 갑니다..
비는 방탄용비각으로 보호되어 있습니다..
화강암 대석 위에 세운 비는 높이 6.39m, 무게는 37톤에 달하고. 한 면이 1.35~2m에 달하는 사면체 응회각력암에 총 44행 1,775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중 140여 자는 자연 마모나 인위적파손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계 문화유산 광개토 대왕릉비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광개토 대왕(재위 391~413)의 업적을 기리고자,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세웠다. 화강암 대석 위에 세운 비는 높이 6.39m, 무게는 37톤에 달한다. 한 면이 1.35~2m에 달하는 사면체 응회각력암에 총 44행 1,775개의 글자를 어른 주먹만 한 크기로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머리에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부터 광개토 대왕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고구려가 계승 · 발전되어 왔는가를 소개한다. 두 번째 부분은 광개토 대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세 번째 부분에는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의 출신지와 차출 방식 및 수묘인의 매매 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새겨 놓았다. 그러나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사방을 유리로 막아 놓아서 자세히 관찰하긴 어렵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광개토 대왕릉비는, 인위적으로 다듬어 규격이 딱 떨어지는 비석이 아니라 더 웅장하고 자유로운 기개가 돋보인다. 그 자연스러운 형태에서 고구려인들의 자유롭고 호방한 기질을 엿볼 수 있다.(출처 : '인조이 중국(2020 개정판)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을 한 후 바깥도 둘러봅니다..
광개토 대왕의 동상도 세워져 있고 / 총 44행 1,775개의 비문의 내용을 외부에 표시하고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릉 비..
광개토 대왕릉비를 둘러본 후 인근에 있는 광개토 대왕릉으로 이동을 하였다. 주변에는 개망초가 만개해 있는데 마치 밀밭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광개토 대왕릉은 너른 들판에 야트마한 언덕같이 보일 정도고 주변에는 무너져 내린 돌들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작년 신장 위루르에 갔을 당시 향비묘를 둘러 보았는데 예전에는 향비묘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향비묘가 없고 이름도 향비원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위루르족의 단결을 상징하는 향비묘를 치워(?)버린 것 같이 광개토대왕릉도 방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작년 가이드에 의하면 중국은 유물은 잘 관리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존한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개토대왕의 유적은 교통도 불편하고 관리도 소홀한 것 같이 보이지만 5A 등급으로 관리하고 있고, 마지막날 다녀 온 교통도 좋고 관리도 잘 되고 있는 청태종의 청소릉은 4A등급인 것을 감안해 보면 광개토대왕릉을 소흘하게 관리하지는 않은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개망초가 만개해 있고..
광개토 대왕능입니다..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광개토 대왕릉비에서 북서쪽으로 300m 떨어져 있다. 거대한 자갈 무더기가 쌓여 있고 주위에 화강암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원래는 장군총처럼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석실묘였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장군총보다 4배 컸을 것이라고 한다.
무덤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태왕의 능이산처럼 평안하고, 큰 산처럼 굳건하길 기원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태왕(太王)’이란 칭호는 광개토 대왕을 가리키므로, 광개토 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2003년 중국이 능을 조사하면서 발견한 청동 방울이 이런 추정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방울의 몸체 사방에 ‘新卯年(신묘년)’, ‘好太王(호태왕)’, ‘所造鈴(소조령)’, ‘九十六(구십육)’이라고 3자씩 문자가 적혀 있었다. 이 글을 해석하자면 ‘신묘년(391년)에 호태왕이 96번째 은방울을 만들었다.’라는 뜻으로, 신묘년은 광개토 대왕이 재위했던 해다..(출처 : '인조이 중국(2020 개정판)
광개토 대왕능에서 단체인증을 합니다..
장군총처럼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석실묘로
작년은 사진 촬영은 못하게 했는데 올해는 사진 촬영할 수 있네요..
뒤쪽 산이 있는 곳이 북녘 땅이고 그 앞이 남포시입니다..
광개토 대왕릉에서 떨어져 나온 기단석들..
엉겅퀴(아래) / 위는 모르겠습니다..
장군총 뒤에서 본모습..
광개토 대왕릉을 둘러본 후 장수왕릉(장군총)으로 이동을 하였다. 작년 가이드는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추정을 한다고 하였는데 현지에는 세계문화유산 장수왕릉이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군총은 발견 당시 내부가 모두 도벌이 되어 있어 장수왕릉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장군총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뒤쪽의 동변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이다. 장군총 주변에는 4기의 무덤이 있는데 1기만 남아있고 애첩의 묘라고 하는데 마치 고인돌 같이 보였다.
세계문화유산인 장수왕릉입니다..
장군총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장수왕릉/ 장군총(將軍塚)
장군총(將軍塚)은 중국 지린성 통화시 지안시(集安市) 퉁구(通溝)의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돌무덤(石塚 석총)으로서, 현재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다. 산 아래에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고구려의 제20대 태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무덤은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31.5 ~ 33m이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미터로 아파트 5층 높이에 달한다.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동변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이다.
정부(頂部)는 만두형(饅頭形)을 하고 상단부에 1열의 구멍이 있어 정상에 건축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안쪽에는 향당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었으리라 추정했지만,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불탑이나 비석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는 추세이다. 안팎 전부를 화강석으로 쌓아 올린 석축릉으로 구조가 정연하고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이 묘는 일찍이 도굴당한 듯하여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으며, 축석분으로서 거의 안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묘실은 횡혈식으로 벽화가 그려졌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석실의 위치는 높고 밑으로부터 3단째 단을 상(床)으로 하고 있다. 최상단의 상면(上面)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장방형의 거대한 1매의 천정석이 있으며, 연도(羨道)는 서남방으로 있으며 천장은 큰 돌 3매로 되어 있다. 현실의 4벽은 6단으로 쌓고 각 벽의 위에는 굵고 모진 기둥을 옆으로 높여서 천정석으로 받치고 있다. 현실의 크기는 가로·세로의 높이가 모두 5미터 이상이며 상(床)으로 오기(基)의 관대(棺臺)가 있으며, 기단의 4주에는 넓이 4미터의 돌을 두르고 자갈로 채워져 있다. 4벽과 천장에는 본래 칠을 하였으며 벽화가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전부 박락(剝落)되고 없다. 각 층의 외부에는 기와로 덮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출처 :위키백과)
장군석에서도 단체인증을 합니다..
우측 뒤쪽인 동변만 가운데 적석 밀림 방지석인 호석 없이 두 개뿐이며 이것 때문에 전체적으로 기울고 있더군요..
떨어져 나온 기단석,,
장군총 주변에는 4기의 무덤이 있는데 1기만 남아있고 애첩의 묘(?)라고 하는데 마치 고인돌 같이 보이네요..
무너진 채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환도산성을 보러 가야 되는데 도로공사로 인하여 갈 수가 없다고 하여 작년 가을에 찍은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고구려 성은 103개가 있으며 그것이 이어지면 천리장성이고, 옹성의 형태라고 한다. 성안에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있다.
환도산성입니다..
서기 3년(유리왕 22년) 국내성으로 환도하면서 쌓은 환도산성입니다..
- 환도산성 & 산성하무덤군
환도성(丸都城)은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쌓은 성이다. 현재의 지린성 통화시의 지안 서북쪽 2.5km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는 그 성벽이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남측 성벽과 망대의 일부만 남아있다. 고구려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組)를 이루어 조성되었다. 국내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이고, 환도성(위나암성)은 전시 때 사용하는 산성이었다.
환도성(위나암성)은 뒤로 가파른 산능선을 두르고 있고 앞에는 퉁거우 강[通溝河]이 흐르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되는 곳이다. 또한 국내성과 압록강이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적의 움직임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의 공격로는 남문 한 곳이었다. 성벽 둘레는 약 7km이고, 동쪽 성벽 높이는 6m이다.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남측 성벽과 망대의 일부만 남아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연지가 있는 곳으로 잠시 올라가 봅니다..
연지유적..
산성하무덤군 : 환도산성과 통구하 사이의 넓은 들판에 무덤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무덤만 1582기이며 세계 최대의 고분군이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압록강을으로 이동합니다. 압록강에서 보트(10분에 만원)를 타고 소고기 불고기로 저녁식사를 한 후 오늘 숙소가 있는 통화 시로 이동하였다
압록강 보트(10분에 1인 만원)를 탑니다..
북한땅에 초소와 마을이 보이고,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북측 초소도 있네요
중국과 북한이 압록강 하나로 갈라져 있는 것이 조금은 비현실적이지만 어찌 보면 이해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보트 타고 내린 후 잠시 여유를 가져 봅니다..
버스로 가는 길에서..
압록강입니다..
압록강 표지석에서 인증을 합니다..
북한 산이 헐벗은 것이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압록강을 본 후 불고기로 저녁식사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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