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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안보체험 2부(19.10.15) 고려궁지, 성공회 성당, 용흥궁, 갑곶돈대와 전쟁박물관, 광성보 탐방

by 산사랑 1 2020.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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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동우회 안보현장 체험행사로 강화도 평화전망대를 찾아 강 건너 송악산과 북한 주민들이 실제 농사를 짓고 있는 현장을 살펴보았으며, 역사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고려궁지, 성공회 성당, 철종의 잠저였던 용흥궁, 갑곶돈대와 전쟁박물관, 그리고 신미양요 격전지인 광성보 등을 돌아보면서 힘없는 나라의 비애를 느껴 볼 수 있었다.

 

광성보..

 

 

오후 일정의 첫번째로 고려궁지 인근에 있는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을 둘러봅니다..

【용흥궁】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 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출처 : Daum백과]

 

용흥군으로 들어갑니다....

 

용흥궁은 원래 초가였는데 철종 4년년 강화 유수 정기세가 지금의 집을 지었다고 한다(안채)..

 

사랑채..

 

 

 

 

성공회 성당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성공회 강화성당 입구입니다....

 

이곳은 1894년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 학당 군사교관 콜웰(W. H. Callwell) 대위의 관사가 있었던 땅으로

건물 측면과 뒷면의 아치형 출입문 4개는 영국에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읍 내 성공회(聖公會) 강화성당 터는 ‘구원의 방주’ 형국이다. 한옥 건물은 자연스럽게 배의 선실이 된다. 터키 아라라트(Ararat) 산 구원의 방주가 떠오른다. 개화기 때, 성공회 초기 선교사들이 이곳 강화도에 한옥 성당을 세운 건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이오나(Iona) 섬처럼 신앙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뜻에서였다.

 

언덕배기가 일어서는 서남쪽 초입, 뱃머리쯤 해당되는 곳에 솟을대문이 서 있다. 한국 전통 건축양식의 외삼문이다. 절의 일주문에 해당한다. 계단을 오른다. 외삼문 대문 중앙에 태극문양을 배경으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문을 지나면 내삼문이 나타난다. 절의 천왕문에 해당하는데 종루(鐘樓)를 겸했다. 범종과 흡사하다. 당좌(撞座, 종을 치는 부위)의 돋을새김 십자가 문양이 다를 뿐이다. 애초 영국에서 들여온 종은 1943년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정문 계단 철재 난간과 공출해갔다. 지금의 종은 1989년 다시 만든 것이다. 조금 전 지나쳐온 철재 난간은 2010년 일본성공회 측에서 한일 양국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봉헌했다고 한다.

[출처 : Daum백과]

 

 

 

한국 전통 건축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을 혼합해 지은 성당 내부로

백두산에서 뗏목으로 엮어온 목재로 지었다고 하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성당 뒤편에 있는 건물로 숙소나 사제관인 것 같습니다..

 

처음 볼 때는 사찰 같은 느낌이지만 자세히 보면 지붕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강화 주문도에 가면 1905년 설립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강화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도 중앙교회를 볼 수 있는데 이 교회도 한옥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의 모습은 1923년 주문도 교인들이 헌금을 모아 개축한 것으로 인천시 문화재 자료 14호이다.

 

이곳은 서도 중앙교회의 선교 백주년 기념예배당입니다.'라고 적혀있다.(19237월 건립)

 

강화 고려궁지로 들어갑니다....

 

고려궁지에는 고려궁의 유적과 행궁의 유적은 보이지 않고 강화유수부의 동헌인 명위헌과과 이방청 그리고 종각만 서 있으며 최근에 외규장각이 복원되었.

 

유수부 동헌으로 앞의 나무는 400400여 년 된 느티나무로 인조 9년(1631년)9년(1631년) 심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강화유수부 동헌
조선시대 관아의 건물로서 강화 지방의 중심 업무를 보던 동헌으로 영조 45(1769)에 유수 황경원이 현 윤관이라 이름을 붙였으나 현재는 명위헌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글씨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인 백하 윤순이 썼다. 강화유수부는 인조1627년 정묘호란으로 강화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뒤 설치되었. 강화의 유수는 종 2품의2 당상관으()의 신임을 받는 중신이 임명되는 것이 보통인데 진무사도 겸했다. 건물은 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이며, 이중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골의 주처석을 놓고 네모로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유수부 동헌인 명위헌....

 

보수 중인 외규장각..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이곳의 자료 의궤(儀軌)를 비롯한 340권의 책과 문서 및 은궤 수천 냥이 약탈되었다.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의궤 297권은 현재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TGB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의궤상 1권을 반환하며 프랑스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이후 201011,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고, 20115월 환수가 완료되었다.

 

 

이방청..

 

 

강화부 종각에 동종이 있으나 이는 새로 만든 종이며 진짜 종은 균열이 생겨 역사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궁지를 견학하고 전쟁박물관과 갑곶돈대로 이동하였다..

 

강화 성곽 쌓는 모습으로 고려시대 강화 성곽은 토성이었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들를 용두돈대 원경에 대한 설명..

 

조선의 활인데 요즘의 활과는 전혀 다른 형태네요..

 

 

역사박물관을 관람하고 갑곶돈대로 이동하면서 본 탱자나무로 탱자가 많이 열렸있네요....

 

갑곶돈대의 포

 

갑곶돈대(사적 제306호)

갑곶돈대는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실제 대포라고 한다.

 

갑곳리 탱자나무는 사기리의 탱자나무와 함께 탱자가 사해 안에서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에 위치한 것으로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것이다. 강화에 탱자나무를 심게 된 사유는 성벽에 적군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용도였다고 한다..

 

 

 

 

비석 군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경력, 군수의 영세불망비 및 선정비와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 표,, 삼충신을 기리는 삼충 사적비 등총 67기67 비석이 모여있다. 조상들의 자연보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표석인 금표는1703(숙종 29년)강화유수부(고려궁지) 앞 등지에 세웠던 것으로 "가축을 놓아기르는 자는 곤장 100, 재나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를 친다"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다.

 

광성보입니다..

【광성보】

강화 12진보(鎭堡) 가운데 하나이다. 1658(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다. 그 뒤 1679(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의 돈대(墩臺)와 함께 오두정 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영조 21)에는 돌로 성벽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두어 안해루(按海樓)라고 하였다. 1871(고종 8)의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곧 이 해에 미국 함대가 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하여 물리쳤다. 하지만 423일에 초지진은 미국 해병대 450명의 상륙으로 인해 점령되었고, 이튿날에는 덕진진이 함락되었으며, 곧 광성보가 공격을 받았다. 당시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1823∼1871)과 수하의 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힘껏 싸웠으나 중상을 입어 움직이기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1976년에 파괴된 성가퀴와 문루 등을 복원하고,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 비각(雙忠碑閣)을(雙忠碑閣)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출처 : Daum백과]

 

반대편에서 본모습..

 

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성문 안쪽 전경..

 

 

 

두돈대 가기 전에 있는 손돌목 돈대..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5년(1679년) 축조된 돈대로 덕진 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778m2778m 2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고종 8(1871)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돈대에서 조망..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용두돈대에서 본모습으로 물살이 엄청 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손돌목의 이야기로 이번 강화 안보체험을 마무리합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청군이 물밀듯이 쳐내려 오자 인조는 황급히 강화로 피난길을 떠났다. 급작스럽게 떠난 바람에 대곶항 부근에서 강화섬으로 건너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때 손돌이라는 청년 어부가 배를 대자 황급히 그 배를 타고 섬으로 향했다. 하지만 배가 물살이 거센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왕은 '이놈이 나를 물에 빠뜨려 죽이려는구나' 생각하고 신료들에게 사살을 명했다. 그러자 손돌은 바가지 하나를 내밀며 '이 바가지를 물에 띄워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면 강화섬에 닿을 것'이라 말하고 죽임을 당했다. 왕 일행은 바가지가 흘러가는 물살이 드센 곳을 따라가다가 드디어 섬에 닿아 목숨을 구했다. 그 뒤. 왕은 자기의 성급함을 후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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