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일본 북알프스
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강화여행 1일차 소창길을 걷다(20.3.19)

by 산사랑 1 2020. 3. 26.
반응형

강화 소창 길을 걷다

 

‘소창길’은 강화군에서 2018년도 올해의 관광도시 일환으로 개발된 테마별 골목 관광 상품 ‘강화 스토리 워크 길’의 하나이다. ‘강화 스토리 워크 길’은 ‘우리 동네 전성기 소창 길’, ‘그날의 함성 독립운동 길’, ‘역사와 함께 걷는 종교이야기 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 걸었던 소창길의 ‘소창’은 이불 안감이나 기저 귀감으로 쓰는 천으로, ‘소창길’은 바로 강화의 전성기를 더듬는 길이다.

 

강화도는 1970년대까지 직물 산업이 번성한 고장이었다. 1933년 조양방직이 문을 연 이래, 평화 직물과 심도직물, 이화 직물 등 직물 공장이 들어섰다. 크고 작은 직물 공장이 60여 곳이고, 강화읍에만 직물 공장 직원이 4000명이 넘었다. 심도직물은 직원이 1200여 명이었는데, 소창 체험관 내 소창 전시관에 걸린 사진으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전국 소창의 60%를 강화에서 생산했다 하니 대구 못지않은 섬유의 도시였다. 하지만 1970년 중·후반부터 합성섬유를 생산하는 대구로 중심이 옮겨 가면서 강화의 직물 산업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지금은 소규모 소창 공장 10여 곳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오늘 주로 걸을 길은 소창길이지만 이외에도 독립 운동길, 종교이야기길이 군데군데 포함되어 있다. 강화읍 걷기 여행의 시작은 관청리의 강화 관광플랫폼, 중앙시장 B동을 관광안내소와 청년몰로 개조한 건물이다. 강화 관광플랫폼 옆의 카페 7080의 소로 길을 따라가면 골목길에 70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골목을 벗어나면 강화에서 소문난 김밥집인 서문 김밥이 나온다. 서문 김밥은 2017년 생활의 달인에 소개된 곳으로 채선 당근을 넣은 밥에 소금으로 간을 한 것으로 포장만 된다고 한다.

 

강화읍 걷기 여행의 시작점인 관청리의 강화관광플랫폼, 중앙시장 B동을 관광안내소와 청년몰로 개조한 건물이다.

 

카페 7080을 따라 들어갑니다..

 

골목길이 70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강화에서 소문난 김밥집인 서문 김밥으로 포장만 된다..

 

뒤쪽에서 본 강화 관광 플랫폼 건물..

 

성공회 강화성당 가는 길 한쪽 모퉁이에 김상용 순절비가 있었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시 청국과의 화의를 극력 반대한 척화파 김상헌의 형으로 병자호란 당시 종묘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강화산성 남문루 위에서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순절한 김상용 순절비..

 

【김상용 순절비】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이 비는 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강화산성 남문루 위에서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한 선원 김상용 선생의 위국 충절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순조 때 유수로 부임한 공의 7대손 김매순이 건립한 순절비이다. 명종 16년에 출생한 김상용 선생은 장렬 김번의 증손이며 병자호란 시 청국과의 화의를 극력 반대한 척화파 김상헌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우의정을 거쳐 인조 15년에 순국하였으며 그 위패는 선원면에 위치한 충렬사에 봉안하였다. 당초 순절비는 구 남문지에 있던 것을 1976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현 위치로 옮겨 세우던 중 숙종 때 증손인 김창집이 세운 구비가 발견되어 현재 신. 구비를 나란히 세웠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용흥궁 주차장 앞에는 철심을 드러낸 심도직물의 낡은 굴뚝 상단부가 남아 있다. 30m 높이의 심도직물 굴뚝은 강화의 자존심이었다. 심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운영됐던 국내 굴지의 섬유회사로 1960~70년 직원이 1천200명 정도로 강화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 식당과 상점이 들어선 강화읍사무소 일대도 모두 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1965~1968년에 일어난 ‘심도직물 사건’은 한국 천주교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첫 사건으로 가톨릭 노동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용흥궁 주차장 인근의 심도직물 굴뚝. 강화의 전성기를 추억하는 상징물이다.

 

 

용흥궁은 작년 강화 안보체험 당시 둘러보았던 곳으로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당초에는 초가집이었으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작년 가을 안보체험 당시 들렀던 용흥궁으로 갑니다..

 

 

용흥군으로 들어갑니다....

 

용흥궁 문 입구에는 정원용 불망비와 정기세 생묘비가 있고..

 

 

【용흥궁】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 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출처 : Daum백과] 용흥궁 –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용흥궁은 원래 초가였는데 철종 4년년 강화 유수 정기세가 지금의 집을 지었다고 한다(안채)..

 

랑채..

 

 

성공회 성당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용흥궁을 보고 뒤편으로 나가면 성공회 강화성당 입구가 나온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멀리서 보면 사찰(또는 사원) 같은 느낌이지만, 내부는 바실리카식 성당을 잘 소화해 내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건물이다. 강화성당에 들어서면 단청에 한자로 적힌 '天主聖殿(천주 성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기둥에는 세로로 글을 새겨 마치 사찰 같은 분위기가 나지만 2층의 십자가가 기독교 건물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성공회 강화성당 입구로 마치 때문에 향교의 제례 공간을 연상시킵니다..

 

강화성당은 트롤로프 주교가 사제로 있을 때인 1900년에 성공회 영국 교회의 지원하에 외국인 사제가 주도하여 지어졌다. 성당 내부는 백두산에서 뗏목으로 엮어온 목재로 지었다고 하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고 한다. 온수리 성당을 방문할 때 신부님이 방문객들에게 얘기를 하는 것을 들어보니 당시 강화는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 두 차례에 걸친 미국과 프랑스와는 전쟁을 하여 거부감이 상당했으나 영국과는 문제가 없었기에 성공회가 강화에 들어오는데 큰 장애가 없었다고 하며, 건축물을 지을 대도 우리 문화를 존중하여 건물을 지어 백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았다.

 

이곳은 1894년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 학당 군사교관 콜웰(W. H. Callwell) 대위의 관사가 있었던 땅으로

건물 측면과 뒷면의 아치형 출입문 4개는 영국에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읍 내 성공회(聖公會) 강화성당 터는 ‘구원의 방주’ 형국이다. 한옥 건물은 자연스럽게 배의 선실이 된다. 터키 아라라트(Ararat) 산 구원의 방주가 떠오른다. 개화기 때, 성공회 초기 선교사들이 이곳 강화도에 한옥 성당을 세운 건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이오나(Iona) 섬처럼 신앙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뜻에서였다.

 

언덕배기가 일어서는 서남쪽 초입, 뱃머리쯤 해당되는 곳에 솟을대문이 서 있다. 한국 전통 건축양식의 외삼문이다. 절의 일주문에 해당한다. 계단을 오른다. 외삼문 대문 중앙에 태극문양을 배경으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문을 지나면 내삼문이 나타난다. 절의 천왕문에 해당하는데 종루(鐘樓)를 겸했다. 범종과 흡사하다. 당좌(撞座, 종을 치는 부위)의 돋을새김 십자가 문양이 다를 뿐이다. 애초 영국에서 들여온 종은 1943년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정문 계단 철재 난간과 공출해갔다. 지금의 종은 1989년 다시 만든 것이다. 조금 전 지나쳐온 철재 난간은 2010년 일본성공회 측에서 한일 양국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봉헌했다고 한다. [출처 : Daum백과]

 

강화성당은 단청에 한자로 적힌 현판까지 달려 있어 사찰 같은 분위기가 나지만 2층의 유리창과 십자가가 기독교 건물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정면 5개의 기둥에 주련들이 걸려 있다. 창조, 구원, 삼위일체, 복음, 영생 등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한문으로 쓴 것들이다.

 

한국 전통 건축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을 혼합해 지은 성당 내부로

백두산에서 뗏목으로 엮어온 목재로 지었다고 하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강화 성당 내부는 높고 전체적으로 매우 엄숙하게 느껴진다..

 

강화성당은 트롤로프 주교가 사제로 있을 때인 1900년에 지은 것이다..

 

고려산이 보입니다..

 

성당 뒤편에 있는 건물로 숙소나 사제관인 것 같습니다..

 

 

강화성당은 온수리 성당과는 달리 이층으로 되어 있어 조금 더 엄숙하게 보입니다..

 

처음 볼 때는 사찰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자세히 보면 지붕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을 둘러보고 다시 소창길 탐방을 계속하였으며 이화 직물터로 이동하였다. 이화 직물터의 담벼락에는 갑부의 고장 강화, 넉살좋은 강화여인, 이화직물, 조양방직, 심도직물 등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강화는 1933년 인조견 공장 조양방직이 민족자본으로 설립되어 50여대의 역직기를 가동하기 위해 전기를 끌어들이면서부터 대량생산을 하여 갑부 고장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또한 강화는 화문석으로 유명하였기에 화문석을 짜던 여인의 섬세한 손이 직물을 짜고 뚜벅이 행상으로 팔았기 때문에 강화여인의 억척스러움이 배여 있다고 한다.

 

이화직물터의 벽이 보전되고 있네요..

 

 

 

 

 

 

 

 

 

 

 

 

이화 직물터를 지나 금융상사로 이동을 하였다, ‘금융 상사’ 설명문에 적힌 평화 직물 공장장 김웅태 씨의 회고도 재미있다. ‘직물공장에서 돈을 지게로 지고 와서 맡겼다’라고 할 정도로 강화는 전국에서도 소문난 부자 동네였다. 금융상사는 한일은행이었다가 지금은 강화 할인마트 간판을 달고 있다. 금융 상사를 지나 강화 읍사무소 앞쪽에 있는 죽봉 조봉암 선생 생가 터를 찾았다. 조봉암 선생 생가 터에는 표시석 하나만 덩그러니 설치되어 있어 조금은 안타까웠다.

 

한일은행의 전신으로 당시에 직물공장에서 돈을 지게에 지고 맡겼다고 한다..

 

조봉암 선생 생가터에는 표시석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조봉암 산생 생가터를 찾은 후 다시 7080 거리를 지나 길을 건너 반대쪽에 있는 강화를 직물산업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조양방직을 찾았다. 조양방직은 1933년 강화도 지주인 홍재묵·홍재용 형제가 민족자본으로 처음 설립한 방직공장이다. 조양방직이 생기면서 강화도에 전기와 전화 시설이 들어왔으니, 그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조양방직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방직공장으로, 1930~60년대 최고의 인조직물을 생산해 강화 섬유를 널리 알린 기업이로 조양방직에 들어서면 한쪽에 당시 통근버스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7080거리를 지나 반대쪽으로 갑니다..

 

강화를 직물산업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조양 방직입니다..양방직 입니다..

 

 

예전 출근버스가 있네요..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당시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마당으로 들어서니 공중전화기가 세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짬이 나면 전화를 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한쪽 편에 황소상 아래 건물이 있는데 그것이 금고였다고 한다. 금고 규모를 보니 당시 이곳이 얼마나 부유했는지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마당에 있는 예전 화장실을 들어가 보니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 탄생 모형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입구를 따라 들어서면 당시 사용하던 물건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에 사용하던 공중전화기들이 마당에 있네요..

 

 

 

황소상 아래 벽돌 건물이 보이는데 이것이 금고였다고 합니다..

 

금고 규모를 보니 당시 이곳이 얼마나 부유했는지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네요..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르네요..

 

금고로 뒤쪽에서 본모습..

 

 

장실을 들어가 보니 아기 예수 탄생 모형이 있더군요..

 

조양 방직은 지금 카페로 변신하였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였다. 예전에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하였는데 지금은 그냥 눈으로만 볼 수 있어 이것이 잘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시간이 없어 대충 한 바퀴 휘돌아 보고 지금은 폐허로 변한 동광 직물터를 잠시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 볼 수 있었다. 남화 직물터도 역시 공장터만 남아 있었고, 구세 의원은 60년대 말 설립자 권요한이 타계한 후 지금은 개인주택으로 사용 중이었다.

 

카페로 변신하였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더군요..

 

 

폐허로 변한 동광 직물터를 보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네요..

 

 

남화 직물터도

 

구세 의원

 

 

구세 의원을 지나 김구 선생이 방문한 대명헌이라는 한옥을 찾았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대명헌 외부는 유림상회와 소금빛 서점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행랑채와 사랑채였다고 한다 김구 선생은 1896년 김구선생이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구명운동을 한 사람이 강화출신 김주경선생으로 김구선생이 감옥을 탈옥하고 1900년 김주경선생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김주경선생 동생인 김진경의 머무르면서 ‘김창수’란 이름을 김구로 개명했다고 한다. 다음에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소창의 원료인 면화와 강화도의 상징 저어새로 장식한 소창 체험관을 찾았으나 코로나 19로 운영을 중단한다는 플랭카드가 걸려 있어 이곳도 다음에 방문하기로 하였다.

 

김구선생이 방문한 대명헌이라는 한옥..

 

 

소창의 원료인 면화와 강화도의 상징 저어새로 장식한 소창체험관 외부 담장

 

평화 직물과 읍내에서 마지막까지 운영했다는 상호 직물터를 둘러보고 함께 여행을 한 고산님 강화 별장으로 돌아와 돼지불고기와 김치찌개로 식사를 하면서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하였다. 강화여행 첫 번째 코스는 소창 길을 걷는 것이지만 이곳은 소창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길과 종교이야기 길이 포함된 ‘강화 스토리 워크 길’을 두루두루 걸을 수 있었다.

 

평화 직물터..

 

 

사기..

 

읍내에서 마지막까지 운영했다는 상호 직물..

 

 

고산님 별장 앞 저수지..

 

돼지 불고기와 김치찌개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내일은 강화 산성길과 정족 산성길, 전등사, 장화리 일몰 등을 둘러볼 계획이다.

 

댓글과 아래 공감 하트 ♥ 눌러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