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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강원,제주)

강릉대도호부와 선교장 탐방(21.11.16)

by 산사랑 1 2022.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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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39코스를 트레킹 한 후 들렀던 강릉대도호부와 선교장입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

【강릉대도호부 관아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1994년 강릉 임영관지라는 이름으로 사적 지정되었다가, 2014 11 27일 강릉 대도호부 관아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건물지 유구가 양호한 상태로 다양하게 나오고 있어 고려 시대 이후 관아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건물에는 본래 공민왕이 1366(무오년)에 낙산사 관음에 후사를 빌기 위하여 왔다가 길이 막혀 열흘 동안 강릉에 머물렀을 때  ‘임영관(臨瀛館)’ 편액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객사문에 걸려 있는 편액은 1970년대에 다시 모사 제작한 것이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관아와 공해, 객사 등을 합해 모두 313칸 규모에 달하는 강릉 도심의 행정 중심공간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객사문인 임영관 삼문(국보)과 칠사당(강원도 유형문화재)을 제외하고 대부분 훼손되었다. 강릉 임영관 객사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객사문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임영관지는 1993년 이곳에 있던 경찰서의 철거로 빈터로 남아 있다가 1993 5 10일 강릉시 청사 신축 기공식 후 관상수를 옮겨심기 위하여 캐내던 중 임영관의 건물 유구가 노출됨으로써 곧 발굴조사에 착수하여 사적으로 지정하게 되었다. 현재 문화재청이 일제강점기에 의도적으로 훼손된 강릉 대도호부 관아를 2023년까지 복원에 나서기로 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등을 중심으로 재편집)

 

중문..

동헌..

동헌 옆의 별당..

국보 제51호인 임영관 삼문..

임영관 삼문국보 제51호(1962.12.20지정).

임영관은 임금이 먼 곳에 있어 직접 찾을 수 없으므로 임금을 대신한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곳에서 임금의 명을 받고 취임식, 초하루와 보름에 인사를 드리는 곳이다. <임영지>에 의하면 강릉객사는 936년 본부객사로 지정되어 임영관의 창건을 비롯해 전대청 9, 중대청 12, 동대청 13, 낭청방 6, 서헌 6, 월랑 31, (), 삼문 6칸 등 총 83 모두 83칸 정도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객사문 앞에 걸려 있는 현판은 1366년 공민왕이 친필로 쓴 것의 모사이다. 일부 전각들은 1929년 강릉공립보통학교 설립으로 인해 헐리고 지금은 객사문만이 남아 있다. 객사문은 앞면 3, 옆면 2칸의 맞배집 3문으로서 남향이며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과 옆면만 단을 두어 쌓은 기단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보수된 것이고, 초석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은 화강석으로 비교적 둥근 모양이다. 그 위에 바깥 기둥은 배흘림의 원기둥을, 건물 중앙부의 기둥은 민흘림의 44 각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맞배지붕에 장연만 사용한 홑처마집으로 고려시대 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출처 : 다음 백과를 중심으로 일부 수정)

 

중대청..

임영관 삼문 안에서 본모습..

전대청..

서헌..

좌로부터 서헌, 전대청, 동대청..

의운루..

강릉대도호부 관람을 마치고 선교장으로 이동합니다..

 

선교장】 국가민속문화재 제5.

오죽헌으로부터 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주위가 시루봉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고가옥 앞에는 얕은 내가 흐르며멀리 안산과 조산이 보이는 명당에 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 타고 건넌다” 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이 집터를 잡은 후 열화당활래정·서별당 등이 후손들에 의해 지어졌다안채·사랑채·동별당·서별당·가묘·행랑채를 비롯하여 정자까지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집의 배치는 서남향이며 전면에 긴 행랑채가 있다행랑채에는 중앙부와 동쪽 끝에 문이 있는데하나는 솟을대문이고 다른 하나는 평대문이다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서별당과 사랑채인 열화당으로 통한다사랑채 앞쪽에 차양을 가설했는데이것은 당시의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출처 다음 백과를 중심으로 재작성)

 

국내 민가주택 문화재중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대저택으로 민가주택 중 최초로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선교장..

2013.04월 개장한 선교장 유물전시관으로 갑니다..

유물 전시관

모두 330 규모의 2개 전시관에는 선교장이 300년간 소장해온 유물 7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광해군 재위 시설 완계군(完溪君·효령대군의 7대손으로 선교장을 처음 지은 가선대부 이내번(李乃蕃)의 선조)에게 하사한 말안장에서부터 고종 황제가 하사한 궁중모란도 병풍, 흥선대원군의 책가도 병풍(책거리( 일지 병풍), 1800년대 초에 제작된 8도 지도 등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희귀 유물들이 즐비하다. 추사 김정희의 친필인 ‘홍엽산거(紅葉山居)’ 현판도 만날 수 있다. 유명 서화가들의 글씨와 그림, 선교장 조상들이 대대로 받은 임금의 교지를 비롯 대나무로 만든 갓끈, 은으로 만든 도시락 함,은제 다기, 수보자기, 반짇고리, 떡시루, 도자기 접시 등 사대부가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기, 태극기, 유지솔, 유건, 망건 / 말안장, 말장식, 쌍육판, 장기판 등이 보이고..

목침, 사긱반, 소반, 문서함, 궁궐 출입증, 문관패도 등도 전시되어 있고..

갓과 갓끈, 태극기, 실패, 자, 바늘집 / 돌상차림, 설피 등도 있고..

김구 서체, 김정희의 '홍엽산거' 현판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연지와 선교장 입구에 있는 연못가에 세워진 화려한 누각 형식의 정자인 '활래정'

활래정

’활래정(活來亭)’이란 이름은 주자의 시 중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에서 집자한 것으로, 맑은 물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구한말에 세워진 이 건물은 당시에 유행하던 많은 한국 건축양식들이 대부분 반영되어 있다. 정조가 낚시를 즐겼다는 창덕궁 후원 부용정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 규모는 큰 편이다. 연못 또한 부용지와 비슷한 규모와 형태를 하고 있다. 궁궐 후원을 연상시키는 정자의 형태와 규모는 조선왕조의 질서가 무너졌던 구한말 지방부호들이 살았던 호화스러웠던 생활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활래정 누마루. 99칸의 대저택에서도 가장 화려한 부분이다. 연못에 석재 기둥을 박아 놓고 그 위에 누마루를 올려놓고 있다. 사방에 분합문을 달아 놓고 있으며, 문을 열면 사방으로 바람이 통해서 정자와 같은 느낌을 주도록 하고 있다. 연못 가운데는 봉래산이라 일컫는 섬을 조성해 놓고 있는데, 전통적인 연못과는 달리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원래 섬까지 연결되는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파노라마로 본 선교장 전경 1..

파노라마로 본 선교장 전경 2..

신선이 머무는 그윽한 집이라는 '선교유거'로 들어갑니다..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유람하는 길목에 있어 각지에서 풍류가들이 찾아와 묵었고, 방문하는 손님들을 환대해 교류의 장으로 유명해졌다.

열화당,,

열화당(悅話堂)

열화당은 남주인 전용의 사랑채로서 내번의 손자 후가 순조 15년(1815)에 건립하였으며 당호인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悅親戚之情話)에서 따왔다고 한다. 열화당은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진 누각 형식의 건물로 아주 운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전국의 학자와 풍류객들과 교류를 나누던 중사랑..

서고와 공부방으로 사용된 서별당..

서별당

서별당은 1995 11월에 건축되었다. 원래의 것은 무경의 증손인 이용구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안채와 열화당 사이의 깊숙한 곳에 위치하였는데 선교장에서 가장 높은 지대가 된다. 전주 이씨가의 서재와 서고로 사용되었으며, 석축 위 조금 높직한 기단 상부 평탄지에 안채와 같은 높이로 연결되었다. 서고는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 문을 열면 통풍이 잘되고, 마루는 여름철, 방은 겨울철의 독서실로 이용되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96년에 복원한 것이다. [출처] 강릉선교장

 

집안 살림을 살던 여인들의 거처인 연지당..

연지당

서별당 앞의 자형 건물인 연지당은 지금은 방과 마루로 되어 있지만, 최근까지도 열화당으로 통하는 통로와 곳간으로 사용되었다. 전면 남서측에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구획하는 벽돌담장과 출입문이 있어서 당시의 철저한 남녀유별 풍속을 보는 듯하다. 안쪽에는 마당이 자리하고 담장 앞에도 마당이 설치된다. 이 마당을 '받재마당'이라고 하여 이 마당에서는 안채로 들이는 밖에서 정리된 재산(금전이나 곡식)을 받아들일 때 사용되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자형으로 곳간이 연하여 있었다. 마루는 창고로 쓰이고 방은 집안 살림을 돕던 여인들의 거처로 사용하였다. [출처] 강릉선교장

 

동별당..

 

동별당

경농 이근우가 1920년에 건립한 건물로서, 안채와 연결된 별당으로서 주로 건물 주인이 거처하며 생활하던 곳이다. 생활 용도에 있어서는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하겠는데 가족들 간의 단란을 위하여 이 집에 찾아오는 많은 친척이나 외척 등 내객들과 접하는 공간으로 외부와 분리하도록 건축되었다. 즉 전주이씨 가문의 주인으로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안채에 접근된 거처이다. [출처] 강릉선교장

 

'오은고택'은 이내번의 손자인 오은처사 '이후;를 말한다..

안채 주옥..

【안채 주옥】

안채는 1748년 처음 배다리에 전주이씨 가의 삶 터전으로 개기 되면서 창축된 건물이다. 우측에 동별당, 서측으로 서별당과 이어져있는데 집의 규모에 비하여 소박한 건물이다. 안채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따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내부로 들어서면 안채 앞쪽으로 안뜰이 있고, 그 뒤로 대청과 방, 우측에 방과 부엌이 있다. [출처] 강릉선교장

 

맏아들의 신혼살림이나 작은아들이 분가 이전에 살던 곳인 외별당..

외별당은 현재 선교장 가족 숙소로 사용중입니다..

선교장의 가을 : 전통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네요..

다음은 오죽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