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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강원,제주)

오죽헌(21.11.16)

by 산사랑 1 2022.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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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대도호부 관아와 선교장 관람 후 들렀던 오죽헌입니다..

 

율곡 이이 선생 동상..

오죽헌보물 제165.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 시대에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 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고, 단종 시대에 병조 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했던 최응현의 고택으로 사용되었다. 최응현은 훗날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인 이사온(李思溫)에게 자신의 저택을 물려주게 된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조선 시대 중기의 양반집 모습을 보존한 희귀한 예로서 주심포(柱心包) 계통의 청순하고 소박한 팔작집이다. 율곡 이이의 이종사촌인 권처균(權處均)이 자신의 저택 뒤뜰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인 오죽이 자라고 있어서 오죽헌이라는 호를 지었고, 오죽헌이라는 이름 또한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오죽헌 바깥쪽에 위치한 외삼문(外三門)인 자경문(自警門)은 율곡 이이가 20세 시절에 지은 자경문(自警文)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가에는 호해정사(湖海精舍)라고 불린 사랑채가 있다. 그 외에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은 별당인 몽룡실(夢龍室)이 있는데, 이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을 때 검은 용이 나타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몽룡실 오른쪽에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았던 온돌방이 있고, 왼쪽에는 율곡 이이가 6세 시절까지 공부했던 마루방이 있다. 현재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1788년에는 정조의 명령에 따라 율곡 이이의 저서인격몽요결과 유품인 벼루를 보관하기 위한 건물인 어제각(御製閣)이 건립되었는데, 이 건물은 1975년에 진행된 오죽헌 정화 사업에 따라 북쪽으로 옮겨졌다. 옛 어제각 터에는 율곡 이이의 영정이 보관된 문성사(文成祠)가 건립되었다. 1977년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5,000원 지폐 뒷면의 디자인 소재로 사용되었으며 2006년에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5,000원 지폐 앞면에도 오죽헌 몽룡실이 그려져 있다.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의 촬영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1938년 조선문화재보호령에 의해 국가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되다가,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와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안채와 곳간채 및 사주문이 해체되었다. 1995년 오죽헌 뒤의 고택이 다시 복원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출처 ; 위키백과를 중심으로)

 

드라마 신사임당 이야기 빛의 일기 출연배우인 송승헌과 이영애의 손도장 기념석..

오죽헌 바깥쪽에 위치한 외삼문(外三門)인 자경문(自警門)은 율곡 이이가 20세 시절에 지은 자경문(自警文)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율곡은 어머니를 여의고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유학의 뜻을 두고 11년 만에 돌아왔다. 그때 강릉 외가로 와 외할머니 앞에서 '스스로 경계하는 글'이라는 의미의 자경문을 지었는데 거기서 따온 이름이다.

 

유적정화기념비...

문성사는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76년 오죽헌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율곡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문성사

문성사가 있던 이 자리는 원래 어제각이 있었는데, 오죽헌 정화 사업 때 서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지었다 한다. '문성'은 인조 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자경문과 문성사의 현판은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오죽헌으로 왼쪽 마루방은 율곡이 6세까지 공부한 방이고, 오른쪽 방은 율곡이 태어난 곳으로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율곡선생의 '격몽요결'의 글귀..

오죽헌 율곡매(천년기념물 484호)..

오죽헌 율곡매

강릉 오죽헌 율곡매(江陵 烏竹軒 栗谷梅)는)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에 있는 매실나무이다. 2007 10 8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484호로 지정되었다.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경에 이 매화나무도 같이 심겨졌다 하며,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과 율곡(栗谷)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므로 이이(李珥, 15361584)의 호인 율곡을 따서 율곡매라고 불렀다. 신사임당은 태어날 당시부터 이미 상당히 굵었을 고목 매화에 대한 추억을 살려 고매도(古梅圖), 묵매도(墨梅圖) 등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도 매창(梅窓)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율곡매는 신사임당과 이이가 아끼고 가꾸던 나무일뿐만 아니라 문화자원인 오죽헌과 함께 600여 년 동안 보호되어 온 귀중한 자연유산이라는 점에서 역사성이 깊은 나무이다. 매화의 여러 품종 중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紅梅) 종류이며, 3월 20일 전후 꽃이 필 때는 은은한 매향이 퍼져 오죽헌을 더욱 경건하게 한다. 다른 매화나무에 비하여 훨씬 알이 굵은 매실이 달리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출처 : 위키백과)

 

수령 600년이 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오죽헌의 배롱나무..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명망가 고택의 정원에서 볼 수 있는 꽃나무다. 배롱나무는 줄기가 특별하다. 여느 나무들과 달리 껍질이 거의 없어 속살을 그대로 투명하고 깨끗하게 노출한다. 그래서 선비들이 이 나무를 좋아했다고 한다. 양반처럼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싹이 돋는다고 해서 양반나무라고도 불린다. (출처 : 청주일보)

 

율곡송..

소나무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군자식물이다곧은 덕과 굳센 절개에 대하여 옛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율곡선생은 우송당기에서 이 소나무의 기이한 형상을 보니 천공(天工)의 오묘한 조화를 빼앗았다. 한참을 바라보노라면 청아한 운치를 느낄 것이다.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겨할 줄 모르는가.

 

오죽..

오죽

벼과에 속하는 검은 대나무. 원산지는 일본·중국·한국이다. 키 약 2~20m, 지름 5~8cm 정도이며, 줄기는 검다. 잎은 길이가 약 10cm 정도이며 끝은 뾰족하고 가장자리에는 잔 톱니가 있다. 꽃은 6~7월에 피고, 열매는 11월에 익는다. 줄기의 색은 처음에는 초록색이나 차츰 검정으로 변한다. 관상용으로 재배하며, 다 자란 것은 죽세공의 재료로 쓰인다. 한국에서는 신사임당의 위패가 모셔진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 주위의 오죽이 유명하다. (출처 : 다음 백과)

 

문화재 복원 계획(1996년)에 따라 옛 모습대로 안채와 바깥채를 복원해 놓았다.

바깥채 주련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겨 놓았다고 한다.

어제각을 드나드는 출입문인 운한문..

<격몽요결>과 어릴 때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어제각..

어제각

율곡 이이의 저서인 <격몽요결>과 어릴 때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의 벼루와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그것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고 하며 돌려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할 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어제각이다.

 

단풍이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고..

오천 원권의 뒷배경으로 오죽헌의 가장 멋스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강릉 귀부, 통일신라시대 무진사터 석탑재, 고려시대 석불입상,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86호)..

신사임당 동상..

신사임당

사임당 신 씨(師任堂申氏, 1504 10 29 ~ 1551 5 17)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이다.

 

외할아버지 이사 온 과,기묘사화로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리학을 교육받았으며, 아버지가 아들 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아들 이이는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 등은 문인 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친정어머니 이 씨는 죽은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고 죽은 남편에게 정절을 지켰다 하여, 1528(중종 23) 나라로부터 열녀로 표창을 받았다.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병사하였지만..

 

사임당의 형제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중에서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성리학과 글씨,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딸들 중에서도 그의 재능을 높이 본 아버지 신명화는 특히 그를 각별히 아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사임당은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일곱 살 때에는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려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특히 산수화와 포도, , 벌레 등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1522(중종 17) 8 20일 덕수 이씨의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여 사위가 처가댁에 머무는 전통에 따라 강릉에서 계속 살다가 서울로 이사했으며, 5 3녀를 두었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1537년 사임당은 이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한성부로 돌아가는 도중에 대관령 고개에 이르러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친정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시로 담았다. 이는 후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애송되었다. 신사임당은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으로 아들 이이는 삶과 죽음의 원인에 대한 의문을 품고 방황하다가 한때 불교 승려가 되기도 한다.

 

신사임당은 여성이면서도 성리학적 지식이 해박했다는 점과 아들 이이, 이우, 딸 이매창을 대학자와 화가, 작가로 길러냈다는 점 역시 사후 그가 찬탄되는 이유가 되었다. 아들 율곡이 서인의 종주이자 정신적 지주로 추대되면서 그는 부덕의 상징,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추숭 되었다. 2007년 한국 여성계의 반대와 집단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의해 50,000원 지폐의 주인공으로 전격 도안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에서 발췌)

 

오죽 대나무..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단풍..

오죽헌 뒤로 해가 넘어갑니다..

저녁은 숙소에서 돼지수육과 항정살, 그리고 막걸리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