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여행 2일 차는 해저터널, 동피랑, 서피랑 등 통영시내관광과 충렬사, 세병관 등 이순신 장군 유적지 탐방 및 연대도&만지도 섬 트레킹을 추진하였다. 순서는 해저터널 ~ 충렬사 ~ 서피랑 ~ 세병관 ~ 동피랑을 둘러보고 연대도 & 만지도 섬 트레킹을 추진하고 달아공원 일몰을 볼 예정이다..
동피랑에서 본 통영항과 미륵산..
숙소에서 바라 본 바다로 섬이 달팽이를 닮았네요..
1932년에 뚫은 해저터널로 '용문달양(龍門達陽)'은 '섬과 육지를 잇는 해저도로 입구의문'이라는 뜻이다..
【통영 해저터널】
통영해저터널은 통영과 미륵도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 해저터널이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1년 4개월에 걸쳐 만들어진 동양 최초의 바다 밑 터널로 길이 483m,483m, 너비5m, 높이 3.5m이다. 그 전의 미륵도는 밀물 때는 섬이 되고, 썰물 때는 도보로 왕래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어민의 이주가 늘면서 이동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해저터널을 만들게 된 것이다. 양쪽 바다를 막고 바다 밑을 파서 콘크리트 터널을 만든 것으로 터널 입구에 쓰여 있는 '용문달양(龍門達陽)'은 '섬과 육지를 잇는 해저도로 입구의문'이라는 뜻이다. 통영시내 당동 쪽 터널 입구에 관광안내소가 있다. 터널 내부는 포장된 경사로이며 약 483m 길이이다. 안쪽에 통영 관광 명소들에 대한 소개 판넬이 전시되어 있다. 콘크리트 구조로 약간 음침한 분위기이지만, 우리 역사의 애환을 담고 있는 장소이다. (출처 : 대한민국구석구석)
1931. 7월 착공 ~ 1932.11월 완공한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길이 483m, 너비 5m, 높이 3.5m)..
터널이 곡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해저터널 공사현장..
통영해운 변천사 및 섬 여행 등..
서피랑 공원 탐방..
【서피랑】
서피랑 공원은 통영의 명정동과 서호동의 접경 지역 중 낙후되었던 서피랑 언덕을 새롭게 개발하여 만든 곳이다. 서피랑 정상의 서포루에 올라서면 강구안, 동피랑, 북포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도심지 내 쾌적한 녹음 휴식공간 조성은 물론 통영의 고유성과 역사성을 담고 있는 근린공원인 서피랑 공원은 2020년 11월 야간 경관 조명이 설치되어 공원 산책로, 99계단, 서포루 등 일몰 때부터 자정까지 빛을 내며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낸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서는 통영에 대하여 ‘항구 가득 정박한 작은 배들과 휘황찬란한 불빛이 경이로운 신천지’로 보인다고 묘사하고 있다. 서피랑 99계단은 박경리 선생의 <김약국의 딸들>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라 더욱 소설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출처 : 대한민국구석구석)
서피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정자 서포루(동피랑에도 이와 같은 정자가 있습니다)
통영 고지도를 보면 통영이 흑색 호랑이를 닮은 것 같아 금년 흑호 해와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서피랑에서 내려다본 통영항과 미륵산..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보면서 처음에는 조용필의 노래를 표절한 것으로 오해를 했는데 착각이었다. 사실 ’’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를 치게 된 동기는 1974.8.15.1974.8.15. 일 육영수 피격사건 이후 정부에서 1975.9월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을 추진하면서 였다. 조용필 씨도 당시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방송활동이 여의치 않아 부산에 머물고 있었던 시기에 조총련계 동포의 모국방문으로 ’’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부산에서부터 인기를 얻어 조용필이 다시 서울로 입성하고 그 이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전화위복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곡인 '돌아와요 충무항에'..
【돌아와요 충무항】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곡은 1971년 통영 출신 가수 김해일이 취입한 「돌아와요 충무항에」이다. 1971년 김해일 사망 후, 1972년 조용필의 첫 음반에 통기타 반주로 수록하였으나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1976년 부산항의 이별을 내용으로 일부 가사를 바꾼 후 조용필 음반에 수록되어 인기를 얻었다. 부산광역시를 넘어 한국을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로, 일본의 엔카 가수인 아쓰미 지로 등이 번안곡을 내는가 하면 폴 모리아의 내한 때 오케스트라로 연주되기도 했다. 프로야구에서도 부산을 상징하는 응원가로 널리 쓰이는데, 롯데 자이언츠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편곡한 응원가를 사용한다. 한편 김해일(金海日)은 가수 활동 4년간 경상남도 도민들과 부산직할시 시민들로부터는 남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렸으나 26세 때였던 1971년 12월 25일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으로 사망(사고사)했다.
「돌아와요 충무항에」의 가사 1절은 “꽃피는 미륵산에 봄이 왔건만/ 님 떠난 충무항은 갈매기만 슬피 우네/세병관 둥근기둥 기대어 서서/ 목메어 불러 봐도 소식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이다. 2절은 “무학새 슬피 우는 한산도 달밤에/ 통통배 줄을 지어 웃음꽃에 잘도 가네/ 무정한 부산 배는 님 실어 가고/ 소리쳐 불러 봐도 간 곳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 1절은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이다. 2절은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해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이다. (출처 :부산역사문화대전을 중심으로 재편집)
서피랑에서 이중섭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제주 서귀포에서 이중섭의 흔적을 발견한 것보다 더 감회가 깊었다. 그런데 통영 여행 마지막 날 남망산 조각공원을 구경하고 정말 우연히 시민문화회관에서 김동욱 기중 ‘아프리카 민속가면’을 보고 있는데 내레이터 하시는 분이 설명을 해 주어서 깊이 있는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갑자기 이중섭 얘기가 나왔다. 이중섭이 통영에서 약 4년(조사 결과2년이 맞는 것 같다)을 살았고 ‘아프리카 민속가면’을 기증한 김동욱 선생의 부친인 김기섭 씨가 이중섭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그 고마움에 이중섭이 통영을 떠날 때 김기섭에게‘흰소’를 선물했다고 한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인연의 끈이 이어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서피랑에서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으로 화가 이중섭도 이 풍경의 그림을 그렸네요..
【이중섭의 통영생활】
이중섭이 1952년 늦봄에 통영에 와서 1954년 봄까지 2년 동안 통영에 머문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섭은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통영에서 활동하던 공예가 유강렬의 도움으로 통영 생활을 시작했다. 통영의 공무원 김순철은 저서 <통영과 이중섭>에서 통영 시절 이중섭과 한방에서 생활했고 전시회도 함께했던 전혁림 화백 등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중섭의 통영 체류 기간과 통영 시절 그린 작품을 밝혀냈다.
이중섭의 대표작 <흰소>와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도원>등이 모두 통영 시절 작품이다. 이중섭은 통영의 풍경도 많이 그렸다. 통영을 사랑한 이중섭은 통영을 그리고 또 그렸다. <세병관 풍경>, <통영 앞바다>, <통영 풍경>, <통영 유원지>,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충렬사 풍경> 등이 통영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다.
통영시 항남동 241-1번지, 경남 도립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이중섭은 그곳 책임자였던 유강렬의 배려로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건물에서 전혁림, 김경승, 남관 등과 함께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 등과 통영의 호심다방(=녹음다방)에서 44인 전을 열기도 했다. 성림다방에서는 개인전도 했다. 당시는 다방이 화랑 같은 기능도 했던 때다.
가히 통영 시절은 "이중섭의 르네상스"였다. 이중섭은 유강렬뿐만 아니라 통영의 화가 김용주와 초대 통영 시장 김기섭 등의 후원으로 통영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며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래서 통영을 떠날 때는 감사의 표시로 김기섭에게 자신의 대표작 <흰소>를 선물하기도 했다. 특히 통영 출신 화가 김용주는 이중섭의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이중섭에게 물감과 캔버스 등 미술 재료를 공급해주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생을 이어가는 데 필수품인 쌀과 된장, 간장, 김치 등 먹거리를 책임져 주었으니 생명의 은인이다.
이중섭은 항남동 포트극장 근처 '복자네 집'이란 술집에서 청마 유치환을 비롯한 통영의 벗들과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다 한다. 통영에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렸던 이중섭은 통영을 떠난 후 진주, 서울, 대구 등을 전전하던 중 1956년 9월 6일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간장염으로 영원한 안식을 얻었다.
이중섭이 통영에 살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미술사는 한결 초라해졌을 것이다. <소> 연작을 비롯한 그의 대표작들이 그려지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 미술계는 통영에 큰 빚을 졌다. 통영 시절의 이중섭과 교유한 김춘수는 이중섭에 대한 시를 여러 편 남긴 바 있다. 그 시를 읽으면 만날 수 없는 아내 마사코를 절절히 그리워하던 이중섭의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진다. 충무는 통영의 한때 지명이다. [출처] 이중섭의 <소> 연작 통영에서 탄생하다! / 작성자 유랑자
서피랑의 명물 중의 하나인 99계단..
99계단은 박경리 선생의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된 곳입니다(박경리 선생은 박경리기념관 편에서 별도 작성)..
99계단의 위와 아래에서 본모습..
서피랑 구경을 마치고 차량이 있는 충렬사로 되돌아갑니다..
통영 할매들 공봉례 할매는 96세로 자는듯이 가는 것이 손자에게 좋을 긴데 그것이 걱정이라고 하며,
강상연 할매는 노령연금이 죽을 때까지 나오면 좋겠다고 하네요..
동피랑 시작과 끝..
【동피랑】
동피랑은 ‘동쪽’과 ‘비랑’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긴 이름이다. 비랑은 비탈의 통영 사투리이다. 통영 시가지 동쪽에 동호동과 정량동, 태평동의 경계를 이루는 이루는 산의 바위 피랑지대에서 유래한 토박이 지명이다. 옛 통영성의 동포루가 산 정상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푸른 통영 21추진협의회는 2007년 10월 도시재생의 색다른 시선 ‘통영의 망루 동피랑의 재발견’이라는 사업을 시행했다. 이는 통영시가 동포루 복원과 공원 조성 목적으로 마을을 철거하려고 하자, 공공미술을 통한 마을 살리기 사업이었다. 마을 곳곳에 그려진 그림들과 강구안 바다 풍경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통영시의 명소가 되었다. 2008 민관포럼 최우수상, 2008 전국 마을만들기 대회 우수상 등을 받았다. (다음 백과)
뒷면이 더 보기 좋다..ㅎㅎ
나폴리에서 통영까지..
동피랑,,
벽에 난 풀이 벽화보다 더 자연스럽고 좋네요..
고래, 물고기, 게, 문어 관련 표어..
글이 참 예쁘네요..
동포루..
동포루에서 본 서포루..
동포루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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