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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영남)

통영 안보견학(21.12.29) 충렬사와 세병관

by 산사랑 1 2022.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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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여행 이틀째는 안보견학과 시내 관광, 그리고 연대도 만지도 트레킹을 하였다.

통영 안보견학은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 관련 충렬사와 세병관이 있으며, 충렬사를 구경한 후 세병관을 둘러보았다.

 

세병관 통제영..

통영 충렬사(忠烈祠)로 현판은 현종 임금이 1663년에 내린 사액 현판으로 문정공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임진왜란 중에 수군통제사로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충무공의 활동무대가 한산도를 중심으로 한 통영 근처였기 때문에 남해 충렬사(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소재)와 함께 이곳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선조 39년(1606)에 왕의 명령에 따라 제7대 이운용 통제사가 창건하였으며,현종 4년(1663)에는 남해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린 충렬사 사액을 받은 사액사당이다. 그 후에는 역대의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경내에는 본전, 정문, 중문, 외삼문, 동서재, 경충재, 숭무당, 강한루, 유물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경내에는 많은 비석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숙종 7년(1681)에60대 민섬통제사가 세운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이며 충무공 후손 통제사 비각 2동에 6기가 있고, 이운용 통제사 비각, 김중기 통제사 비각, 유형 통제사 비각 등 역대 통제사비 29개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8가지의 선물인 통영 충렬사 팔사품 일괄(보물 440호)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통영 충렬사에 내리면서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이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 위키백과를 중심으로 재작성)

 

강한루..

강한루

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 : 이충무공 8 세손)이1840년에 지은(1840) 누각으로 옛 부터 충렬사를 찾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누대에 올라 이 충무공의 큰 덕을 되새기며 동백 고목과 더불어 후원의 푸른 죽림을 자주 시제에 올렸던 영남 유수의 수영(水營) 누각(樓閣)이다. 전형적 조선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정면 세 칸,측면 세 칸의 익공식 이층 구조에 아래 층 뒤편에는 통용문인 「영모문」 현판이 걸려있으며 이층 누마루는 우물마루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연등천장을 하고 있다.

 

* 강한루의 이름 유래

강한(江漢)은 중국(中國) 호북성(湖北省)의 성도(省都) 무한(武漢)에 있는 地名이다. 무한(武漢)을 가로질러 흐르는 장강(長江)과 지류(支流)인 한수(漢水)가 합류하는 지역으로 장강(長江)에서 (),한수(漢水)(),이두자()를 취하여 강한(江漢)이라 부르며 예로부터 열국이 각축하던 삼국지의 무대이며 이름난 경승지(景勝地)이다. (출처 :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 다음 카페)

 

강한루의 영모문..

 

충무공 전서 14편의 요약해 놓은 글이라고 합니다..

명나라에서 이순신에게 내린 여덟 가지 하사품(통영 충렬사 팔사품 일괄 유물, 보물 제440호)이 전시되어 있고..

【팔사품 일괄】보물 제440호.

통영시립박물관 소장. 팔사품(八賜品)은 임진왜란 때 참전하였던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신종에게 이순신의 전공을 보고하자 신종이 이순신에게 하사한 8 15점의 물품을 말한다. 이 물품들은 도독인(都督印)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쌍을 이루어 총 15점이다. 통제영(統制營)에서 이 물품들을 보관해 오다가 1896년부터 통영 충렬사에서 맡았고 2013년 이후 현재는 통영시립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1969년에 아산 현충사(顯忠祠)가 준공됨에 따라 도독인은 모조품을, 나머지 유물들은 각기 한 벌씩을 아산 현충사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도독인은 손잡이가 달려있는 동으로 만든 도장이다. 도장을 넣은 함에는 황조어사인이라고 쓰여 있어, 중국 황제가 보낸 것임을 알 수 있고, 도장은 관방이라는 글자를 아홉 번 꺾어 새긴 것이다. 영패는 나무로 팔각형을 만들고 한쪽 면에는 영이라 새기고 다른 한 면에는 대장이라 쓴 다음 이를 표범이 그려진 사슴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었다. 귀도는 칼자루에 용머리와 귀신 머리가 장식되어 있는 칼로, 오동나무로 만든 칼집은 종이로 싸서 붉은 칠을 하였다. 참도의 칼자루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상어 껍질로 싸고 붉은 칠을 한 다음 소가죽으로 감았다.

 

독전기는 전쟁터에서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지휘관이 사용한 것으로 홍색 바탕에 남색 비단으로 독전이라 오려 붙였고 중앙에는 무릇 군사로써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목을 벤다라고 쓰여 있며, 깃대 머리에는 창이 꽂혀있다. 홍소령기는 군대의 명령을 전할 때 쓰는 깃발인데, 홍색의 비단 바탕에 남색으로 영자를 오려 붙였고 자루 끝에 창을 달았으며 이는 문관에게 영을 내리는 신호기이다. 남소령기는 홍소령기와 마찬가지로 군대의 명령을 전할 때 쓰는 깃발인데, 남색의 비단 바탕에 홍색으로 영자를 붙였고 무관에게 영을 내리는 신호기이다. 곡나팔은 구리로 만든 나팔로, 목이 구부러진 모습이라 곡나팔이라고 한다. 나팔 입은 퍼졌고 붉은 술을 달았다.(출처 : 위키백과를 중심으로 재작성)

 

 

팔사품 일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도독인으로 도독인은 작은 상자에 넣은 후 다시 큰 상자에 넣어 보관한다고 합니다..

위의 칼은 참도, 아래 칼은 귀도로 도독의 좌우에 영교(營校 - 사령본부의 장교) 2명이 어깨에 메고 서서 도독 호위에 사용하는 칼..

곡나팔과 군대의 명령을 전할 때 쓰는 깃발인 남소령기..

충무공 전서 14권..

거북선 모형..

난중일기..

난중일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 달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가 충청남도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일기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후 1795(정조 19)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전서 권 5부터5 권 8에8 걸쳐서 이 일기를 수록한 뒤로, 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엄격한 진중생활국정에 대한 솔직한 느낌, 전투 후의 기록, 수군 통제전술부하들에 대한 상벌, 가족, 친지, 부하, 내외 요인들의 내왕과 편지글 등도 실려 있어 임진왜란 연구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신변의 자질구레한 일이나 번민 같은 것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어머님을 그리워하고 부인을 생각하며 자식을 걱정하는 인간적인 내용도 담겨있다. 1962년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다. 201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됐다.(출처 : 다음 백과를 중심으로 재작성)

 

문화해설사(호는 백야)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681년에는 제60대 수군통제사 민섬이 충렬묘비(忠烈廟碑)를 세웠으며

비문은 1614년 좌의정 이항복이 지었던 여수 ‘이충무공 대첩비’의 비문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글은 우암 송시렬(尤巖 宋時烈 : 효종의 스승)이 쓰고,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 숙종조의 영의정)이 전서체로 썼다.

1695년(숙종 21) 최숙의 뒤를 이은 통제사 김중기가 숭무당을 창건했고,

통제영에서 파견한 장교 3명이 상주하면서 사우(祠宇)와 위토전답을 관리하던 곳이다.

문화해설사께서 '수복강녕' '맹산서해'란 글을 적어 충렬사 방문 기념으로 주었는데 

이중 맹산서해(盟山誓海 충무공 전서 14권에 실려있는 誓海魚龍動盟山草木知’ /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산에 맹세하니 초목도 알아주네에서 따 온 것으로 추정된다..

경충재는 충렬서원으로 지방 자재들을 교육하던 곳이다..

제70대 통제사 최 숙이 재유사(齋有司 : 관리자)를 두고 지방 청소년들에게 학문과 충의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1695년에 건립한 강당으로 충렬서원이라 불렀다. 1865년. 1867년 두 번에 걸친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이순신 사당 가운데 유일하게 존속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水國秋光募 수국추광모 / 驚寒雁陣高 경한안진고 / 優心輾轉夜 우심전전야 / 殘月照弓刀 잔월조궁도

다도해에 가을빛 저무니 / 찬바람에 기러기떼 높이 날고 / 나라 근심에 뒤척이는 이 밤/ 지는 달만 활과 칼을 비치누나..

 

 1670년에 제51대 수군통제사 김경이 동재와 서재를 지었다..

동재는 향사를 앞두고 헌관(獻官 : 제관)과 집사(執事)들이 미리 여기에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복을 차려입는 곳으로 향사를 끝낸 후 여기에서 음복(飮福)을 한다.  서재는 향사에 쓰이는 제물을 장만하고 제기(祭器)와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곳이다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충렬사,,

이순신과 한산대첩, 임진왜란의 대세를 조선으로 바꾼 최대의 인물이고 최대 전환기적 사건이다. 한산대첩은 행주대첩·진주성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며,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인 명량대첩과 노량대첩 중에서도 으뜸으로 평가받는다. 뿐만 아니라 한산대첩은 기원전 480년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1588년 영국 하워드의 칼레(Calais)해전, 1805년 영국 넬슨의 트라팔가(Trapalgar)해전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에 꼽힐 정도로 해전사에 길이 남을 전쟁으로 기록돼 있다. 일부에서는 세계 3대 해전뿐이고, 4대 해전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순신과 거북선은 미국 워싱턴의 전쟁기념관, 영국 해사박물관, 중국, 독일, 프랑스,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에 전시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 번에 걸친 왜군과의 7년 전쟁 중에 총 23번을 싸워 23번을 이겼다. 즉 23전23승이다.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영국의 외교사가인 머독(James Murdoch·1856~1921)은 한산대첩을 가리켜 "이 해전은 한국의 살라미스해전이라 할 수 있으며, 일본 침략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평가했다.(출처 : 월간산 2014. 7.23)

 

충무공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이 영정은 정형모 화백이 그린(1978) 영정으로 1991년 여기에 봉안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한 달도 안 된 5월 4~10일 첫 출전해서 옥포·합포·적진포의 세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다. 5월 29일~6월 2일 2차 출전에서도 사천·당포·당황포·율포의 네 전투에서 왜적의 선박을 모두 격침시키는 전과를 거둔다. 2차 출전 사천 전투에서 거북선을 처음 출전시켰다. 하지만 수군이 연전연패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의 심복인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구키 요시타가(九鬼嘉降)·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에게 단시일 내에 합동해 조선 수군을 격파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세 장수는 서울에서 급히 남하해 부산에서 전선을 정비한 후 해전에 대비했다. 육지에서의 승리에 들뜬 왜장들은 조선 수군을 우습게 보고 73척을 앞세워 몰아붙였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들이 도망갈 수 없도록 먼바다로 유인한 뒤 그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며 적을 포위하고 포와 화살을 퍼부었다. 적은 59척이 침몰하고 9,000여 명이 사살되는 등 14척 400여 명만이 겨우 도주하는 대참패를 당한다. 역시 이순신 장군의 대승리였다. 이 전투가 바로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한산대첩'이다. 한산도 앞바다는 아군에겐 승리의 바다였고, 왜군에게 통한의 바다, 피의 바다이자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이후 왜군은 부산포 등 안전한 포구에 주둔하게 하고 조선 수군과는 가급적 해전을 피하도록 명했다. 이순신은 모두 3차례에 걸친 출전과 10여 회의 해전으로 적을 섬멸시키는 동시에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영국의 넬슨은 군신(軍神)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제독은 오직 이순신 장군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다면 나는 일개 하사관도 못 된다"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또 "당대의 어떤 과학자가 거북선이라는 우수한 과학 병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놓고 볼 때 동서고금을 통해 이순신 장군에 비견될 인물이 그 누가 있겠는가? 죄인복을 입으면서까지 죽음으로써 조국에 최후까지 봉사하지 않았던가? 나를 이순신 장군에 비교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엄연한 모독이다"라고 덧붙였다.(출처 : 월간산 2014.7.23)

 

묵념을 합니다..

보호수인 400년 묵은 느티나무..

충렬사 동백나무..

수령 약 400년으로400 추정되는 고목으로 경상남도 지정기념물 제74호(수고 6.5m).초겨울 12월부터 진홍색 꽃이 피기 시작하여 3월에 절정에 달하는데 특히 눈 속에 필 때 더욱 아름답다.

 

동백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충렬사를 둘러본 후 기념사진을..

충렬사를 나서면서 비록 약 1시간에 걸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문화해설사이신 백야선생의 열정적인 설명으로 충렬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멋진 해설을 해 주신 백야선생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세병관

 

통영 세병관(洗兵館)은 조선시대의 객사 건물로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이었으며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조선 선조 38(1605)에 만들어졌다. 여수에 있는 진남관과 더불어 몇 안되게 남해 지방에 남아 있는 조선의 관아 건물이기도 하다.

 

통영 세병관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이였으니 만큼 삼도수군통제영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삼도수군통제영이 건설됐던 당시의 건물로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또한 통영 세병관은 현존하는 현대 이전의 한반도 목조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큰 편에 속하고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다. 통영 세병관은 여수 진남관보다는 규모가 약간 작긴 하지만 진남관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볼 만하다.통영 세병관은 1963년에 세병관이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293호로 지정되었다가, 2002년 국보 제30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출처 : 나무위키)

 

세병관 망일루..

외삼문인 망일루

광해군 3년(1611년)우치적(10)통제사가 세웠으며 영조 45년(1769년)이국현(128) 통제사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세웠다. 일명 세병문이라고도 하며 통행금지를 알리는 큰 종이 있어서 종루라고도 하였다. 소실된 것을 다시 2000년에 중건하였다.

 

수항루..

수항루(受降樓)

수항루는 22층 누각으로 통영성 남문밖에 위치하였는데, 임진왜란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서 숙종 3년(1677년)윤천뢰(58)통제사가 건립했다. 이곳은 봄가을 군점(수조때 모의 왜병으로부터 항복받는 행사를 거행해 왔다. 해안매립으로 원래의 모습을 잃어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군관과 사병이 대기하던 곳인 좌청..

좌청】 군관과 사병이 대기하던 곳으로 대변좌청이라고도 하며, 1689년 신여철(54대) 통제사가 좌청과 우청으로 분청 했다고 한다.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중군 등이 근무했던 산성청..

산성청

산성청(山城廳)은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중군 등이 근무했던 곳으로 숙종 44년(1718년) 오중주(83대) 통제사 때 건립했으나 소실된 것을 최근에 중건하였다.

세병관의 출입문인 내삼문 지과문(止戈門)..

국보 305호로 지정된 세병관..

세병관국보 제305호

통영 세병관(洗兵館)은 조선시대의 객사 건물로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이었으며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조선 선조 38(1605)에 만들어졌다. 여수에 있는 진남관과 더불어 몇 안되게 남해 지방에 남아 있는 조선의 관아 건물이기도 하다.

 

통영 세병관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이였으니 만큼 삼도수군통제영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삼도수군통제영이 건설됐던 당시의 건물로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또한 통영 세병관은 현존하는 현대 이전의 한반도 목조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큰 편에 속하고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다. 통영 세병관은 여수 진남관보다는 규모가 약간 작긴 하지만 진남관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볼 만하다.통영 세병관은 1963년에 세병관이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293호로 지정되었다가, 2002년 국보 제30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출처 : 나무위키)

본영군은 통제사가 제반의전을 치르던 중심 영역으로 통제영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전면에 내삼문인 지과문. 외삼문인 망일루. 백화당으로 통하는 협문과 뜰안에는 석인. 기삽석통이 있고 좌측에는 백화당과 잉번청이 자리하고 있다.

 

석인..

석인

숙종 27년(1701년) 류성추(77)통제사 때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과정에서 석인 5기가5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시삽석통

시삽석통(旗揷石桶)은 세병관 앞 뜰에 영기와 장군기를 세우기 위해 깃대를 고정하는 커다란 두 개의 돌기둥으로 정조 10년(1786년)류진항(142)통제사가 세웠다. 원래는 두기가 있었으나 현재 서쪽 1기만1 남아있다.

 

12 공방이 있고..

중국사신 등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청인 백화당..

백화당

백화당(百和堂)은 선조 36년(1603년) 이경준(6대)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중국 사신 등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청인데 비장은 지방장관 및 중국 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민정의 염탐과 같은 업무를 맡았고 지방장관이 임명했다.

 

위쪽 좌로부터 공내헌 / 화자방, 아래 좌로부터 총방&입자방 / 화원방..

공내헌

공내헌은 공방을 관리하던 공감의 집무실을 말한다. 12 공방은 제반군기와 진상품을 생산하던 곳으로 백화당 서쪽에 자리하며 조직적인 분업의 군영공방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1593년 이순신이 한산진에서 시작했으나 임진왜란 후 통제영이 창성하자 크게 번창하여 다양한 생활용품을 생산하였다.

 

화자방은 신발을 만들던 곳이고 안자방은 말안장을 만들던 곳이다.

총방은 말총을 엮어 망건. 탕건. 유건 등을 만들던 곳이며, 입자방은 흑립이나 벙거지. 삿갓. 패랭이 등을 만들던 곳이다.

화원방(畵員房) 각종 지도 및 군사적 목적의 의장용 장식화를 그렸던 곳이다.

 

물을 저장하여 자개 등을 갈고닦는 등의 작업을 하던 석수조..

상자방..

상자방

상자방(箱子房)은 버들나무 등을 엮어 상자를 만들던 곳이나 현재는 염장(대발) 공방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염장 기능보유자 조대용(114호)이 일을 하는 공방으로 염장이란 발을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자개를 붙여 나전 제품을 만들던 곳인 패부방..

통제영 공방의 건물이나 물건 등을 지키는 사람이 근무하던 잉번청..

잉번청

잉번청(仍番廳)은 숙종 14년(1688년) 이세선(66대) 통제사가 건립했으며, 통제영 공방의 건물이나 물건 등을 지키는 사람이 근무하던 곳이다.

 

둘레는 5m로 수령은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통제영 창건 당시 심어졌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