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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고궁 봄나들이 2탄 덕수궁(22. 4. 3)

by 산사랑 1 2022.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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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여 행궁[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궁궐의 모습을 갖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특히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규모는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지금의 3배 정도 되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 대화재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으며,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머물렀다. 덕수궁은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수양벚꽃이 만개한 덕수궁 석조전..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정문..

중화문

1902년에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만들어 세웠으며, 본래 중화문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 있다.(출처 ; 문화재청)

 

중화전 행각..

고종이 정전으로 사용한 중화전

중화전中和殿(中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중화전 올라가는 계단에 있는 것으로 용이 새겨져 있다/ 중화전에 있는 어좌..

석조전 앞에 있는 수양벚꽃이 만개하였습니다..

덕수궁에도 봄이 왔음을 알려주네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전..

석조전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축물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고,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다. 고종은 고관 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石造殿)을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7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1950년에는 유엔 한국 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009년 문화재청에서 석조전을 1910년 준공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 공사를 진행하여 2014년에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개나리도 활짝 피어 있고..

수문장 교대를 한 방병들이 숙소로 돌아가고 있네요..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정관헌..

정관헌

정관헌(靜觀軒)은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습니다. 또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정관헌 앞쪽에 진달래가 만개하고..

석어당 앞쪽에 있는 살구나무꽃이 핀 곳에 고운 자태의 여인이 눈에 띄네요..

작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살구나무꽃이 곱게 피었고..

좌측부터 준명당, 죽조당 그리고 석어당..

즉조당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하였으며, 이때 즉조전의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 이후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에 소실되었던 즉조당은 그 해에 석어당, 준명당과 함께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다. 이곳은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이기도 하며,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석어당과 만개한 살구나무꽃..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 갔다 환도한 후 거처하였던 석어당..

석어당

석어당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며,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 갔다 환도한 후 거처하셨던 곳이자 1608년 2월 승하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시켰던 곳,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석어당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건물이다.(출처 ; 문화재청)

 

중화전을 다시 잠시 들러보고 덕수궁을 나오니 수문장 교대식 행사가 거행되고 있었다..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앞쪽이 공사 중이라 덩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덕수궁 왕궁수문장교대식은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궁성문 개폐의식, 궁성 수위의식, 순라의식 등을 기록 자료를 바탕으로 1996년부터 재현하고 있는 행사로 교대의식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루 3회(오전 11시, 오후 2시, 3시 30분), 순라행렬은 하루 1회(오전 11시 교대의식 후) 진행된다.

북(?)을 치고..

취타대에서는 간간히 소북도 두드리고..

행사가 끝나고 이동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