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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고궁 봄맞이 1탄 경복궁(22. 4. 3)

by 산사랑 1 2022.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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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 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맛보시기 바란다. (출처 ; 문화재청)

 

북악산을 배경으로 향원정이 맛깔스럽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홍례문(興禮門 - 興禮 : 예를 일으킨다)

일곽의 가운데에는 백악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가 있고, 어구의 중앙에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어구(御溝)는 경복궁 뿐만 아니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에도 있으며, 고려 궁궐, 중국의 궁궐, 베트남의 궁궐에도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궁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구와 영제교는 근정문(勤政門 - 勤政 : 정치를 부지런히 함)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조회 시에 신하들이 도열할 위치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했다. (출처 ; 문화재청)

봄 나들이 나온 여인들의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영제교 남쪽에서 바라본 북악을 등지고 있는 근정문..

근정문(勤政門 - 勤政 : 정치를 부지런히 함)

근정문에서는 왕과 문무백관이 조참의식(소조회)를 행하였다. 또는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 번째 왕이다. 근정문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영제교의 북쪽으로 정 2품 이상이 서고, 남쪽으로는 정 3품 이하가 자리를 잡았다. (출처 ; 문화재청)

 

영제교 부근의 매화..

유화문(維和門 - 維和 : 維는 어조사, 和는 온화함) : 신료들이 서쪽 궐내각사와 빈청을 드나들던 문이다.

조하를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의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던 근정전/ 근정전 내부의 어좌..

근정전(勤政殿-勤政 : 정치를 부지런히 함)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다.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조회의식)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大禮) 또는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정전인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중요 행사를 치를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사정전으로 들어가는 사정문..

왕이 신하들과 일상으로 정사를 논의하던 편전인 사정전

사정전(思政殿 - 思政 : 선정(善政)을 생각함)

편전(便殿)은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이다. 또 종친, 대신들과 함께 주연을 즐기고,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한 곳이다. 경복궁의 편전 영역은 사정전(思政殿 - 思政 : 선정(善政)을 생각함)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정전(勤政殿 - 勤政 : 정치를 부지런히 함) 영역으로 통하는 사정문과 침전영역으로 통하는 향오문 사이에 사정전, 만춘전(萬春殿 - 萬春 : 만년의 봄, 오랜 시간 국가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 천추전(千秋殿 - 千秋 : 천년의 가을, 국가 기틀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이 남향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행각이 감싸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만년의 봄을 의미하는 만춘천(위)/ 천년의 가을을 뜻하는 천추전(아래)..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양의문으로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강녕전(康寧殿 - 康寧 : 편안하고 건강함)

사정전을 뒤돌아 가면 행각에 연이어 있는 향오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내진연)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침전이다. (출처 ; 문화재청)

 

교태전(交泰 : 천지, 음양이 잘 어울려 태평을 이루다) / 왕비의 침전

세종 때에 임금이 오래 머물 곳이라 하여 규모를 크게 하여 고친 후 온돌을 수리하는 도중 화재가 발생하는 등 세 차례의 화재를 당하였다. 역시 경복궁 중건공사 때 다시 세워졌으나 1918년 창덕궁의 침전이 소실되자 그 목재를 조달한다는 목적으로 헐렸으며 1920년 창덕궁의 희정당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지금의 강녕전은 1995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강녕전의 공간 구성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 넓은 월대를 꾸민 것이 특징이다. 이 월대는 의례를 행하는 공간으로 내진연, 외진연 등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잔치 때에는 주변에 보계(補階)를 설치하여 보조하기도 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산수유가 곱게 피어 있는 교태전 후원 아미산..

아미산

아미산에는 다양한 화초를 심어 화계를 꾸미고 교태전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가 빠져 나갈 수 있는 굴뚝을 세웠다. 또한 호수나 연못을 상징하는 모양의 석함(石函)을 두어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을 조성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불교 행사가 자주 열렸던 함원전..

고종의 양어머니인 신정왕후가 거처하던 전각인 자경전..

자경전[慈慶殿 - 慈慶 : 자친(어머니)이 복을 누린다]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자경전[慈慶殿 - 慈慶 : 자친(어머니)이 복을 누린다]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건물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44간의 규모로 지어진 이 건물은 온돌방으로 꾸며진 복안당과 자경전, 동남쪽의 청연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연루의 동측으로 협경당(協慶堂 - 協慶 : 함께 복(경사)를 누린다)이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 남쪽으로 행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여자들이 여닫기 쉽게 가벼운 당판문으로 된 만세문(萬歲門 - 萬歲 : 긴 시간)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자경전 십장생 굴뚝..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 무늬와 당초문, 그리고 박쥐문을 정교하게 새겨 넣어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조형미를 보여주는 굴뚝, 기존의 담장에 기대어 쌓아 흡사 담장의 일부처럼 보이게 한 재치도 돋보인다. (출처 ; 문화재청)

향원정과 건청궁으로 갑니다..

경복궁에서 가장 운치가 있는 향원정과 취향교입니다..

향원정과 취향교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인공의 섬을 만들어 2층의 육모지붕을 얹은 정자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 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가는 섬에는 나무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라 하였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 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물가에는 멋진 소나무들도 있어 운치를 더 합니다..

물에 반영된 모습도 아름다운 향원정과 취향루..

정말 향원정 뜻과 같이 향기가 퍼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진달래도 곱게 피어 운치를 더합니다..

북악을 배경으로 정말 잘 어울립니다..

향원지의 근원이 된 열상진원 샘..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은 건천정..

건천궁

경복궁이 중건되고 5년이 지나서 고종 10년(1873년)에 와서 지어진 건물이다. 경복궁에서 가장 북쪽 한적한 곳에 위치한다.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앞에는 향원지라는 큰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정자를 꾸몄다. 건물은 민간 사대부 집의 형태를 따르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치장을 가미하여 지었다.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坤寧閤 - 坤寧 : 땅이 편안하다),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서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키는 구성을 하였다.

 

담장에는 벽돌을 이용해서 아름다운 꽃무늬를 꾸몄다. 고종은 이곳을 좋아하여 왕비와 함께 자주 머물렀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지 않을 때에는 역대 임금의 초상화를 모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가롭게 휴식할 목적과는 달리 이 건물은 조선말기 정치적 혼란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들을 접견하면서 여러 정치적인 문제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 사이에 서재인 관문각은 러시아인에 의해서 2층 벽돌조 건물로 개조되기도 하였다. 궁 안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1895년 일본인들이 궁궐을 습격해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이 건물 곤녕합의 누마루인 옥호루(玉壺樓 - 玉壺 : 옥으로 만든 호리병)였다. 이 사건 이후 건물은 한 동안 방치되었다가 철거되고 말았으며, 2006년에 와서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왕이 사용하던 장안당..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곤녕합의 누마루인 옥호루(玉壺樓 - 玉壺 : 옥으로 만든 호리병)..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

자선당

자선당은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 철거에 앞장섰던 오쿠라가 일본의 자신의 집으로 옮겨서 ‘조선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설 박물관으로 사용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이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자리에 오쿠라 호텔이 들어섰다. 호텔 정원에 버려져 있던 기단과 주춧돌은 1995년에 경복궁으로 다시 돌아 왔으나 화재로 인해 훼손되어 자선당 복원 때 쓰이지 못하고 건청궁 동편 녹산에 보존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서재인 관문각터..

장안대 건물 뒤로 북악이 보이고..

중국식 양식인 집옥재, 그리고 협길당, 팔우정 이 3채의 건물은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이 3채의 건물은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옮겨온 것이다. 고종은 이 건물들을 어진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사신 접견장으로 사용(1893년 한 해에만 영국, 일본, 오스트리아 등 외국 공사들을 다섯 차례 접견)하였다. 이 3채의 건물은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신식이라고 생각되던 중국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집옥재(集玉齋 - 集玉 : 보배를 모으다)의 현판을 송나라 명필인 미불(米連, 字 元章)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중국풍으로 만든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출처 ; 문화재청)

 

젊은 사람들만 한복을 대여하는 것이 아닌 가 봅니다..ㅎㅎ

청와대 앞쪽에 있는 신무문..

신무문 神武 : ’뛰어난 무용(武勇)‘ ’신령스러운 현무(玄武)‘

신무문은 궁성의 북쪽 문으로 북쪽 궁성이 마련되고 나서 세워진 것이다. 신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성종 6년(1475)이다. 신무문 쪽은 인적이 드물었으나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해 놓은 회맹단이 있어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이 있는 회맹제에 참석할 때에는 이 문을 이용하였다. 또 영조 때에는 숙빈 최 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경복궁터를 길로 삼았는데, 이때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다. 신무문은 건춘문과 규모가 동일하며 현재의 문은 경복궁 중건 시 건립된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신무문에서 본 청와대로 금년 5월이면 국민에게 돌려준다고 합니다..

신무문을 나와 궁성을 따라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가는 길에 꽃봉오리를 피운 백목련의 고운 자태를 봅니다..

궁성 안쪽으로 벚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궁성

궁성은 궁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장을 이른다. 경복궁의 궁성은 1398년(태조7)에 동쪽, 남쪽, 서쪽이 조성되었으며, 이때 궁성문인 건춘, 광화, 영추문도 세워졌다. 이 보다 뒤에 북쪽 담장이 완성되고 북문인 신무문도 갖추어졌다. 궁성은 거의 네모난 형태를 이루고 있고 전면 좌우 끝에는 각루(角樓)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다. 경복궁의 궁성은 임진왜란으로 궁궐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에도 일반 백성들로부터 궁궐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고종 년간 경복궁 중건 시 궁성이 새 단장을 하게 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앞부분이 헐려 나가고 또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다. 현재의 궁성은 그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쌓은 것이고, 일부는 본래 위치보다 안으로 들여 쌓은 상태이다. (출처 ; 문화재청)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광화문光化 : 군주에 의한 덕화(德化)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 데 사용하였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또한, 광화문 홍예 개판에는 ‘사령(四靈)’인 기린, 봉황, 거북이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1968년 광화문 복원 시 그려진 것을 현황 모사한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광화문의 홍예문에서 홍례문과 북악이 보이고/ 수문장이 교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