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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남한산 행궁(23. 8.19)

by 산사랑 1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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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 행궁..

남한산 행궁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 하였으며, 1624년(인조 2) 9월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건립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다른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행궁의 규모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이다. 상궐은 행궁의 내행전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평면적 180.4㎡(55평)이다. 그중 왕의 침전인 상방이 좌우 각각 2칸씩이고, 중앙의 대청이 6칸, 4면의 퇴칸이 18칸으로 모두 28칸이다.

 

행궁은 한양도성을 임시로 대신할 용도로  건립되었고 병자호란 때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행궁 및 부속시설은 인조 이후 건립된 것으로 19세기 초까지 계속 증축, 보수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0여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약 30,000㎡ 부지에 상궐, 하궐로 나뉘는데 정자, 좌전, 광주 유수의 집무사, 외행전, 임금의 처소인 내행전, 정문인 한남루 등이 있다. 행궁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행궁 매표소를 거쳐야 한다.(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삭 등에서 발췌)

 

남한산 산행을 마치고 수어장대에서 행궁으로 하산을 한 후 행궁을 둘러 보았다. 행궁은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으로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 까지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1626년 건립되었다. 실제 인조 2년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을 한 곳이다. 남한산성행궁은 우리나라 행궁 중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곳이다.

 

산행 하산 시 본 종묘..

남한산성 좌전은 종묘사직의 역할을 하는 곳으로 조선 역대 임금의 위패를 봉안하는 종묘를 축소하여 만든 곳이고, 우실은 사직을 대신하는 곳이다. 좌전과 우실 모두 정면에 맞배지붕의 삼문을 설치했고 판장문에는 문살을 설치하여 혼백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는데 좌전과 우실은 모두 정면 5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두 건물 모두 종묘의 정전과 사직과 유사한 구조이며 크기만 축소된 형태이다. 현재의 건물은 모두 복원되어 다시 지은 것이다.(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행궁 안에서 본 종묘..

행궁입구의 이층누각인 한남루..

한남루는 1798년(정조 22년) 광주부 유수로 재임하던 홍억이 행궁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작은 외삼문에 불과하여 이를 초라하다고 하여 다시 웅장한 형태로 건립한 것이며 팔작지붕에 2층 구조의 누문이다. 한남루를 지은 기록에 의하면 한강 남쪽에 있는 성으로 들어가는 누문이라는 의미로 작명되었으며 정면과 후면에 8개의 기둥에 주련이 걸려있다. 한남루 1층은 대문으로 3개의 판장문이 달려있고 우측 후면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설치했다. 2층에는 난간을 달았고 지붕에는 양성바름을 하고 처마에 잡상을 올렸다(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외부에서 본 한남루..

행궁 안에서 본 한남루..

남한산성 행궁 전시설..

 왕이 신하와 함께 업무를 보는 외행전..

외행전은 팔작지붕의 웅장한 건물로 조선의 임금이 집무를 보던 곳이며 건물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 전체 28칸의 건물이며 1625년(인조 3)년에 준공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외행전에서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궤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청나라 군사가 쏜 포탄이 외행전의 기둥에 맞아 인조가 피신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평소 외행전은 강화유수의 치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201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다. 지붕에는 양성바름을 했고 처마에는 잡상을 올렸다.(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외행전에서 행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행궁 하궐에 있는 광주부 유수가 사용하던 일장각..

일장각은 남한산성 행궁 외행전 우측에 있는 건물로 강화부 유수가 거처하는 건물이었다. 일장각은 1829년(순조 29)에 광주부 유수 이지연이 건립하였으며 이후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2010년에 새롭게 지었다 일장각은 자연석을 다듬은 1단의 기단을 설치했고 그 위에 팔작지붕집을 지었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우측에 대청마루가 있고 좌측에 온돌방이 있다. 마당 우측으로 출입문인 협문을 두었으며 일장각이라는 명칭은 남한산성 수어장대가 위치하고 있는 청량산의 다르게 부르는 이름으로 일장산에서 따온 명칭이다.(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광주부 유수의 집무용 건물인 좌승당..

좌승당은 광주부 유수가 집무를 보는 용도의 건물로 1817년(순조 17)에 광주 유수 심상규가 건립했다. 하지만 화재로 소실되어 터만 남았던 것을 2010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좌승당(坐勝堂)이라는 명칭은 뛰어난 계책이 있으면 편안하게 앉아서도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전해진다. 좌승당을 건립할 당시 건물터를 마련하기 위해 내행전과 북행각 사이에 있던 담장을 헐어 북행각을 옮기고 뒷담장을 넓혀 좌승당을 지었다고 전해진다.(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활을 쏘기 위한 정자인 이위정

행궁 밖에서 본 이위정 모습.

이위정은 남한산성 행궁 좌승당 뒤편 후원에 있는 정자로 순조 17년인 1817년 광주부 유수였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다. 당시 정자를 세울 때 이위정기 기문이 전해지는데 심상규가 글을 짓고 추사 김정희가 글씨를 썼다. 이위(以威)라는 말의 의미는 활을 쏘는 것은 천하를 위협할 수 있지만 활이 아니더라도 인의와 충용으로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자는 자연석을 다듬은 1단의 기단을 깔았으며 규모는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난간을 달았고 기둥은 사각형이고 도리와 처마에는 단청을 칠했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이위정에서 본 내정전의 바깥 모습..

이위정에 있는 멋진 소나무..

왕의 거처인 내행전..

남한산성 내행전은 조선의 임금이 왕궁을 떠나 남한산성으로 행차하여 머무는 행궁에서 잠을 자는 거처로 인조 2년에 지어졌다. 이후 내행전에 화재가 일어나 전소되었다가 2002년에 다시 지었다. 내행전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 전체 28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었고 좌우에는 2칸씩은 온돌방과 마루방을 두었다. 3면에 작은 마루가 있는 퇴칸을 두었고 둥근기둥에 공포는 이익공이며 단청을 칠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임금의 거처답게 용과 봉황문이 새겨진 막새기와를 사용했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왕이 집무를 보던 곳..

한남루로 나갑니다..

 행궁의 객사건물인 인화관을 개방했네요(23. 6.17일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