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일본 북알프스
서울,경기지역

남한산(23. 8.19) 8월 단상

by 산사랑 1 2023. 8. 26.
반응형

【남한산성 산행(2023. 8. 19일 금요일)】인기 백대명산 제95위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으로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 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官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 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 22) 한 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官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 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남한산 남문인 지화문..

건강셀프등산회 제895차 산행으로 계곡이 좋은 남한산이 추진되었다. 오늘 회원님들이 병원예약, 조문, 약속 등으로 산행이 여의치 않아 혼자 남한산을 일주하였다. 산성은 곳곳이 보수중이었고, 섭씨 32도의 폭염속에서 약 5시간의 산행을 하였다. 무더위 속의 산행으로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힘은 들었지만 모처럼 혼자만의 산행으로 사색을 하면서 걸을 수 있었고 기분이 아주 상쾌하였다. 산행을 마치고 행궁을 둘러 보면서 전쟁이 많았던 시대의 민초들의 힘든 삶도 조금은 느껴 보았다..

 

 산행은 남문유원지 입구 ~ 남문 ~ 동문 ~ 북문 ~ 서문 ~ 종로로 진행하였으며, 약 5시간이 소요되었다..

남문유원지에서 남문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본 모습들(계곡에 물이 흐르고, 약수터물은 음용부적합이라 합니다)

일월비비추..

남문을 지나 동문으로 진행합니다..

복원이 완료된 옹성..

《옹성》 

옹성은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경사가 완만한 지역의 성문 밖에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 성벽으로 총 5개(동문, 북문 각 1개, 남문 3개)가 있다. 제2남옹성은 둘레가 318m로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복원된 남장대터(우측) 앞의 제2옹성 멀리 검단산이 조망되고..

암문과 바깥쪽에서 본 모습..

복원 중인 옹성치..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술이 특이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일조를 하였다..

동문가는 길에서 본 망월사 절..

동문 맞은 편에 있는 제11암문으로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300여명이 순교했다고 합니다..

비가 내려서 멋진 소폭포가 만들어졌네요..

동문입니다..

성곽이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하고..

남한산의 성곽길은 성곽 축성술이 특이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일조를 하였다..

황진이가 심명한 불도를 설법하여 이에 감명받은 기생 하나가 자괴하여 투신자살한 지역인 송암정 앞에 있는 生과死의 나무..

소나무들이 멋지게 도열하고 있는 이런 성곽길을 걷는 것 자체가 힐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장경사 절이 있는 곳..

장경사 신지옹성..

벌봉으로 가는 길이 보이는 곳으로 이곳은 여전히 복원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벌봉으로 가는 제3암문으로 이곳은 현재 공사중입니다..

하남시의 공장지대가 보이고..

제4암문입니다..

성곽 옆으로 소나무들이 무성합니다..

성곽 밖의 최고의 소나무..

성곽 안과 밖의 멋진 소나무들..

성곽 안의 멋진 소나무..

북문은 현재 대대적인 공사중입니다..

서문입니다..

야경의 명소인 서문전망대와 전망대에서 본 모습..

바깥쪽에서 본 서문..

수어장대의 보호수인 향나무가 담을 뚫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어장대 옆에 있는 소나무..

5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수어장대입니다..

수어장대에서 남한산 행궁으로 가는 길의 멋진 소나무들..

버섯들도 여기저기에서 보입니다..

남한산성 행궁은 다른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남한산성 좌전은 종묘사직의 역할을 하는 곳으로 조선 역대 임금의 위패를 봉안하는 종묘를 축소하여 만든 곳이고, 우실은 사직을 대신하는 곳이다. 좌전과 우실 모두 정면에 맞배지붕의 삼문을 설치했고 판장문에는 문살을 설치하여 혼백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는데 좌전과 우실은 모두 정면 5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두 건물 모두 종묘의 정전과 사직과 유사한 구조이며 크기만 축소된 형태이다. 현재의 건물은 모두 복원되어 다시 지은 것이다.(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남한산 행궁입니다..

남한산 행궁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 하였으며, 1624년(인조 2) 9월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건립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다른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행궁의 규모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이다. 상궐은 행궁의 내행전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평면적 180.4㎡(55평)이다. 그중 왕의 침전인 상방이 좌우 각각 2칸씩이고, 중앙의 대청이 6칸, 4면의 퇴칸이 18칸으로 모두 28칸이다.

 

행궁은 한양도성을 임시로 대신할 용도로  건립되었고 병자호란 때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행궁 및 부속시설은 인조 이후 건립된 것으로 19세기 초까지 계속 증축, 보수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0여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약 30,000㎡ 부지에 상궐, 하궐로 나뉘는데 정자, 좌전, 광주 유수의 집무사, 외행전, 임금의 처소인 내행전, 정문인 한남루 등이 있다. 행궁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행궁 매표소를 거쳐야 한다.(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삭 등에서 발췌)

 

행궁으로 들어가는 행궁입구의 이층누각인 한남루..

남한산 행궁(입장료 1,000원)은 별도 소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