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일본 북알프스
해외여행/백두산(23)

백두산 1일차(2-1)/(23. 9. 2/토) 인천 ~ 심양 ~ 집안 ~ 통화이동/광개토대왕비 & 능

by 산사랑 1 2023. 9. 13.
반응형

광개토 대왕릉..

인천에서 선양(선양) 가는 비행기는 08 : 05분 출발 08 : 55분(중국시간/ 1시간 시차) 도착할 예정으로 08:22분 이륙하여 중국시간 08 :45분 착륙했다. 이제부터 중국시간으로 작성하며, 수화물을 찾고 통관절차를 마치고 10:20분 버스에 탑승 집안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간 현지 가이드는 식당에서는 찬물을 먹지 말라.. 예전 봉천이 심양이다. 점심 식사 장소인 집안까지는 2시간이 소요되고 그곳이 누루하치 고향이다. 동북삼성이 닭머리 부분이고 요령성, 흑룡강성, 길림성을 뜻한다.

 

동북산성

중국의 최동북쪽에 위치한 지린성[吉林省]·랴오닝성[遼寧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 등 3성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중국의 대표적인 낙후지역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총면적은 79만㎢(중국 전체의 8.2%), 인구는 1억 595만 명(중국 전체의 8.3%)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둥베이삼성 [東北三省(동북삼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동 중에 보았던 심양의 강..

심양은 중공업 도시였는데 지금은 남쪽 지역으로 중공업이 이전되어 많이 쇠퇴하고 있다. 장작림이 공업지역이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곳이다. 여순 대련은 러일전쟁 지역이다. 일본이 만주사변 이후 심양을 공업도시로 만들었다. 최근에 들어서 경제가 침체되고 있다. 현재는 중공업이 남방지역으로 진출하고 있다. 현재 심양은 경제적으로 조금 낙후되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청의 누루하치가 수도로 삼은 곳이다. 고구려는  졸본에서 집안으로 천도한 후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였고, 환도산성 수도는 평지성과 산성이 있다.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을 포함 두 개의 능만 확정되었지만 장수왕릉은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집안쪽에 고구려 벽화가 남아있다. 

 

놀이동산 같네요..

휴게소에 잠시 쉬어 가는데 화장실은 무료였다..

백두산은 89년부터 여행이 시작되었고 현재는 트레킹이 금지되었다. 11시 무순을 통과하는데 이곳은 노천탄광이 유명하다고 한다. 11:50분 휴게소에 들렀는데 화장실은 무료인 점이 왼만한 국가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중국의 땅은 국가 소유인데 농민들에게 무료로 땅을 제공하는데 농사를 지어야 되며. 농사를 짓지 않으면 몰수한다. 그래서 농부들은 옥수수를 많이 심고 도시로 나가서 일을 한다. 그래서 중국에 옥수수가 많은 이유라고 한다. 집안은 후금 당시 수도였고 여기에 조선족 학교도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이민족 거주지가 11퍼센트를 넘으면 자치구가 된다.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조선족이 약 3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옥수수가 많이 심어져 있습니다..

가이드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12:03분 요녕성으로 들어와 현지식으로 식사를 했는데 의외로 맛이 있었다. 식당에는 만주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생활용기들이 있었다. 식사 후 13: 30분 출발하였으며, 집안까지 약 2시간 소요된다고 한다. 들녘에는 옥수수를 볼 수 있고 집들이 단층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골에는 약 20퍼센트의 주민만 살고 있고 나머지는 도시로 나가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고속도로는 2019년 뚫렸다고 하며 속도제한이 있었다. 버스는 80km, 택시는 110km라고 하며, 새벽 2시에서 5시까지는 차량운항을 통제한다고 한다. 15시 집안을 지나 북한 지역의 산들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 아래 압록강이 흐른다고 하며, 남포시라고 한다. 광개토태왕릉으로 가는데 능은 방형이라고 한다.

 

점심식사를 한 현지 식당입니다..

현지식 점심식사가 의외로 우리 입맛에 잘 맞습니다..

만주족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는 생활용기들입니다..

집은 단층이고 들녘에는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골뚝 너머가 북한땅입니다..


처음 방문한 곳은 광개토 대왕릉비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사방을 유리로 막아 놓았고 유리 안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고 있다. 광개토 대왕릉비를 둘러본 후 이근에 있는 광개토 대왕릉으로 이동을 하였다. 광개토 대왕릉은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었는데 중국은 유물은 잘 관리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존한다고 한다. 석실묘 내부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고 있었으며, 뒤쪽으로는 북녘 땅이 보였다.

 

광개토 대왕릉비..

비는 유리로 보호되어 있습니다..

화강암 대석 위에 세운 비는 높이 6.39m, 무게는 37톤에 달하고. 한 면이 1.35~2m에 달하는 사면체 응회각력암에 총 44행 1,775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광개토 대왕의 동상도 세워져 있고..

총 44행 1,775개의 비문의 내용을 외부에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계 문화유산 광개토 대왕릉비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광개토 대왕(재위 391~413)의 업적을 기리고자,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세웠다. 화강암 대석 위에 세운 비는 높이 6.39m, 무게는 37톤에 달한다. 한 면이 1.35~2m에 달하는 사면체 응회각력암에 총 44행 1,775개의 글자를 어른 주먹만 한 크기로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머리에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부터 광개토 대왕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고구려가 계승 · 발전되어 왔는가를 소개한다. 두 번째 부분은 광개토 대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세 번째 부분에는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의 출신지와 차출 방식 및 수묘인의 매매 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새겨 놓았다. 그러나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사방을 유리로 막아 놓아서 자세히 관찰하긴 어렵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광개토 대왕릉비는, 인위적으로 다듬어 규격이 딱 떨어지는 비석이 아니라 더 웅장하고 자유로운 기개가 돋보인다. 그 자연스러운 형태에서 고구려인들의 자유롭고 호방한 기질을 엿볼 수 있다.(출처 : '인조이 중국(2020 개정판)

광개토 대왕릉..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광개토 대왕릉비에서 북서쪽으로 300m 떨어져 있다. 거대한 자갈 무더기가 쌓여 있고 주위에 화강암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원래는 장군총처럼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석실묘였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장군총보다 4배 컸을 것이라고 한다.

무덤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태왕의 능이산처럼 평안하고, 큰 산처럼 굳건하길 기원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태왕(太王)’이란 칭호는 광개토 대왕을 가리키므로, 광개토 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2003년 중국이 능을 조사하면서 발견한 청동 방울이 이런 추정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방울의 몸체 사방에 ‘新卯年(신묘년)’, ‘好太王(호태왕)’, ‘所造鈴(소조령)’, ‘九十六(구십육)’이라고 3자씩 문자가 적혀 있었다. 이 글을 해석하자면 ‘신묘년(391년)에 호태왕이 96번째 은방울을 만들었다.’라는 뜻으로, 신묘년은 광개토 대왕이 재위했던 해다..(출처 '인조이 중국(2020 개정판)

장군총처럼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석실묘로 사진 촬영은 못하게 하더군요..

광개토 대왕릉에서 떨어져 나온 기단석들..

뒤쪽 산이 있는 곳이 북녘 땅입니다..

 

광개토 대왕릉을 둘러본 후 장수왕릉(장군총)으로 이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