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호로고루】
호로고루(사적 제467호)는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에 접한 현무암 천연절벽 위에 있는 강안평지성(강가 언덕 위의 평지에 세워진 성)이다. 호로고루는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당리에서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현무암 단애 위에 조성되었으며, 남한지역에 얼마 되지 않는 고구려 유적으로서 발견 당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 성은 고구려가 남진을 하기 위해 육로로 내려오는 최단 코스로 남진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며, 성을 접해 흐르는 임진강과 주변의 풍광이 어우러져 신성한 면모마저 보이고 있다.
호로고루의 어원에 대해서는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 조롱박과 같이 생겼다."하여 호로고루라고 불린다는 설과 "고을"을 뜻하는 '홀(호로)'와 '성'을 뜻하는'구루'가 합쳐져 '호로고루'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호로고루는 얕은 구릉 위에 축조된 성으로 삼각형 모양을 띠고 있으며 전체 둘레는 401m로 남벽 161.9m, 북벽 146m, 동벽 93.1m로 내부 면적은 606㎡이며 약 28m 높이의 현무암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 벽은 여러 번에 걸쳐 흙을 다져 쌓은 위에 돌로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려 석성과 토성의 장점을 적절하게 결합한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을 호로하(瓠蘆河), 또는 표하(瓢河)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임진강 북안에는 주요 길목마다 고구려성이 구축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호로고루는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감조구간(減潮區間)이 상류에 위치하여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에 접하여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호로하 부근에서 벌어진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의 전투기록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 목책 유구, 지상건물터, 지하식 벽체 건물터,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조선시대까지 출토되었는데 특히 고구려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동쪽에서 본 호루고루 성으로 전체 둘레가 401m, 남벽 161.9m, 북벽146m, 동벽 93.1m이며 약 28m 높이의 현무암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파주 감악산 산행을 마치고 처음 들렀던 호로고루와 황포돛배를 관람한 후 귀경길에 들렀던 화석정입니다. 호로고루(사적 제467호)는 임진강 하구에 있는 고구려의 성으로 2010년 이후 복원하였으며, 이날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갈 때가 마땅하지 못한 지역 사람들이 다수 찾아온 것 같았다.
넓은 공지에서 사냥개 종류인 두 마리 개가 질풍같이 달리는 것을 볼 수 있고..
호로고루성 가는 길에 홍보관과 실물 크기의 복제 광개토대왕비가 있네요..
광개토대왕비는 2002년 북한에서 모형을 제작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는 태왕이 붕어하신 뒤 2년째 되는 장수왕 3년(414년) 9월에 국내성 고도인 집안(현재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 지역)에 태왕릉과 함께 세워진 기념비이다. 높이 6.39m, 너비 1.35 ~ 2m에 달하는 동양 최대 크기의 사면석비이기도 하다. 대왕비는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44행 1,775자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고 당대 고구려사를 밝혀주는 최고의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호로고루성의 동벽으로 여러 번에 걸쳐 흙을 다져 쌓은 위에 돌로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려 석성과 토성의장점을 적절하게 결합한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성 앞으로 임진강이 흘러 전략요충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드라마 촬영지이기도 하네요..
성밖은 보리밭이 펼쳐져 있네요..
날자, 날자, 날아 보자꾸나..
호로고루성을 둘러본 후 삼국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물자교류 중심 역할을 한 고랑포구로 이동하였는데 고랑포구로 들어가는 문은 통제되어 있더군요..
한국전쟁 중 고랑포구에서 아이스하키 경기를 하고..
연천 호로고루성, 고랑포구, 황포돛배를 들러본 후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2011년 현직에 있을 때 출장길에 찾았던 화석장을 둘러보았다.
화석정은 율곡 이이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임진강이 조망되는 곳으로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화석정】
화석정은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원래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吉再)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사후 그를 추모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다가 율곡 이이의 5대 조인 강평공 이명신(康平公 李明晨)이 세종 25년(1443년)에 정자를 세우고 1478년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였다. 이숙함이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평천장(平泉莊)의 기문(記文)에 보이는 '花石'을 따서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4월 29일 밤) 억수 같은 폭포 속에서 강을 건널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배가 강을 건넜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져 80여 년간 터만 남아있는 것을 현종(顯宗) 14년(1673)에 율곡선생의 증손 이후지(李厚地). 이후방(李厚坊)이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시 유림들이 복원한 것을 1973년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 유적지 정화사업의 하나로 정부가 재정비한 것입니다.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는,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 평천장(平泉莊)의 기문(記文)에 보이는 '花石'을 따서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화석정은 율곡선생은 국사의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화석정 정자에서 본 임진강의 모습으로 경치가 그림 같습니다..
율곡선생이 8세 때 지은 화석정시(시( 八歲賦詩)로 가을 정취를 느낄 수 있으며, 율곡선생의 대단한 일면을 느낄 수 있다.
화석정 앞에 있는 상사화로 잎이 아주 튼실합니다..
귀경길에 본 벚꽃길인데 이곳은 이제 벚꽃이 만개하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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