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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북알프스
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화성 행궁 야간탐방(20. 8. 1)

by 산사랑 1 2020.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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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행궁】

 

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곳으로 그 어느 행궁보다 크고 웅장하였으며 활용도도 높아 경복궁의 '부궁'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곳이다. 화성행궁의 규모는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현저히 크며 정조 20년(1796)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행궁은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정면 중앙에는 약간 안으로 들여 정문인 신풍루(新豊樓)가 있고 중축 선상에 내삼문인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重陽門)이 있으며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가장 안쪽에 배치되었다. 봉수당 서북쪽으로는 모서리끼리 연결된 장락당(長樂堂)이 있는데 이곳이 왕의 침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장락당 정면에는 경룡관이라는 누각 형식의 삼문이 있다. 장락당 향좌측의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5량 18칸 건물이다. 복내당 앞에는 유여택(維與宅)이라는 5량가의 8칸 건물이 있다. 정당 향우측에는 초창 때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이 있다. 낙남헌은 본래 읍치의 득중정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 규모는 7량가로 14.5칸이고 낙남헌 뒤쪽으로는 용마루가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꺾인 노래당(老來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행궁 앞으로는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신풍루 향좌측에는 외정리소, 비장청, 서리청, 남군영 등이 있고 향우측에는 집사청, 북군영, 우화관 등이 있다. 원래 읍치 건물에는 남북 군영과 비장청, 무기고 등이 있고 나머지 외정리소, 서리청, 집사청 등은 성곽 축조 때 지은 것들이다.

 

1874년(고종 11)에는 2만 냥을 들여 행궁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 때 까지도 잘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구한 말 개화의 물결과 함께 수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1910년 세워지면서 행궁 일부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촬영된 사진에는 신풍루 뒤로 좌익문이 보이고 중양문과 유여택, 정당인 봉수당과 장락당, 내당인 복내당 등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행궁 건물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자혜의원이 도립병원으로 바뀌면서 크게 증축되었고 수원 농업시험소 등 여러 기관이 설치되고 주변에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1923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부근에 신풍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낙남헌 건물이 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1991년에는 수원 의료원 건물이 이전되면서 1993년에 수원시에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였다. 화성 축성 200주년인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출처 : 다음 백과)

 

행궁 출입문인 신풍루..

 

건강셀프등산회 제710차 산행으로 수원 화성 달빛 트레킹을 추진하였으며, 화성 가는 길에 잠시 노송지대를 둘러보았다. 노송지대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을 가는 길목에 있어 자주 들렀던 곳으로 당시 정조는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궁궐에서 쓰는 돈) 1000량을 하사하여 이곳에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심게 했다.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일부의 노송(15기)만 남아 있으나,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노송지대의 노송들..

 

 

화성에 도착하여 행궁 부근에 주차를 하고 트레킹을 하기 전에 행궁을 들러 보았다. 화성 행궁은 이제까지 두 번에 걸쳐 둘러보았지만 야간에는 처음이라서 기대가 되었다. 행궁은 입장료(성인 1인 1,500원)를 내고 들어가는 문이 신풍루로 통상 신풍루 앞에는 토요일 오후 2시에 여러 가지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2018년 방문 당시에는 북청사자놀이 보존회에서 북청사자놀이를 하는 것을 보았다.

 

신풍문 입구 한쪽에 있는 화성 행궁 지도와 설명서..

 

행궁은 입장료 1500원을 지불하고 신풍루를 통하여 들어갑니다..

 

신풍루는 1790년 정조 14년에 세워졌으며, 처음에는 진남루라 했는데 이후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가 되었다. 신풍이란,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정조대왕이 수원을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2018년 방문 시 신풍루 앞에서 북청사자놀이를 하고 있더군요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고 상민이 양반을 끌고 가고/칼춤도 선 보이고..

【북청사자놀음】

 

북청사자놀음(北靑獅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 지방에서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던 사자놀이, 곧 탈놀음으로 북청군 전 지역에서 행해졌다. 동리마다 제각기 사자를 꾸며서 놀았고, 각 처에서 읍내로 사자 놀음패가 모여들어 자연히 경연(競演)이 붙었다. 그중에도 북청읍(北靑邑)의 사자계(獅子契), 가회면(佳會面)의 학계(學契), 구양천면(舊楊川面)의 영락계(英樂契)의 사자춤이 유명하였으며, 특히 구 청해면 토성리 사자놀음은 관원놀음과 함께 행하여지므로 더욱 유명하였다. 1930년 이후로 작은 사자놀이 팀은 사라지게 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음력 정월 14일 밤부터 15일 새벽까지 놀고 서당과 도청(都廳, 마을공회당)에 모여 술과 음식을 갖춰놓고 논 뒤 16일부터는 초청받은 집을 돌며 놀았다. 퉁소, 장고, 소고, 북, 꽹과리 등 악기의 반주에 따라 사자와 사령, 양반, 꺾쇠, 무동(舞童), 꼽새춤과 기타 잡배(雜輩)들이 일단이 되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자춤을 추고 부엌의 조왕과 집안의 조령(祖靈)에게 절을 한다. 이와 같은 사자놀음의 주목적은 연초에 백수(百獸)의 왕으로 벽사할 만한 힘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사자로써 잡귀를 쫓고 마을의 평안을 비는 데 있었으며 집집마다 거둔 전곡(錢穀)은 마을의 공공사업과 사자놀음 비용 등에 써 왔다.

 

이 놀음은 삼국시대의 기악(伎樂)·무악(舞樂) 이래 민속놀이로 정착된 가면놀이로, 주로 대륙계·북방계인 사자춤(獅子舞)이 민속화 된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뒤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하여 현재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출처 : 위키백과)

 

 

신풍루를 통과하니 넓은 광장에 ‘화성행궁 달빛 정담 야간개장’의 불빛이 들어와 있고 한쪽에는 달의 모형을 한 둥근 기구가 있었다. 행궁은 대장금의 촬영지로도 유명한데 신풍루 한쪽 멋진 나무 아래 장금이 커플의 모형이 있었고 반대쪽에는 소원의 나무에 많은 소원 글들이 묶여 있었다. 좌익 문과 중양문을 지나면 정당인 봉수당이 나왔다.

 

신풍루를 통과하니 광장에 ‘화성행궁 달빛정담 야간개장’의 불빛이 들어와 있네요..

 

달 모양의 둥근 기구가 한쪽에 있습니다..

 

대장금의 촬영지답게 장금이 커플의 모형과 반대쪽에 있는 소원의 나무..

 

소원의 나무 하단은 나무속이 비어 있습니다..

 

좌익문과 좌익문에서 본 신풍문..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으며,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중양문과 정당인 봉수당..

 

 

1790년(정조 14)에 완성된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봉수당】

봉수당은 정면으로 삼문 형식의 중양문(中陽門), 좌익문(左翊門)을 두고, 행궁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와 일직선이 되는 위치에 동쪽을 향하도록 앉아 있어, 행궁 전체의 중심축을 이룬다. 봉수당은 정조 13년(1789)에 지은 건물로 1790년 원행(園幸) 때에 정조가 직접 편액(扁額)을 써서 장남헌(壯南軒), 또는 화성행궁(華城行宮)이라 하였다.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 때에 정조가 머무르던 행궁 정당(正堂)이었으며, 평상시에는 부사(府使)가 집무하는 동헌(東軒)으로 쓰였다. 정조 19년(1795)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는 뜻을 담아 정조가 새로이 봉수당(奉壽堂)이라는 당호를 내려 전참판 조윤형(曺允亨, 1725-1799)에게 편액(扁額)하게 하고, 회갑연 진찬례(進饌禮)를 여기서 거행하여 혜경궁에게 수복(壽福)을 기원하며 잔을 올린 곳이다.(출처 : 다음 백과)

 

정조대왕과 왕비가 경의왕후(혜경궁 홍씨)에게 회갑연을 베풀었던 "장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인 봉수당 내의 모습 일부..

 

봉수당을 지나 우측으로 진행하면 당시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이 나왔으며, 낙남헌 뜰에는 멋진 나무가 한 그루 서있고 낙남헌을 지나 멋진 가옥이 한 채 보였다. 낙남헌의 건물 규모는 7량가로 14.5칸이고 낙남헌 뒤쪽으로는 용마루가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꺾인 노래당(老來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낙남헌을 잠시 둘러보고 위쪽에 있는 미로한정으로 가는 길에 등불이 밝혀져 미로한정으로 향했다. 미로한정 가는 길에서 뒤를 돌아보니 행궁이 보였으며, 미로한정에 올라서면 신풍루가 한눈에 들어왔다.

 

당시 때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

 

낙남헌 뜰에 있는 멋진 나무..

 

고풍스러운 저택과 교회 건물이 묘한 대조를 보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미로한정으로 올라가는 길..

 

미로한정 올라가면서 본 행궁의 모습으로 담벼락에 팔풍병풍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 한가로움이다’라는 의미의 미로한정..

 

미로한정은 당초 육면정이었으나 1795년 미로한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미로한정이란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 한가로움이다’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으로 정조가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넘겨준 후 이곳에 내려와 한가롭게 노년을 즐기려고 했다고 한다. 미로한정을 구경하고 다시 올라온 길로 가다 보면 군사시설이었던 내포사란 건물이 나왔다.

 

한정에서 본 행궁의 모습으로 신풍루, 좌익문 등이 보이네요..

 

미로한정의 아름다운 모습..

 

군사시설이었던 내포사..

 

내포사를 지나 왕의 침소로 사용되던 장락당으로 진행하였으며, 그곳에는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상의 모형이 있었다. 장락당을 둘러본 후 경룡관을 지나 정조가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에 합격한 무사에게 상을 내렸던 유여택을 둘러보았다. 유여택을 둘러본 후 화성에서 거행되는 국왕의 행사비용을 총괄하는 외정리소, 비장들이 근무하는 비장청, 하급관리들의 근무처인 서리청,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영용 외영(화성을 지키는 부대) 군사들이 거주하는 남군영 등을 둘러보는 것으로 행궁 탐방을 마무리하였다.

 

장락당으로 진행하는 도중에 본 팔풍병풍도..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 행각의 공간으로 환관이 서편을 읽고 있습니다..

 

단장하는 상궁과 바느질하는 침방나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상..

 

조의 침전이었던 장락당..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방인 경룡관으로 당태종의 궁전 이름이다..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 때의 궁중연회 종목 중 무고와 선유락(배에 닻줄을 달고 추는 춤) 연행 장면(진찬모형)..(진찬모형)..

 

신하들을 접견하던 유여택..

 

보물 제845호인 해시계 앙부일구..

 

화성에서 거행되는 국왕의 행사비용을 총괄하는 외정리소..

 

 

중앙문으로 나오면서 본모습으로 중앙문으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비장들이 근무하는 비장청..

 

하급관리들의 근무처인 서리청..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영용 외영(화성을 지키는 부대) 군사들이 거주하는 남군영..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 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 숙위 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행궁의 잡무를 맡아보던 집사청..

 

달 모형 뒤편에 나중에 들를 곳인 서장대가 보이네요..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현재는 2단계 복원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행궁 바깥에 있는 멋진 나무..

 

다음은 수원 화성 달빛 트레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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