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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북알프스
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연미정과 월곶돈대(20. 8. 15)

by 산사랑 1 2020.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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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 순교성지를 둘러본 후 얼마 전 탈북민이 월북한 곳인 연미정으로 출발하였다. 연미정 가는 길에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비와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잠시 보고 연미정에 도착하였다.

 

죽산 조봉암선생 추모비

 

【죽산 조봉암】

조봉암(曺奉岩, 1899년 10월 29일(음력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은 일제 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여 성사시켰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받았다는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 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2011년 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1941년 일제에 150원의 국방헌금을 냈다는 당시 매일신보의 신문기사가 나왔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심사를 보류하였으나 현재 그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추진 중에 있다.

 

조봉암 추모사업회 주관으로 2000년 5월 조봉암 추모비를 건립하기로 하고 모금 운동을 벌였다. 새얼문화재단이 인천 지역 정치인·학계·교육계 인사 등 112명으로부터 2211만 원을 거두어 추모사업회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 모두 6천여 만원의 돈을 모아 2001년 7월 6일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강화역사관 입구 진해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산 사색의 길 동락천 약수터 근처에 있다.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돼 정부가 비문을 새기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창령 조씨 문중에서도 비문 제작을 거부했기 때문에 비석 뒤에 비문이 없다. 묘소 앞 돌에 새겨진 죽산의 어록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가 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한가?」(출처 : 위키 백과에서 발췌)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

 

6.25참전용사기념공원은 강화군에서 접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공원 조성을 위해 고심하던 중 6.25 참전용사 기념비가 위치한 강화읍 용정리에 참전용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18. 4월에 조성했다.

 

월곶진과 조해루..

【월곶진과 조해루】

병자호란 이후 북방민족의 침입을 대비하여 국방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 인식된 강화도에 군사조직으로 5진 7보가 설치되었고 방어시설로는 강화산성, 외성, 53 돈대가 숙종대에 설치되었다. 그중의 월곶진은 조강(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진 강)이 서해로 나가면서 강화해협인 염하와 서해로 나누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문수산성과 마주하고 있는 곳에 위치한 월곶진은 다른 진과 보 보다는 높은 종 3품인 첨사가 담당하는 군사조직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산하에 옥창돈, 월곶돈, 휴함돈, 적북돈을 두었다. 월곶진은 한강과 임진강으로 가는 배가 썰물일 때 만조가 되기까지 닻을 내리고 기다렸던 곳이며, 한양에서 배를 이용하여 강화로 올 때 이곳에서 내려 검문을 받고 강화 동문을 거쳐서 강화로 들어가는 중요한 교통로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조해루(潮海樓)는 숙종 5년(1679)에 지어져 강화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검문하는 검문소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복원된 조해루는 월곶돈대와 연결되고 남쪽의 외성과는 연결할 수 없는 상태이다. 홍예식 성문을 만들고 그 위에 누각을 지은 전형적인 성문 건축물이다. (출처 : 한국 NGO신문)

 

* 갑곶돈대에서 적북돈대에 이르기까지는 7곳에 돈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접근이 가능한 곳은 월곶돈대뿐이다. 강화외성의 출입문인 6개의 문루(안해루, 공조루, 참경루, 진해루, 북파루, 조해루) 중에서 광성보의 안해루, 덕진진의 공조루, 용진진의 참경루는 복원을 마쳤고, 월곳진의 조해루가 2011년에 복원되었고 아직 갑곶진의 진해루와 북파루는 복원되지 않는 상태이다.

 

황형택지..

【황형택지】

조해루에서 월콧 돈대로 공터에 ‘莊武公黃衡將軍宅址碑’라고 쓰인 비 하나가 서 있다. 사각형의 난간으로 두르고 비를 보호하고 있다. 비가 세워진 이곳은 삼포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1512년 함경도 지방 야인(野人)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국가에 공로가 많은 조선 중기의 무신인 황형(1459~1520) 장군에게 조정에서 땅을 하사하였다고 알리는 비이다.(출처 : 한국 NGO신문)

 

월곶돈대..

 

【월곶돈대】

월곶돈대는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 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해안지역에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 시설물이다. 특히 월곶돈대는 강화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검색을 함으로써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돈대이다. 또한 한강이나 임진강을 따라 거슬로 올라가는 세곡선이나 상선이 나루나 포구에서 조류를 기다리는데, 주로 김포의 강령포, 조강포, 마근포 등을 많이 이용하였고, 월곶돈대 앞은 서해에서 들어오는 배가 닻을 내리고 조류를 기다렸던 곳이었다. 타원형에 가까운 돈대는 홍예문을 두었으며 조강과 염하, 서해를 조망하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관방시설이다. 네모진 돌을 다듬어 성벽을 쌓고 위에는 여장을 설치하고 한 개의 총안을 두었다. 바다 쪽으로 3곳에 포를 쏠 수 있는 포구(砲口)를 내었다.

 

월곶돈대의 가장 높은 위치에는 ‘연미정’이라는 정자 한 채가 있다. 정자 뒤에는 500살이 넘는 느티나무가 2그루가 자라고(한그루는 2019.9월 태풍 링링에 의거 부러졌음), 건물 기단 옆에는 석비가 한 기 있다. 이 정자는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1244년(고종 31)에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 여름철에 50일 동안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일)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출처 : 한국 NGO신문)

 

월곶돈대 안에 연미정이 보입니다..

 

월곶돈대와 연미정 파노라마..

 

느티나무가 하나밖에 없는 연미정..

 

【연미정】

월곶돈대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연미정’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6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 정화사업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월곶리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서 물길의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갑곶(甲串)의 앞을 지나 인천 쪽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이곳은 강화 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연미정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서쪽으로 강화 들판과 강화산성이, 남으로 염하와 문수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자 양쪽에는 5백 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으나 2019년 제13호 태풍(9.7일 한반도 상륙) 태풍 링링에 의해 한그루가 안타깝게 부러졌다. 예부터 느티나무는 장수목으로 수명이 길고 수형이 단정하며 수관 폭이 넓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자나무이기도 하다. 정자는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1244년(고종 31)에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여름철에 50일 동안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일)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 방어사로 큰 공을 세운 황형(黃衡)에게 정자를 하사하였으며, 연미정 기단석 좌측에 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莊武公黃衡將軍宅址’라고 쓰여 있다. 현재도 황씨 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연미정은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1627년 1월, 후금 군사 3만여 명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입한 정묘호란 당시 화의가 성립한 곳이 연미정이다. 이곳은 민간인 통제구역 이북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에 제한이 있었으나 현재 민간인 통제구역에서 해제되어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관람하고 있다.(출처 : 다음 백과를 중심으로 재조정)

 

느티나무가 두 개 있었을 때의 연미정(함께 산행한 지인이 보내준 작품)

 

느티나무가 하나뿐인 현재의 연미정..

 

느티나무는 2019년 발생한 태풍 링링에 의해 부러져 현재는 그루터기만 남아 있네요..

 

느티나무 그루터기..

 

그루터기 안에 있는 버섯..

 

그루터기에 잎이 나있지만 속에 버섯이 자라고 있으면 썩을 수 있으므로 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7.18일 탈북민이 월북한 배수로로 현재는 그물망을 설치하였더군요..

 

한국 정착 3년 만에 다시 북한으로 넘어간 탈북민 김모(24) 씨의 '월북 루트'가 인천 강화군 연미정 인근 배수로인 것으로 드러났다. 김준락 합동참모본부 공보실장은 28일 "군은 (인천 강화읍 월미곳에 있는) 연미정 인근 배수로를 통해서 월북했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월북한 김씨는 2017년 귀순 전 개성시 개풍군 해평리에서 거주하며 농장원으로 일했으며 재입북 전 동료 탈북민 성폭력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김씨는 지난 17일 지인인 탈북민 유튜버의 차량을 이용해 강화도로 이동했고, 다음날 오전 2시 20분쯤 택시를 타고 월곳리 일대로 간 뒤 하차한 것으로 파악됐다. 군은 월곳리 일대에서 김씨 이름이 적힌 소지품이 들어있는 가방도 발견했다. 강화도 북동쪽에 있는 월곶리는 가장 가까운 북한 해안과 직선거리로 3㎞ 가량 떨어져 있는 곳이다.(출처 : 한국일보 등에서 발췌)

 

배수로가 있는 지점 위에서 본모습..

 

유도 사이로 지나갔을 것이라고 하는데 일부 다른 의견들이 있더군요..

 

에 보이는 섬유도로 '96년 대홍수 때떠내려온 황소를 5개월 만에 구조한 비무장지대 섬,,

【유도(留島)】

연미정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섬이 있으니, 머무르섬, 바로 유도(留島)다. 머무르섬(유도)은 육지에서 500여 m 떨어져 한강하구 비무장지대 내에 위치한 무인도로, 월곶면 보구곶리 산 1번지와 2번지 두필지로 되어 있다. 이 섬은 까마득한 옛날 홍수에 떠내려오다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전설과 함께 '머무른 섬→머루무섬'이 됐다고 전해온다. '머무루'가 변음(變音)되어 머머리, 머머루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유도(留島), 사도(巳島)라는 한자 지명이 사용되기도 한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6·25 한국전쟁 이전에는 농가가 두 채 있었고 농사도 지었다고 한다.

 

1996년 대홍수 때 황소 한 마리가 떠내려와 이곳 유도에 고립되었다. 표류 5개월, 하루하루 말라가는 소를 우리 해병대가 데려와 '평화의 소'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소는 제주로 장가가 천수를 다했다. (출처 : 오마이 뉴스)

 

이곳 끝 지점이 북한과 가장 가깝기에 그곳까지 가서 월북했다는 설도 있음..

 

고인돌 NO.1번인 강화 대산리 고인돌..

 

【강화 대산리 지석묘】

강화 대산리 지석묘(江華 大山里 支石墓)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대산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로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된 1기이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강화읍에서 고려궁지(高麗宮址)를 지나 강화읍성(江華邑城) 북문 밖으로 나서면 바로 북문 고개로 이곳에서부터 두 갈래의 소로 길이 나온다. 왼쪽 내리막길은 송해면 신당리 송촌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오른쪽 북산 북록을 끼고 내려가면 강화읍 대산리 서촌 부락이다. 대산리 고인돌은 고려산의 동쪽 봉우리인 북산의 북록 능선의 맨 마지막 자락에 있다. 해발 약 20m 높이의 능선의 대지 위에 약간 흙과 자갈을 돋우고 그 위에 고임돌과 덮개돌이 무너져 내려 있다. 덮개돌의 놓인 방향은 편북(30°) 방향이다.

 

고인돌무덤은 오른쪽의 크기가 길이 2.40m, 너비 1.50m. 높이 0.45m이다. 왼쪽의 크기는 길이 1.60m, 너비 1.30m, 높이 0.30m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3.68m, 너비 2.60m, 두께 0.50m이다. 덮개돌 밑으로 마감돌로 보이는 판석이 흙과 자갈에 묻혀 있다. 덮개돌의 석질은 흑운모 편마암으로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이른바 북방식 고인돌이 내려앉은 상황이 강화도 지구 다른 북방식 고인돌의 경우와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강화 고려산 동쪽 봉우리인 북산의 해발 약 20m 능선에 있는 이 고인돌은 탁자식이다. 약간의 흙과 자갈로 지면을 높이고 그 위에 받침돌을 세운 뒤 덮개돌을 올렸으나 현재는 무너져 내려앉았다.(출처 : 다음 백과를 중심으로 재편집)

 

 

지인의 별장인 강화 숙소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오후 일정으로 교동도 화개산 트레킹을 합니다..

 

다음은 교동도 화개산 트레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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