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지진을 둘러본 후 덕진진 ~ 광성보 ~ 오두돈대 ~ 화도, 용당돈대 ~ 용진진, 좌강돈대 ~ 갑곶돈대 탐방
강화 8-A길 트레킹 마지막 지점인 초지진 이후 덕진진, 광성보는 예전에 많이 보았기에 사진만 찍고 통과한 후 강화외성부터 분격적으로 돈대 탐방을 시작하였다. 강화외성 인근에 있는 오두돈대를 필두로 화도돈대, 용당돈대를 둘러보고 용진진으로 이동하여 좌강돈대를 본 후 갑곶돈대는 예전에 많이 갔었기에 입구만 간 후 갑곶 순교성지를 둘러보았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당시 격전지인 덕진진의 공조루..
【덕진진】
사적 제292호. 지정면적 48,794㎡. 이곳은 돈대(墩臺)와 포대(砲臺) 및 파수청(把守廳)이 있던 곳으로,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고 하며,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용두돈대(龍頭墩臺)와 함께 축성되었다. 돈대의 위치는 한성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전략요충지로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싸웠던 격전지이다. 또, 돈대와 포대의 중심부에는 파수청터가 있는데, 이곳은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동시에 포병을 지휘한 장소로 생각된다.
덕진진은 1679년에 축조된 용두(龍頭)·덕진 등 2개 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남장(南障)·덕진 등 2개 포대를 관할하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부대가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퇴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치열한 포격전 끝에 미국 함대를 격퇴시켰으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門樓址)만 남게 되었다. 1976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1980년의 발굴조사 당시 7개의 포탄과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되었고, 건물터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건물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추정되며, 둘레에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또, 돈대터에서는 1874년(고종 11)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광성보와 맞서 있는데, 시야가 막히고 해협이 매우 좁고 물살이 빠르며 소용돌이치므로 적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출처 : 다음 백과)
덕진진의 소포, 대포. 화승포인 불랑기 등(15년 10월 강화 안보체험 당시 사진)..
복원된 덕진 돈대의 포대(15년 10월 강화 안보체험 당시 사진)..
1977년에 복원한 대포 10문이 설치된 남장포대(15년 10월 강화 안보체험 당시 사진)..
덕진돈대에서도 미군과의 전투가 있었네요..
광성보(성문인 안해루)도 입구만 둘러보았습니다..
【광성보】
강화 12 진보(鎭堡) 가운데 하나이다.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의 돈대(墩臺)와 함께 오두정 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는 돌로 성벽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두어 ‘안해루(按海樓)’라고 하였다.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곧 이 해에 미국 함대가 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하여 물리쳤다. 하지만 4월 23일에 초지진은 미국 해병대 450명의 상륙으로 인해 점령되었고, 이튿날에는 덕진진이 함락되었으며, 곧 광성보가 공격을 받았다. 당시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1823∼1871)과 수하의 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힘껏 싸웠으나 중상을 입어 움직이기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1976년에 파괴된 성가퀴와 문루 등을 복원하고,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 비각(雙忠碑閣)을(雙忠碑閣)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출처 : Daum백과]
용두돈대 가기 전에 있는 손돌목 돈대..
【손돌목돈대】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축조된 돈대로 덕진 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2778m 2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고종 8년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신미양요 당시 손돈목 돈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15년 10월 강화 안보체험 당시 사진)..
【손돌목 이야기】
1627년 정묘호란 때,, 청군이 물밀듯이 쳐내려 오자 인조는 황급히 강화로 피난길을 떠났다. 급작스럽게 떠난 바람에 대곶항 부근에서 강화섬으로 건너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때 손돌이라는 청년 어부가 배를 대자 황급히 그 배를 타고 섬으로 향했다. 하지만 배가 물살이 거센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왕은 '이놈이 나를 물에 빠뜨려 죽이려는구나' 생각하고 신료들에게 사살을 명했다. 그러자 손돌은 바가지 하나를 내밀며 '이 바가지를 물에 띄워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면 강화섬에 닿을 것'이라 말하고 죽임을 당했다. 왕 일행은 바가지가 흘러가는 물살이 드센 곳을 따라가다가 드디어 섬에 닿아 목숨을 구했다. 그 뒤. 왕은 자기의 성급함을 후회했다고 한다.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용두돈대..
【용두돈대】
용두돈대 (龍頭墩臺)는 강화군에 있는 강화 53돈대중 하나이다. 고려 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시되었으며, 조선 숙종 5년에 돈대가 세워졌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복원된 상태이며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복원된 1977년 당시에는 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수원화성보다 50년 전에 벽돌로 쌓은 강화외성..
【강화외성】
강화외성(江華 外城)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조성된 성으로, 강화군 동해안(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대에 걸쳐 있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강화의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방어 체계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둘레 약 1.2㎞의 길이로 쌓은 토성으로 1234년(고종 21) 1월부터 축조되었다. 중성은 둘레 약 9㎞의 토성으로 1250년(고종 37)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축조되었다. 외성은 강화도 섬을 두른 토성으로 1233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1237년(고종 24)에 일차 완성되었다. 이 세 개의 성은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모두 헐렸다.
강화 외성은 강화도 동해안 일대 방어를 목적으로 고려 1233년(고종 20)에 축조한 성으로, 그 길이가 약 23㎞(적북돈대∼초지진)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강화가 국가의 보장지(保障地)로 주목받으며 강화의 관방 시설이 수차례 정비되었다. 국난 시에 도성(都城)의 외성(外城)으로서의 역할이 중시되어 1618년(광해군 10)에 보수된 바 있고, 병자호란(1636~1637) 때 허물어진 것을 다시 쌓고 돈대를 설치하였다. 영조 연간에는 강화유수로 부임한 김시혁(金始爀)이 품계 하여 벽돌을 이용하여 일부 구간을 다시 쌓았다. 특히 오두돈 남측에는 영조 때 유수 김시혁이 벽돌로 개축한 전축성(塼築城)이 잔존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곳 전성은 1794년에 축성하기 시작한 수원 화성보다 50여 년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수원 화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축성(塼築城)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출처 : 다음 백과)
오두돈 남측의 강화외성으로 벽돌로 개축하였고, 벽돌을 사용한 수원화성보다 50년 빠르다고 한다..
1794년에 벽돌로 쌓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네요..
원형의 자라 머리 형상의 오두돈대..
【오두돈대】
‘오두’라는 이름에서 보듯, 돈대가 있는 지형이 자라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름이 32m에 달하고 바다를 향해 포좌 4개소가 있으며, 전면은 깎아지른 낭떠러지다. 예전에는 성벽 아랫부분만 남아있었는데, 200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출처 : 인천 투데이(http://www.incheontoday.com)
오두돈대에서 본 외부 모습(아래 우측)
사각형의 화도돈대..
【화도돈대】
화도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 돈대 가운데 하나로 오두돈대·광성돈대와 함께 광성보에 속했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29m이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 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 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출처 : 다음 백과)
용당돈대로 올라가는 길과 타원형의 용당돈대..
【용당돈대】
용당돈대(龍堂墩臺)는 좌강돈대, 가리산돈대와 함께 용진진(龍津鎭)에 소속되어있다. 이곳은 주차장이 없어 강화나들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면 거의 찾지 않는다. 2001년에 복원하면서 길을 깔끔하게 정비하고 관리하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타원형의 용당돈대는 성벽의 하단부만 일부 남아있었는데 복원하면서 성벽을 새로 쌓았다. 성가퀴는 올리지 않았다. 무사석을 새로 깎아 하얗게 빛나는 성벽을 보는 것은 세월의 흔적이 없어 별로 큰 감흥은 없다. 그러나 성문을 통과해 안에 들어서 우람하게 자란 참나무 한 그루가 있고 참나무 오른쪽으로는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고, 이곳 역시 바다를 향해 포좌 4개소를 설치했다.(출처 : 인천 투데이(http://www.incheontoday.com)
용당돈대 안에 있는 참나무..
용진진의 참경루..
【용진진】
역사관에서 해안순환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왼편으로 누각을 하나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이 용진진이다. 용진진은 숙종 42년에 설치되었다 하며 3개의 돈대를 관장하였다. 진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된 진이다. 용진진은 본래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고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등 도합 101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포좌 4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의 있었다고 한다. 이 진에서는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등 3개 돈대를 관리하였다. 석축 대부분이 없어지고 홍예문 두 곳만이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문루와 좌강돈대를 복원하였다. 좌측 홍예의 높이는 2.57m, 폭은 4.15m, 두께는 60cm-61cm, 우측 홍예의 높이는 2.14m, 폭은 4.80m, 두께는 50~60cm의 규모이며 석재는 대리석이다.(출처 : 다음 백과)
용진진과 연결되어 있는 좌강돈대..
【좌강돈대】
좌강돈대는 숙종 5년(1679)에 네모난 형태로 처음 쌓았으나 이후 원형으로 변형돼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용진돈대라고도 불린다. 원래부터 언덕이 있었는지, 아니면 축대를 쌓고 인위적으로 언덕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돈대에 올라보면 사방이 탁 트여있다.
좌강돈대에도 포좌 4개소가 바다를 향하고 있다. 돈대 안쪽은 2단으로 돼있어 계단을 올라 한 바퀴 돌면서 밖의 지형을 살펴보기 좋다. 바다 쪽을 바라보면 염하 건너편으로 문수산과 염하를 가로지르는 강화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제물진이, 서쪽으로는 멀리 혈구산과 고려산이 아스라이 보인다.(출처 : 인천 투데이(http://www.incheontoday.com)
용진진 인근의용진 쉼터와 포도, 해당화, 아기사과..
용진진의 모습..
제물진 소속의 갑곶돈대는 자주 간 곳이라서 입구만 둘러봅니다..
【갑곶돈대(사적 제306호)】
갑곶돈대는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갑곶돈대의 포(2019.10월 안보견학 당시 사진)...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갑곳리 탱자나무.(2019.10월 안보견학 당시 사진)..
갑곳리 탱자나무는 사기리의 탱자나무와 함께 탱자가 사해 안에서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에 위치한 것으로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것이다. 강화에 탱자나무를 심게 된 사유는 성벽에 적군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용도였다고 한다
구 강화대교..
【갑곶 선착장 집단 양민 학살지】
1951년 1ㆍ4 후퇴 때 구 강화대교 아래 갑곶 선창장에서 집단 학살이 벌어졌다. 1월 2일 경찰이 강화도를 빠져나가자, 이승만의 지시로 만들어진 이곳 대한청년단의 후신인 ‘강화향토방위특공대’는 인천 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3개월간 북한군에 부역한 사람들이나 월북한 사람들의 가족을 연행하여 갔으며, 1.6~8일 3일간 갑곶 나루터와 옥계 갯벌에서 희생된 사람은 남자 45명, 여자 15명 정도에 어린아이도 있었다. 그 후 1월 말에서 2월 초에 걸쳐 해안에서 300여 명을 학살했다고 하며 그중 60여 명은 노인ㆍ여성ㆍ갓난아기였다. 그 후의 학살은 부역을 하고 피란했다가 다시 들어온 강화 주민들이었다고 한다. 2012년, 법원은 학살 피해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에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출처 : 인천 투데이(http://www.incheontoday.com)http://www.incheontoday.com)
갑곶 순교성지는 별도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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