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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실미도 트레킹(21. 3.13)

by 산사랑 1 2021.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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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를 둘러본 후 물이 빠졌을 때 실미도 트레킹을 하기 실미도로 이동합니다..

 

무의도 국사봉 올라가는 전망대에서 본 실미도 모습(15.4.26일 사진)

오늘은 조망이 별로라서 예전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실미도는 무인도로 영화 실미도(2003년)가 흥행에 성공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실미도에서 영화 ‘실미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안내판 정도로, 실제 영화 촬영지는 섬의 뒤편에 있으며 오늘 그곳으로 갈 것이다..

【실미도(實尾島)】

 

실미도는 인천 중구 무의동에 위치한 면적 253,594 m² 무인도이다. 무의도에서 북서쪽으로 약 400 m 떨어져 있고, 인천항과 약 21.2 km 떨어져 있다. 하루 2번 썰물 때에 무의도와 연결되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흔히 '실미도 부대'라고 부르는 684 부대(1968.4 ~ 1971.8)는 실미도에 있었던 북파 목적의 비밀부대였다. 684 부대는 1968년에 일어난 1·21 사태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같은 해 4월에 창설되었다. 이들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침투하여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나, 1971년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작전 자체가 불확실해지자 같은 해 8 23일 감시병들을 살해하고 서울로 잠입하여 실미도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기획한 영화 실미도가 흥행에 대성공하면서 관광지로 개발되었는데 이 영화에 앞서 쿠데타가 개봉될 예정이었으나 제작비 등 여러 문제가 겹쳐 좌절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드라마 PD 출신 김종학 감독의 영화감독 데뷔도 무산됐다. (출처 : 위키백과)

 

실미도 들어가는 길이 예전에는 징검다리로 되어 있었는데(우측) 지금은 흙으로 되어 있어 운치가 조금 덜 한 것 같았다..

조개잡이(바지락) 채험을 하고 있는데 빨간 조끼(체험비를 지불한 사람)를 입은 사람만 할 수 있다..

예전에 실미도 방문시는 우측으로 갔으나 이번에는 좌측으로 갔다..

지나 온 곳..

진행방향으로 바위에 굴이 닥지닥지 붙어 있고 조금 지나 바위길을 따라 진행해야 된다..

우측 바위가  물개 형상을 하고 있네요..

요 바위들도 특이하게 생겼고..

군데군데 굴껍질로 된 곳들이 나타나고..

요 바위들도 특이합니다..

당겨 잡은 우측바위..

좌측 바위는 사람 얼굴 형상을 하고 있네요..

솟대 바위..

요 바위도 특이하고..

좌측 바위는 마치 해골 같네요..

해골바위 당겨 잡은 모습..

조그만 게나 고동들이 다닌 흔적이 예술입니다..

이곳이 실미도 부대가 훈련을 했던 곳으로 지금은 쓰러진 이동화장실만 남아 있더군요..

【실미도(오소리 작전)의 진실】/ SBS '꼬리에 꼬리는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21.3.18일 방송)를 토대로 작성

 

1971년 8월 23일 인천 25세 광순 씨는 10개월 아기와 버스에 올라 친정으로 향하던 버스의 문이 열리더니 20여 명의 군복 입은 남성들이 총을 들고 등장했으며, 이들은 버스 기사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며 청와대로 향하라고 명령하면서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이 버스는 매복한 경찰들과 바리케이드로 사방이 가로막히고 경찰들과 총격전을 펼치다가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이때 박기수라는 분이 승객에게 편지를 보내달라고 하고 시간이 지나 신문에 실렸고 이를 본 박기수의 가족들이 신문사를 찾아 박기수가 죽은 이유에 대해 물었으나 1급 비밀이라 알려주지 않았다.

 

박기수 씨와 선후배 7인은 "국가를 위해서 특수 훈련을 받고 임무를 완수하면 취직과 특별대우“ 약속을 받고 실미도에 도착하니 이들과 비슷한 청년이 있었으며, 섬에 도착하자마자 삭발을 하고 군복을 입고 연병장에 집합한 이들에게 누군가가 ‘귀관들은 이 순간부터 명예로운 군인이며 오소리 작전에 도착한 것을 환영한다’고 하였다. 실미도에 모인 총 31명의 훈련병은 청와대를 급습했던 북한 124부대에 대항해 김일성에 대한 보복을 목표로 만들어진 부대로 이들을 훈련하는 것은 1급 비밀로 중정부와 최고위층만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오소리 작전이라는 이름하에 훈련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증발해도 흔적이 남지 않고,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는 힘없고 가난한 청년들로 그들은 고기반찬 등 특급 배식이 주어졌으나 당근이 단 만큼 채찍은 가혹했다. 이들은 단 3개월 만에 북한 124군 부대를 능가하기 위해 맹훈련을 받았으며, 훈련 도중 사망자도 발생했다.

 

3개월 만에 인간 병기가 된 오소리들. 그들은 실미도 입성 18개월 후 1969년 10월 드디어 작전을 준비했으나 닉슨 독트린이란 암초를 만나 작전이 취소되었다. 무기한 보류된 오소리 작전에 따라 오소리들에 대한 관심과 대우도 확연히 달라졌다. 쌀밥에서 보리밥으로 바뀌었고 반찬 중 고기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월급도 지급되지 않았다. 실제 오소리들에 대한 예산은 증가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이 사라지며 오소리 부대에 대한 관리 감독도 허술해졌고 오소리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들이 모두 착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소리들의 불만은 폭발 일보 직전이던 어느 날 오소리 중 한 명이 기간병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하극상을 벌인 오소리는 동료들에 의해 즉결 처리되었다. 이렇게 즉결 처분당한 이는 총 5명이었고 이런 룰은 서로가 서로에게 공포가 되도록 했다.

 

실미도에 고립된 지 3년, 처음 31명이었던 오소리는 이제 24명만이 남았으며, 오소리들은 극한의 상황에 처했다. 국가는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급식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뱀을 잡고 개밥까지 빼앗아 먹어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상황이 됐다. 오소리들은 청와대로 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자며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고 1971년 8월 23일 월요일 새벽 6시, 오소리 하나가 교육대장실로 숨어서 잠든 교육대장을 제압하고 나머지 오소리들은 총과 실탄을 나눠 갖고 흩어져 총격을 시작했다. 20분간의 총격전으로 기간병 18명, 오소리 2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남은 오소리 22명은 실미도에 고립된 지 3년 4개월 만에 인천에 상륙하여 지나가던 버스를 세우고 올라탄 이들은 무전을 받고 출동한 육군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들은 경찰들의 포위에 전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자폭했다. 이는 실미도에서 나온 지 2시간 반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민간인 6명, 경찰 2명, 오소리 20명, 기간병 18명이 사망했고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정부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무장공비가 민간 버스를 탈취, 서울로 진출하다 저지당한 것이라며 비상계엄령을 발동했다. 얼마 후 국방부는 이들을 실미도에 공군이 관리 수용하던 군 특수범 24명이 격리 수용에 불만을 품고 난동, 관리 인원을 사살한 사건이라 밝혀 졸지에 실미도에 끌려간 오소리들은 군에 있는 흉악범이라는 뜻의 군 특수범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이렇게 다 묻힐 것 같았던 사건은 당시 목숨을 건진 오소리 4명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국회 진상 조사를 시작되었고 생존한 오소리들이 증인으로 참석하였으나 이들은 군의 회유와 협박으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비밀 사항이라 답할 수 없다며 답을 회피하였다.

 

나중에 국가는 이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들은 군사 재판에 넘겼고 이들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선고 70일 만에 사형 집행이 이뤄졌고, 이들의 사형에 대해서는 가족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30년 후인 2002년 월드컵 두 달 전 북파공작원들의 시위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정부에 의해 양성된 공작원이 13,000여 명이며 행방불명이 된 이들은 7,700여 명에 달했고 이 사건으로 실미도 공작원 31명의 존재도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한 목격자의 제보로 35년 만에 실미도 희생자들의 매장지가 발견되었고, 이 곳에서 버스에서 사망한 공작원들의 유해가 발견됐다. 집을 떠난 지 38년 만에 가족들을 유해로 다시 만나게 되었으나 버스 생존자이자 사형수인 4명의 유해는 없었고 이들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미도의 오소리들은 생계를 위해 북파공작원이 되었지만 그들은 국가를 사랑했으나 국가는 그들의 믿음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다.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가난한 국민들은 여전히 국가를 사랑했지만 지금도 국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믿음을 저버리는 일들이 많은 것 같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국가가 되어주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풍화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바위..

요 바위도 표범 같은 동물이 가만히 앉아 먹이를 기다리는 것 같네요...

실미도 부대가 훈련을 한 곳에서 해안을 따라 도는 방법이 있고, 아니면 위쪽의 숲으로 가는 방법이 있는데

우리 팀은 숲으로 진행합니다..

숲을 가로질러 다시 해변으로 내려와 파노라마로 담은 실미도 들어오는 길과 무의도 전경입니다..

실미도 트레킹을 마치고 실미해변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무의도 산행을 할 계획이다..

뒤쪽의 사람들은 조개잡이를 할 계획인 것 같더군요..

실미해수욕장은 2㎞에 달하는 초승달 모양의 해변과 100년 이상된 소나무 군락이 운치 있는 곳이다.

약 1시간 5분에 걸쳐 산행을 마무리하고 실비 해변 주차장에서 식사를 합니다..

 

아래 사진들은 2015,4월 호룡곡산 산행 당시 우측으로 가면서 찍었던 실미도 사진들입니다..

 

묘한 형상의 바위도 보이고..

요것도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네요..

입술바위..

바위들이 하늘을 향하여 우뚝 솟아 있네요..

동굴 안에서 바깥쪽을 담은 모습,,

실미도 구경을 마치고 실비 해변으로 가면서 본모습으로 이 당시에도 징검다리가 보이네요,,

다음은 무의도 국사봉 ~ 호룡곡산 트레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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