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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호남)

이순신 장군의 유적을 찾아서(21. 3.28)

by 산사랑 1 2021.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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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유적을 둘러본 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적들인 벽파진 충무공 전첩비와 충무공 승전공원을 둘러보았다.

 

진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진도로 들어서기 전 진도대교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바로 명량대첩의 현장 울돌목이다. 물때에 따라 잔잔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거센 물살이 든 것을 삼킬 듯이 울부짖는다. 빠른 물살을 이용해 명량해전에서 대첩을 거두었고,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조류발전을 하는 곳이다. 진도대교 아래 서쪽 해안에 있는 충무공 승전공원에는 이순신 장군의 거대한 동상이 울돌목을 바라보고 있다. 한편, 울돌목의 동쪽 입구인 벽파항의 바위 언덕에는 복원한 벽파정이 서 있고 그 뒤로 진도군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벽파진 충무공 전첩비가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들을 살펴보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충무공 승전공원에 있는 동상..

진도 여행 첫째 날 진도로 진압하기 전인 진도대교(울돌목)에서 명량해전의 생각해 본다.

 

진도대교 / 울돌목으로 명량해전의 격전지..

【명량해전】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 원균(당시 이순신 장군은 모함으로 백의종군 중)은 칠천량 해전(1597.7.15. 일)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으나 전함은 12척(명량해전 당시에는 전선 1척이 추가돼 13척이 됨)이 전부였고 병사들도 태부족이었다. 이에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려고 하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수군 폐지 불가론을 펼쳤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명량해전 직전 일본은 200척의 대함대를 보유하고 있고 칠전량 전투에서 이겨 사기도 높아 서해의 해상권과 전라도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명량해전 전날 이순신은 장병들에게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하면서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명량해전 당일 일본은 전선 130척으로 울돌목으로 나왔고, 전투가 시작되자 조선수군은 겁을 먹고 물러서기 시작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의 함선이 버텼다. 이후 적선이 나아오지 못하자 물러섰던 조선수군이 전투에 합류하여 최종 적선 30여 척(31~33)이 격침되었고, 왜군 약 3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전투가 조선수군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전투는 조선이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전투가 되었다. 당시 일본 육군과 수군은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작작전이 무산되고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정유재란은 농성하는 일본군을 조명연합군이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는 공성전으로 바뀌게 된다.

 

이순신 장군의 주옥같은 글귀들로 첫 번째 글귀는 노량 전투, 나머지는 명량 전투 당시에 나온 것들이다..

동백이 예쁘게 반겨줍니다..

진도대교 앞에 명량해전의 주전함인 판옥선이 보이네요..

삼별초를 둘러보고 이충무공의 전첩비가 있는 벽파정으로 이동을 하였다..

벽파정입니다..

【벽파정】

벽파정은 1207년(고려 희종3년) 주로 중국을 왕래하는 국제적 사절을 위로하기 위하여 진도의 관문인 벽파나루 언덕에 창건한 정자이다. 1465년(조선 세조 11년) 중건되었지만 허물어지고 옛 자취만 남아 있었다. 벽파정은 고려 조선조에 걸쳐 문학누정으로 알려지며 많은 시인묵객들이 거쳐 갔다. 또한 국제 사절 뿐만 아니라 발령으로 진도로 들어오고 떠나는 관료들, 유배자들의 작품도 많이 남아 있다.

 

진도군에서는 사업비 5억원을 투입, 고려시대 양식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벽파정의 역사를 고려해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2016. 9월 복원했다. 또 벽파정 내부에는 벽파정을 주제로 한 시문을 진도출신 서예 작가들이 직접 쓴 작품으로 제작·게첨해 옛 선조들의 시조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특히 고려후기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본거지를 옮겨 여몽연합군과 회담 장소로 이용하는 등 대몽항쟁의 근거지와 함께 정유재란 당시에는 이순신 장군이 16일 동안 머물면서 전략을 세우고 수군을 정비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전략적 요새로 알려져 있다. (출처 : 위키 백과를 토대로 재편집)

 

이 충무공 전첩비..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李忠武公 碧波津 戰捷碑)는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1956년 11월 29일 건립 하였다. 2001년 10월 30일 진도군의 향토문화유산(유형유산) 제5호로 지정되었다. 전첩비는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면서 진도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하였다. 전첩비의 구조를 살펴보면 비신 높이 3.8m, 폭 1.2m, 두께 58cm이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

 

이 비는 벽파리 앞동산 산마루에서 동쪽을 향해 서있다. 당초 바위산을 이용하여 천연 거북좌대를 조상(彫像)함으로써 전첩비의 위용과 예술성을 격상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비수(碑首)는 고군면 내산리 구렁골에서 청석원석을 채석하여 작업하였고, 비신은 전북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추월산에서 채석하여 벽파로 옮겨 채석탁마공사를 하였다. (출처 : 위키 백과)

 

이 비문은 전체 888자가 새겨져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중략)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 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公)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다를 지키셨나니 (중략) 15일에 진(津)을 옮기자 바로 그다음 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작은 배로서 330척의 배를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깊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벽파진 전첩비 뒤에 있는 하얀 동백..

벽파진 전첩비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한 폭의 그림입니다..

벽파진을 둘러보고 진도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충무공 승전공원으로 이동하였다.

진도 여행의 시작인 이충무공 승전공원은 충무공의 동상이 있으며 울돌목 해안에 거북선 모양과 판옥선 모양의 데크를 따라 

해안을 걸으며 울돌목, 진도대교, 바다를 한 번에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거북선과 진도대교..

울돌목을 바라보고 있는 국내 최대 30m 높이의 이충무공 동상..

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목포 유달산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