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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호남)

소치기념관 탐방(21. 3. 28)

by 산사랑 1 2021.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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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기념관으로 운림산방 5대의 작품과 수석,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소치기념관】

남종화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운림산방 내에 세워진 소치기념관은 서화류와 수석전시실, 영상실 등이 배치되었으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 미산(米山), 허영(許瑩), 남농(南農), 허건(許健) 등 3대의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소치기념관은 기존의 기념관을 재건축하여 157평의 면적으로 소치선생을 비롯해 5대에 이어져 내려오는 서화 약 50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남화의 계보와 이들의 활약상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층 영상실에서는 운림산방의 역사와 전경, 그리고 소치 허련의 작품과 화맥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서화 전시실에서는 소치 허련의 「송죽매국」, 「양선죽창」, 미산(米山) 허형(許瑩)의 「고사선유」, 「팔곡백납병」, 그리고 남농(南農) 허건(許健)의 「양유춘색」, 「계산유곡」 등 소치의 작품들과 5대에 걸쳐 화가로 활동했던 후손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5대로 이어 내려온 운림산방의 화맥..

소치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소치기념관 입구에 걸려 있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국보 제18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23cm, 가로 61.2cm이다.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그림 끝에 작화 경위를 담은 작가 자신의 발문과 청대 16 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문과 오세창·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이 함께 붙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옆으로 긴 화면에는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제목과 '우선시상'(우선 이상적에게 이것을 줌)·'완당'이라는 관서를 쓰고, '정희'와 '완당'이라는 도인을 찍었다.

 

그림 자체는 단색조의 수묵과 마른 붓질의 필획만으로 이루어졌으며, 소재와 구도도 지극히 간략하게 다루어졌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은 직업화가들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와는 반대되는 문인화의 특징으로 작가의 농축된 내면세계의 문기와 서화 일치의 극치를 보여준다. (출처 : 다음 백과)

 

초대 소치 현련의 작품들..

소치 허련은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많았던 그는 20대 후반에 해남의 두륜산방에서 초의선사의 지도 아래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고 그림을 공부했다. 1840년 33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평생 가장 소중히 모신 스승 추사 김정희를 만나게 되어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받았다. 비록 남도의 섬에서 출생하기는 했지만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질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한 삼절을 이루게 되었다.

 

소치는 허유(許維)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중국 당나라 남종화의 효시로 알려진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라고 명명한 것이다. 당대의 명사였던 석파 이하응(흥선대원군), 민영익, 신관호, 권돈인, 정학연 등 권문세가의 고위 관리들과 교유한 그는 장안에 명성이 높았다. 소치를 일컬어 민영익은 묵신(墨神)이라 하고, 정문조는 여기에 더해 삼절이라고 평했다.

 

소치 허련은 남종화에 심취했다. ‘소치’라는 아호는 스승인 김정희가 내려주었는데 원나라 때 사대가의 한 사람이었던 대치 황공망을 본떠 지은 것이다. 추사는 소치의 화재를 두고 “압록강 동쪽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옛날 선비들은 학문을 이르는 문사철(文史哲)과 문예를 통칭한 시서화를 소양으로 모두 갖추어야만 지식인으로 인정받았다. 소치는 시서화로 당대를 휘어잡은 대가였는데 특히 묵죽을 잘 그렸다.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흔히 추사체를 썼다고 한다.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가요도(秋江晩橋圖)〉, 〈노송도병풍(老松圖屛風)〉 등 다수의 작품이 전해진다. 그의 토착화된 화풍은 아들 형(灐)에게 전수되고, 손자 건(楗), 방계인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계승되어 현대 호남 화단의 주축을 이루었다.

송죽매국..

사군자인 매화·난초·국화·대나무에서 난초를 빼고 소나무를 집어넣어 4폭을 만들고 양쪽에는 허련의 글씨를 집어넣어 6폭 구성으로 그린 작품이다. 왼쪽의 시는 주세붕의 오륜가 2절로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이 몸이 없었을 것이며 그 은혜를 갚고자 하나 하늘 같아 끝이 없도다.’ 하는 뜻이다. 오른쪽에는 명심하고 지켜야 할 오륜의 내용을 나열하고 있다.

 

2대 미산 허형의 작품들..

【미산 허형】

호남 남종화의 실질적 종조(宗祖)라 일컬어지는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넷째 아들로 가업(家業)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진도, 강진, 목포에서 활동하였고 근현대 호남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아들 허건(許楗)과 족손 허백련(許百鍊)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호남화단의 종조(宗祖)’라 일컬어지는 소치(小癡)허련(許鍊)의 넷째 아들로 1862년에 전주에서 태어난 후 1867년 진도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허련은 뛰어난 그림 재주를 가진 큰아들 허은(許溵)이 화업(畵業)을 이을 것으로 여겨 북송의 서화가 미불(米芾)의 성을 따서 미산(米山)이라 호를 지어 주는 등 기대하였으나 1867년 5월에 34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낙담하여 다른 자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다. 허형의 나이 16세 경 우연한 기회에 허형의 그림 재주를 알게 된 허련은 허형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가르쳐 가업을 잇게 하였고 미산이라는 호도 허형이 쓰게 하였기 때문에, 허은을 큰 미산(大米, 伯米), 허형을 작은 미산(小米, 季米)이라 부르기도 한다.

 

노년의 허련에게 간헐적으로 그림지도를 받은 허형은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갔는데 그의 생애는 거주지의 이동에 따라 대략 3기로 구분된다. 즉 진도에 살다 1912년에 강진 병영(兵營)으로 이사하였다가 1921년에 목포로 다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허형이 진도에서 강진 병영으로 이사한 것과 강진 병영에서 다시 목포로 이사한 것은 모두 생활난을 이겨내기 위한 시도로서 전남지방의 상업과 교역지의 이동에 따른 이사라 볼 수 있다. 허형은 1923년에 개최된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 허준(許準)이라는 이름으로 「하경산수(夏景山水)를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1928년 6월 광주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허형은 8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허련의 화법을 본받은 산수화·사군자·괴석 등을 수묵 또는 수묵담채로 그렸다.

 

허형의 작품세계는 진도에서의 활동 시기를 전기로 강진 병영 시기와 목포 시기를 후기로 나누어 보기도 하지만 전후기의 구분은 뚜렷치 않으며 작품의 질적 차이가 크다. 허형의 회화사적인 면에서의 역할은 그의 작품이나 활동보다는 아들 남농(南農) 허건(許楗), 허림(許林)과 족손(族孫)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에게 그림을 가르쳐 호남화단과 근현대 한국화단에 큰 족적을 남기게 해 준 데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여겨진다. (출처 : 다음 백과)

3대 남농 허건의 작품들..

【남농 허건】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8~1987). 조선시대 말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 : 1808 ~ 1893)의 친손자이자 역시 유명 화가인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2 ~ 1938)의 넷째 아들로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목포 상업전수학원을 수료했고, 1925년 소년미술전람회 최고상을 수상했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함으로써 선전 출품을 본격화했으며, 1943년까지 줄곧 입선했다. 1944년 〈목포일우〉로 선전 총독상을 수상했다. 1955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초대작가로 위촉되었고, 그 후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1983년 예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초기에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전통산수·고사인물·화조·영모·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으며, 1930년대 초 한때 이상범의 화풍을 모방하기도 했다. 1942년경에는 일본에서 유학한 허림의 영향으로 필선 위주의 묘법에서 탈피하여 신선한 감각의 점묘화를 그리기도 했다. 〈목포일우〉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그 후 전통적인 필선 위주의 대상묘사로 희귀하여 〈금강산 만폭동〉(1948)·〈서귀 소견〉(1951)과 같은 실경산수와 〈강상 정취〉·〈장강 추색〉 등의 관념산수를 남겼으며, 부분적으로 대상의 입체감을 표현하고 시점을 하나로 통일하는 등 화법상의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남농 허건 선생은 평생을 목포에서 보내면서 한국 화단의 중심에 서서 많은 미술 활동을 하였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1981년에는 평생 수집한 수석 · 자기 · 목물과 운림산방 3대의 작품들을 목포시에 기증하여 향토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987년에는 진도 운림산방을 사재로 복원하여 진도군에 기부 채납함으로써 우리 예술계에서 문화유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등 본보기가 되었다. 선생은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 문화훈장 등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1983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출처 : 다음 백과)

요절 속에 묻힌 천재 허림(3대)의 작품들..

허림은 24세 때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셋째 형인 남농(南農) 허건(許楗)과 함께 우리나라 화단에 독보적인 족적을 남겼다..

운무 산수화 임전 허문(4대)의 작품들..

이후부터 5대들의 작품..

5대 허은의 만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