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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호남)

삼별초의 흔적을 찾아서(용장성, 삼별초공원/21. 3.28)

by 산사랑 1 2021.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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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방을 구경한 후 삼별초 공원, 용장성을 찾아 삼별초의 흔적을 둘러보았다..

 

용장성 고려항몽충혼탑

【진도 용장성】

삼별초(三別抄)가 진도에 설치한 대표적인 항몽(抗蒙) 시설이다. 1270년(원종 11) 6월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승화후(承化侯) 온(溫,?∼1271)을 왕으로 추대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세웠고, 그 뒤 이곳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몽골에 대항하였다. 산성은 진도 북쪽 해안의 산 능선에 있다. 북쪽 해안에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항이 있는데, 울돌목으로 이어지는 조운로의 길목이기도 하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3. 4월 개장한 삼별초 공원

공원에는 삼별초 테마광장, 남도진성과 궁녀 둠벙 미니어처, 농어촌 체험장, 동백 미로공원, 허브 정원, 초화류 원지 등이 있다. 고려 왕궁식으로 건축한 삼별초 홍보관엔 삼별초의 대몽 항쟁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삼별초의 역사와 유물유적 전시, 3D 입체영상 및 포토존 등이 설치되어 있다..

낙도진성 미니어처..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는 사적 제127호로 지정된 남도석성은 백제 시대 매구리현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여겨지는데, 고려 삼별초군이 몽고군과의 항쟁을 위해 이곳에 성을 다시 쌓았으며, 그 후 1438년(조선 세종 20년)에 또다시 성을 보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도석성은 높이 4~6m, 폭은 2.5∼3m가량 되는 성으로 둘레가 610m이다. 둥그런 성벽과 동. 서. 남문이 거의 그대로 있으며, 서문 양옆에 밖으로 튀어나온 치가 남아있다. 성 안에는 민가가 수십 호 들어서 있고, 마을 사람들은 이 옛 성문을 통해 출입한다. 남도석성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쌍운교와 단운교 두 개의 운교(무지개다리)가 놓여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기 직전 마지막 항전을 벌인 곳이라고 여겨지며,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이 이곳에서 전사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남도진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성됐다. 이 곳에서 고려시대 흔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며, 배중손이 이곳에서 전사했다는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설’로서만 전해진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등을 토대로 재작성)

 

 

삼별초 공원 맞은 편의 모습으로 활짝 핀 벚꽃이 노란 유채와 초록의 대지가 어우러져 봄 향기를 물씬 풍기네요.. 

용장성으로 이동하여 마주 진 고려항몽충혼탑..

용장성은 지금은 계곡 옆 산 사면을 따라 축대와 건물 기단석만 남아 있다. 전체 17단 가운데 10단이 발굴됐는데 웅장한 석축과 행궁 터가 당시 삼별초의 위세를 보여준다. 성터 옆에는 용장사와 기념관, 고려항몽충혼탑이 있다.

 

고려항몽충혼탑에는 삼별초의 정의부터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주요인물 등을 10개 표석으로 세워두고 있었다..

고려항몽충혼탑에는 삼별초가 진도를 거점으로 설정한 이유를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개경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독자적 세력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거리 ▲강화도에 집중된 선박을 이용해 남하하기 좋다는 점 ▲땅이 기름지고 농수산물이 풍부해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점 ▲연안 해상 교통의 요충지 ▲인근 지역에 최 씨 무인정권이 소유한 대규모 농장이 있어 지리적 조건을 잘 알고 있다는 점 등이다.

 

진도에서 삼별초를 이끈 배중손 장군의 동상과 항몽 순의비..

용장성 홍보관은 열려 있어 관람을 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대외정책과 대몽 항쟁 역사가 기록되어 있고..

고랴가 몽골에 항복한 후 배중손은 격구장에 모인 삼별초군과 가족을 이끌고 진도로 내려왔으며, 당시 이끌고 온 사람이 약 12,000명 정도라는데 이는 노예문서를 불태워 삼별초와 당시 노예 그리고 그 가족의 수라고 한다..

1232년 ~ 1270년까지 강화에서 항몽을 하던 최 씨 정권이 몽골에 항복한 후 고려원종이 삼별초를 해산하였으나 배중손이 반기를 들어 진도로 내려와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대장군 유존혁과 상서좌승 이신손을 각각 좌ㆍ우승선으로 임명한 뒤 새 정부 출범을 선포한다. 

진도로 내려온 삼별초는 용장산성을 거점으로 삼고 활동을 재개한다. 그 이후 1271년인 원종 12년 5월 15일 여몽 연합군은 진도에 대한 총공격을 결정한다. 연합군은 3군으로 편성됐는데, 김방경과 흔도의 중군이 벽파정으로, 홍다구와 영녕공의 두 아들이 이끄는 좌군이 장항으로, 대장군 김석과 만호 고을마의 우군은 동쪽에서 진입했다. 중군이 벽파정으로 진입하자 삼별초 군은 이를 막으려고 벽파정으로 병력을 집중했다. 이 와중에 좌군이 먼저 성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자, 삼별초 군은 혼란에 빠졌다. 이 전투로 용장성은 결국 함락됐다.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기 직전 마지막 항전을 벌인 곳이 남도석성으로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이 이곳에서 전사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홍보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벚꽃이 만개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용장산성의 흔적..

용장사로 올라갑니다..

용장사입니다..

경내에 조성된 연꽃 모양의 화단..

수선화도 피어 있고..

노란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 있네요..

용장산성에서 삼별초 군이 와해되고 난 후의 흔적은 진도 곳곳에 남아있다.

 

진도군 의신면에는 삼별초 군이 왕으로 옹립한 온(溫)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진다. 용장성이 함락된 후 여몽 연합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홍다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온(溫)의 무덤으로 향하는 고갯길을 왕무덤재라고 부른다. 왕이 넘어가다 죽은 고개라는 뜻이다. 온(溫)의 무덤은 1988년 12월 21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26호로 지정됐다. 온(溫)이 죽었다고 전해지는 이 고갯길에는 현재 주인이 없는 무덤 5~6기가 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이 온(溫)의 묘라고 전해진다.

 

진도군 의신면에는 삼별초 ‘궁녀둠벙’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2001년 10월 30일 진도군 향토문화유산 제14호로 지정됐다. 용장성이 함락돼 피란 중이던 궁녀들은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만길재’를 넘다 몽골군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언덕을 따라 내려가 둠벙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