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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남한산성 길

남한산성(21. 5. 7) 5월 단상

by 산사랑 1 2021.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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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산행(2021. 5. 7일 금요일)】인기 백대명산 제95위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으로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 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官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 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 22) 한 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官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 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다시 개방한 수어장대..

건강셀프등산회 제755차 산행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남한산을 추진하였으며, 산행은 남문유원지남문 유원지 입구 ~ 남문 ~ 동문 ~ 서문 ~ 남문 ~ 남문유원지로 진행하였으며, 약 3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산행은 남문유원지 입구 ~ 남문 ~ 동문 ~ 북문 ~ 서문 ~ 남문 ~ 남문유원지의 원점회귀로 진행..

싱그러운 연초록의 숲이 눈까지 시원하게 해 줍니다..

봄꽃들도 여기저기 자탤르 뽐내고..

조선시대 왕의 출입문인 남문 앞 보호수 한 그루가 결국 고사하여 베어졌네요..

남문 앞쪽에 커다란 철쭉이 곱게 피어 있습니다..

철쭉과 돌탑..

제2 남옹성..

남한산의 성곽길은 성곽 축성술이 특이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일조를 하였다...

병꽃나무 꽃이 곱게 피어 있습니다..

동문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성곽길..

황진이가 심명한 불도를 설법하여 이에 감명받은 기생 하나가 자괴하여 투신자살한 지역인 송암정 앞에 있는 生과死의 나무

멋진 소나무들과 성곽길..

장경사 신지 옹성..

동장대터 앞쪽 성곽은 보수가 시급한데 계속 보수를 하지 않고 있네요..

벌봉으로 갈 수 있는 제3 암문의 모습..

제4암문..

성 안팎의 멋진 소나무들..

문입니다..

서문입니다..

서문에서 남문까지 구간이 보수가 완료되어 모처럼 성 안쪽으로 걸었으며, 수어장대도 들러봅니다..

현재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수어장대(청량산 정상(497m)

《장대》

장대는 전쟁 시 장군의 지휘소로 남한산성에는 5개 장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영조 때 증축한 수어장대만 보존되어 있다.(수어장대는 최초 서장대로 단층이었으나 영조가 2층으로 증축하였다)

 

수어장대에 있는 멋진 소나무..

수어장대에서 남한산성 행궁으로 진행하면서 본 소나무들..

좌전은 종묘(宗廟)를 모신 곳으로 인조를 비롯해 숙종, 영조, 정조 등이 여주 이천 등지에 있는 선왕의 능을 찾을 때 이곳에 들렀다.

 행궁입니다..

행궁은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으로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1626년 건립되었다. 실제 인조 2년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을 한 곳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우리나라 행궁 중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곳이다.

보호수들이 많이 있다..

천흥사 동종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