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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초지진, 광성보, 덕진진 등 안보견학(21. 10. 7)

by 산사랑 1 2021.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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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박물관과 덕포진을 들러본 후 초지진 ~ 광성보 ~ 덕진진 등을 안보견학을 하였다.  

 

초지진 외부 모습..

【초지진】

사적 제225호이다. 조선 효종 7년(1656)에 안산에 있던 초지량영을 강화로 옮겨 진으로 승격시켰다.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지은 요새이다. 초지진에는 군관 11인, 사병 98인, 돈군 (墩軍) 18인, 목자(牧子) 210명 등이 배속되어 강화해협을 수비하였다. 또한 초지돈(草芝墩), 장자평돈(長子坪墩), 섬암돈(蟾巖墩) 등 세 곳의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 돈대와 본진 간의 협공 체제를 통해 수비력을 극대화하였다. 초지진에는 군선(軍船) 3척이 배속되어 있었고, 부속된 3곳의 돈대에는 각각 3개의 포좌(砲座)를 마련하고 화포를 설치하여 강화 해협을 수비하였다.

 

신미양요(1871) 때 미국 해병 450명이 20척의 작은 배로 상륙을 감행하여 초지진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화력의 열세로 결국 점령당했고, 군기고와 화약 창고 등 군사 시설이 모두 파괴되었다. 1875년에는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 위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면서 일시적으로 복구되었던 초지진 포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돈대와 터의 기초만 남아 폐허가 되었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다.

 

현재 초지진의 진사와 주요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음식점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서 축조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타원형의 돈대에는 포좌 3개, 총좌 100여 개, 실제 조선시대 말기에 사용하던 대포가 1문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성채와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조지진 내부 모습..

초지진과 포탄 맞은 흔적이 있는 명품 소나무..

초지진의 소나무는 수령이 약 400년 된 수려한 모습의 노거수로 생물학적인 가치 및 역사문화적 가치도 크다고 합니다..

초지진 내부로 들어가는 문..

초지진 내부에는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으며, 금년 7월 부터 초지진 포함 안보견학 코스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초지진의 대포..

철새들의 이동..

초지진에서 주변을 둘러 봅니다..

초지진을 둘러보고 광성보로 이동합니다..

 

 

광성보 안해루입니다..

【광성보】

강화 12 진보(鎭堡) 가운데 하나이다.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의 돈대(墩臺)와 함께 오두정 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는 돌로 성벽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두어 ‘안해루(按海樓)’라고 하였다.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곧 이 해에 미국 함대가 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하여 물리쳤다. 하지만 4월 23일에 초지진은 미국 해병대 450명의 상륙으로 인해 점령되었고, 이튿날에는 덕진진이 함락되었으며, 곧 광성보가 공격을 받았다. 당시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1823∼1871)과 수하의 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힘껏 싸웠으나 중상을 입어 움직이기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1976년에 파괴된 성가퀴와 문루 등을 복원하고,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 비각(雙忠碑閣)을(雙忠碑閣)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출처 : Daum백과]

 

광성돈대 내부에는 대포, 소포 등이 있네요..

광성돈대를 둘러보고 손돌목 돈대로 갑니다..

호랑가시나무 열매(?)

신미양요 당시 순국 무명용사 탑..

무명용사 묘..

손돌목 돈대입니다..

【손돌목돈대】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축조된 돈대로 덕진 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2778m 2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고종 8년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손돌목 돈대 내부 모습..

신미양요 당시 손돈목 돈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15년 10월 강화 안보체험 당시 사진)..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용두돈대..

【용두돈대】

용두돈대 (龍頭墩臺)는 강화군에 있는 강화 53돈대 중 하나이다. 고려 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시되었으며, 조선 숙종 5년에 돈대가 세워졌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복원된 상태이며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복원된 1977년 당시에는 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용두돈대 안에 있는 대포..

염하강과 강 건너 오전에 들렀던 덕포진을 바라보고..

용두돈대를 둘러본 후 다시 광성보로 이동합니다..

신미양요 당시 순국 무명용사 탑과 쌍충비..

소나무길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어느 가게의 장독대들..

광성보 구경을 마친 후 덕진진에 들렀는데 내부는 통제를 하여 볼 수 없었다..

덕진진 공조루..

【덕진진】

사적 제292호. 지정면적 48,794㎡. 이곳은 돈대(墩臺)와 포대(砲臺) 및 파수청(把守廳)이 있던 곳으로,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66년(현종 7)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다고 하며, 1679년(숙종 5) 강화의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용두돈대(龍頭墩臺)와 함께 축성되었다. 돈대의 위치는 한성으로 통하는 바닷길의 전략요충지로서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싸웠던 격전지이다. 또, 돈대와 포대의 중심부에는 파수청 터가 있는데, 이곳은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는 동시에 포병을 지휘한 장소로 생각된다.

 

덕진진은 1679년에 축조된 용두(龍頭)·덕진 등 2개 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남장(南障)·덕진 등 2개 포대를 관할하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부대가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퇴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치열한 포격전 끝에 미국 함대를 격퇴시켰으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門樓址)만 남게 되었다. 1976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1980년의 발굴조사 당시 7개의 포탄과 상평통보(常平通寶) 2개가 출토되었고, 건물터에서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건물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추정되며, 둘레에 맞담을 쌓듯이 둘러친 석벽이 있었다. 또, 돈대터에서는 1874년(고종 11)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광성보와 맞서 있는데, 시야가 막히고 해협이 매우 좁고 물살이 빠르며 소용돌이치므로 적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출처 : 다음 백과)

덕진진 내부로 들어가서 본모습으로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습니다..

바깥에서 본 덕진진..

복원된 덕진 돈대의 포대(15년 10월 강화 안보체험 당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