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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영남)

동궁과 월지, 월정교, 첨성대 야경(21.11.3일)

by 산사랑 1 2021.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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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저녁식사 후 경주여행 첫째 날의 하이라이트인 동궁과 월지, 월정교, 첨성대 야경을 보았다. 이날은 바람이 없어 멋진 야경을 볼 수 있었으며, 경주박물관 총동문회장인 숙소 주인장의 안내와 해설로 최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멋진 숙소와 식사 그리고 고궁에 대한 멋진 소개를 해 주신 '여여당' 주인장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주박물관 총 동문회장님의 경주 야경을 보는 방법에 대한 조언에 의하면 경주 야경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입장료(1인 3,000원)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 '동궁과 월지'부터 본 후 월정교 주변에 차량을 주차한 후 월정교를 구경하면서 가다 보면 경주 향교와 계림이 나오고 첨성대가 보인다. 첨성대를 둘러본 후 다시 월정교로 돌아와서 차량을 회수하면 경주 야경 구경이 끝난다.  그래서 우리 팀은 동궁과 월지부터 구경하였다.

 

동궁과 월지 야경..

동궁과 월지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연못이 바로 월지인데,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조선의 묵객들이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나타나고 있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2011년 ‘동궁과 월지로 변경되었다. 연못과 어우러진 누각의 풍경이 아름답고, 밤에는 화려한 조명에 비친 야경으로 더욱 유명하다.

 

동궁 및 월지 유적은 1980년에 정화공사를 거쳐 신라 궁궐의 원지(苑池)로 복원되었고, 3채의 누각도 발굴조사 때 출토된 목조 건물 부재와 신라시대의 다른 유적들을 참조하여 복원되었다. 그 밖의 건물터는 주춧돌만 정연하게 확인하여 원래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 (출처 : 위키 백과를 중심으로 재작성)

 

물에 투영된 누각의 야경은 경주 여행에서 최고라 할 것 같다..

바람도 잠잠하여 야경이 더욱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당시 페허가 되어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고 안압지라고 불렀던 것을 1980년 정화공사를 거쳐 현재와 같이 복원하여 아런 멋진 야경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최고의 야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궁과 월지의 야경을 마무리합니다..

동궁과 월지 바깥에 있는 LED 풍선을 파는 노점상도 동궁과 월지 야경에 한몫 거둡니다..

경주 여경의 두번 째 코스는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있는 월정교입니다..

월정교사적 제457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63-1에 위치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교량(橋梁)으로, 조선시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을 고증을 거쳐 2018년 4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경주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라 시대에는 명칭이 깨끗할 정(淨) 자를 쓴 월정교(月淨橋)였으나 고려 시대에 정할 정(精) 자를 쓴 월정교(月精橋)로 바뀌어 현대까지 이른다.

 

1984년 11월 26일부터 1986년 9월 8일까지 진행된 두 번의 복원 설계를 위한 자료수집과 발굴조사를 통해 나무로 된 다리가 있었음을 처음으로 확인하였고, 2008년부터 2013년까지의 공사로 길이 66.15m, 폭 13m, 높이 6m의 교량 복원이 완료되었다. 2016년 4월부터 시작된 다리 양 끝의 문루(門樓) 2개 동을 건립하는 공사를 진행하여 2018년 4월 준공되었다.

 

문루(門樓) 2층에는 출토된 유물과 교량의 건축 역사를 보여주는 디지털 전시관을 설치하며, 월정교의 역사와 복원과정 관련 영상도 상영한다. 경주시의 신라 왕경 8대 핵심유적 복원 정비사업 중에서 첫 번째로 완성된 월정교 복원사업은 이후 진행될 황룡사, 신라왕궁, 쪽샘지구, 신라방 등의 복원 정비공사에도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다만 월정교 자체는 실제로 존재했던 다리이나 오늘날 남은 것은 석축과 일부 부재뿐이기 때문에, 교량과 누각의 형태는 대부분 상상에 의존하였다. 이 탓에 '복원'이 결정된 시점에서부터 여러 가지 논쟁이 벌어졌다. 월정교의 본래 모습을 100% 복원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으되, 경주시라는 도시의 역사성을 재건하고 관광상품을 늘리자는 취지를 학술적 목적보다 우선한 것이다. (출처 : 나무 위키 등에서 발췌)

 

월정교 현판 글씨체는 신라시대의 명필인 김생과 최치원의 글씨체로 작성을 하였는데

이곳 남쪽 문루에 설치된 현판의 글씨체는 김생의 글씨체이며, 반대편 북쪽 문루에 설치된 현판의 글씨체는 최치원의 글씨체이다..

월정교 다리에서 경주 박물관대학 총동창회장님의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 및 월정교에 대하여 듣고 있습니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연을 트기 위해 일부러 유교(楡橋)에서 강으로 뛰어내렸던 일화를 월정교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원효대사는 옷을 말린다는 핑계로 요석공주 집에서 며칠 머물었고 그때 생긴 아이가 이두문자를 만든 설총이라고 한다.

 

이곳 북쪽 현판의 글씨체가 최치원의 글씨체입니다..

월정교를 지나 첨성대를 보러가는 길에 경주향교와 계림이 있어 잠시 향교 표지석 앞에서 설명을 듣고 첨성대로 갔다..

계림에 있는 수령 1300년 된 회화나무(계림과 향교는 경주여행 마지막 날 들렀다)..

첨성대 야경입니다..

경주 첨성대국보 제31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돤 첨성대로, 구조는 기단부·원주부·정자형두부로 나누어진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암으로 총석재수는 365개 내외이고, 기단부, 원주부의 외벽과 정자형 두부는 다듬어져 있으나 내벽은 다듬어져 있지 않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나오며 〈고려사〉에도 이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1960년대까지 정설이었지만 반론도 제기된다. 구조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천문대와는 다르지만 소박한 의미의 천문 관측대라고 할 수 있다.(출처 : 다음 백과)

 

사방을 돌아가면서 둘러본 후 숙소로 돌아와 경주에서의 하루 여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돌아가면서 본 경주 문화재 야행 관련 등입니다..

다시 본 월정교의 야경(북문 쪽)..

다시 본 월정교의 야경(남문 쪽)..

멋진 야경입니다..

 

경주여행의 첫째 날은 하곡리 은행나무를 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세계문화유산인 독락당, 옥산서원, 양동마을, 도리마을 은행 숲, 그리고 동궁과 월지/ 월정교/ 첨성대 야경까지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았다, 이들 중에는 처음 가보는 곳도 있고 이미 여러 차례 갔다 온 곳도 있지만 모두 가 볼만 한 곳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동궁과 월지 등의 야경은 그 자체로도 최고였지만 최고의 가이드에게 설명을 들으면서 걸을 수 있었던 최고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