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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세계문화유산

익산 미륵사지(22. 2.19) 세계문화유산

by 산사랑 1 2022.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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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 30대왕 600-641)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 낭무(화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미륵사가 백제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하며, 신라 최대의 가람인 황룡사가 화엄사상의 구심점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황룡사가 1탑 3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탑 3금당식 가람배치이며, 3개의 금당에 모두 지하공간이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다. 황룡사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화엄사상, 미륵사는 미륵사상을 가람에 구현하고 있다. 미륵사는 일반 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미륵사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3탑 3금당이 배치된 사찰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백제 무왕이 세운 곳으로써 최근 발굴된 사리기를 통해 창건 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백제사와 불교미술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등을 토대로 재편집)

 

익산 미륵사지 / 석탑..

미륵사지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네요..

미륵사지는 한국관광공사에서 2021 한국관광 백선에 선정될 만큼 아름답고 가치 있는 문화재이자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시대별 미륵사지 변천사..

국보 11호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서탑) 해체 내용..

동탑이 보이네요..

연못에 비친 동쪽 구층 석탑의 아름다운 모습..

당간지주와 동쪽 구층 석탑..

보물 236호인 당간지주..

당간지주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 우에. 세운 기둥, 즉 지주를 말한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보물로, 높이 395cm이며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 2개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 보고 있다.

 

1993년에 9(높이 27.67m)으로 복원된 동원 구층 석탑,,

동원 금당(불상을 모신 법당)터..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석탑(국보 11)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로 현재 높이 14.24m이고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이. 석탑은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 귀퉁이의6층까지만 남아있으나 본래는 9층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1974~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에 의하여 동쪽 탑은 목탑이 아니라 석탑임이 밝혀져 이른바 동서 쌍탑의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동탑은 그 뒤 발굴조사에 의해서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9(높이 27.67m)으로 복원되었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이 탑의 양식이 그 이전에 성행하였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기 때문이다.

 

미륵사지 석탑은2001 10월부터 해체·보수작업 및 정비에 착수하였고, 2017 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으며, 2018 6월 복원된 석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수리과정에서 기존 석재를 포함한 부재 1627개를 조립했으며, 준공된 상태에서는 높이 14.5m,  12.5m, 무게 약 1830t이다. 층수는 9층과 6층의 논란 끝에 기존 탑의 자취에 따라 6층으로 준공되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9 1 14, 이탑의 탑신 1층 심주(중앙기둥)를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륵사지의 창건 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다. 이를 통해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백제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금판 앞뒷면에 194자로 된 사리 봉안 기록판에는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이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가 향가 서동요를 신라에 퍼뜨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 뒤 선화 공주가 미륵사를 건립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다른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석탑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이며 동시에 가장 큰 규모의 탑이다.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으로 평가받는 기념비적인 석탑이다. 특히 석탑 내부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를 통해 백제시대의 사리봉안 방식이나 탑 건립에 따른 의식, 발원자와 발원 동기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는 매우 크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등을 토대로 재편집)

이탑의 탑신 1층 심주(중앙기둥)를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진산사리가 발견되고..

 

2009년 1월 14이탑의 탑신 1층 심주(중앙기둥)를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륵사지의 창건 년대와 창건주를 기록한 사리봉안 기록판과 금제 사리 항아리 등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다이를 통해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인 서기 639년에 백제인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다른 각도에서 본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동탑..

서탑의 경우도 9층으로 추정하나 발견 당시의 모습인 6층으로 준공했다고 하네요..

미륵사지터에는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가마터가 있었으며, 이곳은 조선시대 기와 가마터가 있던 곳..

미륵사지를 들러 본 후 미륵산 산행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