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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충청)

배론성지(22. 4.12일)

by 산사랑 1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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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당일 여행의 첫 번째로 배론성지를 찾았다. 이곳은 2년 전에 처음 들렀던 곳인데 성지가 조용하여 마음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종교를 떠나 가 볼만 곳이다..

 

배론 성지 전경..

배론성지

제천, 원주 간의 국도변에 위치한 배론성지(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 소재)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 교회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은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이다. 배론성지는 지리적으로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산악지대로 외부와 차단된 산골이면서도 산길로 10리만 가면 박달재 마루턱에 오르고, 이어 충주, 청주를 거쳐 전라도와 통하고, 제천에서 죽령을 넘으면 경상도와 통하며 원주를 거쳐서 강원도와도 통할 수 있는 교통의 길목으로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재한 산골짝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이기 때문에 유래한 것으로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徘論)이라고도 한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

 

마음을 비우는 연못으로 배론성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인 것 같더군요..

포토 포인터라 할 수 있습니다..

동굴 성모상..

최양업(도마) 신부 상..

최양업(崔良業)[1821~1861]은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인 모방(Maubant)에 의해 김대건(金大建)·최방제(崔方濟)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에서 공부하였고, 1844년(헌종 10) 김대건과 함께 부제(副祭)가 되었다. 사제 서품을 먼저 받고 페리올 주교와 함께 김대건 신부가 귀국한 이후 최양업은 여러 차례 귀국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849년(헌종 15) 상하이에서 마레스카(F. Maresca)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출국한 지 13년 만인 1849년 말에 귀국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충청도 진천의 배티를 사목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전국에 걸쳐 있는 100여 개의 공소를 방문하면서 전교 활동에 힘썼다. 1861년(철종 12) 영남 지방의 전교 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문경에서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말 베르뇌(S. F. Berneux) 주교의 집전으로 제천 배론으로 이장, 안장되었으며, 김대건 신부가 ‘피의 순교자’였던 것과 비교하여 최양업 신부는 ‘땀의 순교자’라고 일컬어졌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십자가의 길 1처 ~ 14처는 최양업 신부 묘소 가는 길에 설치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 14

십자가의 길(라틴어: Via Crucis)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시간(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서방 기독교의 기도이며, 고통의 길이라고도 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보통 사순 시기 동안 매주 금요일과 성금요일에 행하며 성공회에서는 보통 사순절의 마지막 주인 성주간에 매일 행한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초기에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았으나 14세기에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기도문이 체계화되었다. 이 기도의 목적은 당시 이슬람교 세력의 예루살렘 정복 때문에 성지 순례 여행에 차질을 빚게 되자 유럽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과정에서 주요한 장면을 떠올리며 기도로서 영적인 순례 여행을 도우려는 것이었다. 이 신심은 프란치스코회의 전교 활동에 의해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하였다. 16세기까지는 각 처의 숫자가 고정되지 않았으나, 클레멘스 12세(1730-1740년)에 의해 현재의 순번으로 명시화되었다.(출처 :위키백과)

 

최양업 신부 묘소 뒤로 소나무들이 울창합니다..

최양업 신부 묘소..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 교장 푸르티에 신부(좌), 교사 프티 니콜라 신부(우)..

성요셉 신학당(1855년 - 1866년)

성 요셉 신학당은 1855년 프랑스 선교사 메스트로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때 교우촌 회장 장주기 요셉(1803-1866)이 자신의 집을 신학당으로 봉헌하였다. 1856년부터 푸르티에 신부(1856-1866)가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1862-1866)가 교수로 재직 하였다. 신학 교육은 라틴어과와 신학과로 나뉘어 있었고, 신학과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다. 또한 두 서양 신부는 신학생들을 교육시키면서도 교리서의 번역과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만들었다.

 

1866년 3월 2일 서울에서 남종삼 요한을 체포하러 온 포졸들이 신학교를 급습하여 두 신부를 체포하였는데, 3월 11일 서울 새남 터에서 순교하였다. 장주기 요셉은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3월 30일에 순교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때 흰 무지개 다섯이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성 요셉 신학당은 한국 교회 최초의 신학교임과 동시에 조선 최초의 근대신 교육 기관이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출처 : 배론성지 홈페이지)

 

1855년에는 배론 공소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진 곳..

적목련이 이제 피기 시작합니다..

무명 순교자의 묘 뒤쪽의 백목련은 활짝 피었고..

황사영이 8개월 동안 토굴에 은신하여 백서를 작성하던 곳..

황사영 백서는 황사영이 1801년 8개월간 제천 배론의 토굴에 은신해 있으면서 작성하였다. 내용에는 조선 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설명하고, 특히 신유박해 동안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술하였다. 이어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위한 방안을 적었다. 원본은 1801년 9월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압수되었다가, 1894년 교회에 입수되었다. 그 후 1925년 조선 교구장 뮈텔(Mutel)[민덕효(閔德孝)]이 원본을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하여,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황사영(黃嗣永)[1775~1801]은 1790년(정조 14) 사마시에 입격(入格)하여 진사가 되었다.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운 뒤 1790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후 전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1795년(정조 19) 주문모 신부를 만난 뒤 더욱 활동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여주와 원주를 거쳐 제천 배론에 피신하여 조선 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책을 작성하였다. 이문건을 북경에 보내려고 하였으나 9월 29일 체포되었다. 그 뒤 서울로 압송된 뒤, 11월 5일 사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수선화가 고운 모습으로 피어 있더군요..

옹기 굽는 토기..

무명 순교자의 묘..

이 다리를 건너 최양업 조각공원으로 갑니다..

순교자들의 집..

이곳은 유해 안치실로 아직 자리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신부가 되신 최양업 신부(2002년 동상 제막)..

1996년도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

인생 여정에 지름길이 없다고 서두르지 말라고 합니다..

묵주의 기도 집..

최영업 신부 기념성당은 배론의 지형을 본 때 배 밑창 모양으로 지어진 성당은 구원의 방주를 상징합니다..

인생미로로 미로는 우주의 중심이신 하느님, 내 마음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나의 참된 모습을 상징합니다..

 

다음은 제천 의림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