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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수원 화성 행궁(22. 5.29)

by 산사랑 1 2022.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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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행궁】

 

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곳으로 그 어느 행궁보다 크고 웅장하였으며 활용도도 높아 경복궁의 '부궁'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곳이다. 화성행궁의 규모는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현저히 크며 정조 20년(1796)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행궁은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정면 중앙에는 약간 안으로 들여 정문인 신풍루(新豊樓)가 있고 중축 선상에 내삼문인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重陽門)이 있으며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가장 안쪽에 배치되었다. 봉수당 서북쪽으로는 모서리끼리 연결된 장락당(長樂堂)이 있는데 이곳이 왕의 침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장락당 정면에는 경룡관이라는 누각 형식의 삼문이 있다. 장락당 향좌측의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5량 18칸 건물이다. 복내당 앞에는 유여택(維與宅)이라는 5량가의 8칸 건물이 있다. 정당 향우측에는 초창 때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이 있다. 낙남헌은 본래 읍치의 득중정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 규모는 7량가로 14.5칸이고 낙남헌 뒤쪽으로는 용마루가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꺾인 노래당(老來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행궁 앞으로는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신풍루 향좌측에는 외정리소, 비장청, 서리청, 남군영 등이 있고 향우측에는 집사청, 북군영, 우화관 등이 있다. 원래 읍치 건물에는 남북 군영과 비장청, 무기고 등이 있고 나머지 외정리소, 서리청, 집사청 등은 성곽 축조 때 지은 것들이다.

 

1874년(고종 11)에는 2만 냥을 들여 행궁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 때 까지도 잘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구한 말 개화의 물결과 함께 수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1910년 세워지면서 행궁 일부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촬영된 사진에는 신풍루 뒤로 좌익문이 보이고 중양문과 유여택, 정당인 봉수당과 장락당, 내당인 복내당 등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행궁 건물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자혜의원이 도립병원으로 바뀌면서 크게 증축되었고 수원 농업시험소 등 여러 기관이 설치되고 주변에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1923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부근에 신풍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낙남헌 건물이 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1991년에는 수원 의료원 건물이 이전되면서 1993년에 수원시에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였다. 화성 축성 200주년인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현재도 복원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출처 : 다음 백과)

 

행궁 출입문인 신풍루..

신풍루는 1790년 정조 14년에 세워졌으며, 처음에는 진남루라 했는데 이후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가 되었다. 신풍이란,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정조대왕이 수원을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신풍루를 통과하니 광장에 ‘화성행궁 달빛정담 야간개장’을 알리고 있네요..

신풍루를 통과하니 넓은 광장에 ‘화성행궁 달빛 정담 야간개장’을 알리고 있었다. 행궁은 대장금의 촬영지로도 유명한데 신풍루 한쪽 멋진 나무 아래 장금이 커플의 모형이 있었고 반대쪽에는 소원의 나무가 있었다. 좌익문과 중양문을 지나면 정당인 봉수당이 나왔다.

소원의 나무..

좌익문..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으며,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중양문..

1790년(정조 14)에 완성된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봉수당..

봉수당】

봉수당은 정면으로 삼문 형식의 중양문(中陽門), 좌익문(左翊門)을 두고, 행궁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와 일직선이 되는 위치에 동쪽을 향하도록 앉아 있어, 행궁 전체의 중심축을 이룬다. 봉수당은 정조 13년(1789)에 지은 건물로 1790년 원행(園幸) 때에 정조가 직접 편액(扁額)을 써서 장남헌(壯南軒), 또는 화성행궁(華城行宮)이라 하였다.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 때에 정조가 머무르던 행궁 정당(正堂)이었으며, 평상시에는 부사(府使)가 집무하는 동헌(東軒)으로 쓰였다. 정조 19년(1795)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을 축하하는 뜻을 담아 정조가 새로이 봉수당(奉壽堂)이라는 당호를 내려 전참판 조윤형(曺允亨, 1725-1799)에게 편액(扁額)하게 하고, 회갑연 진찬례(進饌禮)를 여기서 거행하여 혜경궁에게 수복(壽福)을 기원하며 잔을 올린 곳이다.(출처 : 다음 백과)

 

정조대왕과 왕비가 경의왕후(혜경궁 홍 씨)에게 회갑연을 베풀었던 "장수를 받들어 빈다"는 진찬연의 모습..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방인 경룡관으로 당태종의 궁전 이름이다..

조의 침전이었던 장락당..

혜경궁 홍 씨의 회갑잔치상..

수원읍 고을 수령과 가족들이 거주하던 복내당..

임금의 수라상으로 아침, 저녁 두 번 나오고 기본 음식 외 12가지 찬이 나온다고 합니다.

낮에는 간편한 죽이나 다과가 나온다고 하니 당시엔 식사를 두 끼만 한 것 같습니다..

드라마 대장금 세트들도 전시하고 있고..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봉수당 뒤편..

봉수당 뒤편 길을 따라 낙남헌과 노래당으로 갑니다..

당시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인데 앞쪽에 공사 중이라 사진을 담을 수 없어 예전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당시 때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

낙남헌과 연결되어 있는 노래방은 정조가 늙으면 머물려고 했던 곳..

봉수당으로 나옵니다..

신하들을 접견하던 유여택..

사도세자의 죽음을 체험하는 뒤주..

화성에서 거행되는 국왕의 행사비용을 총괄하는 외정리소..

조선시대 타악기들..

소원의 나무 안쪽에는 집사청이 있습니다..

행궁의 잡무를 맡아보던 집사청..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현재는 2단계 복원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행궁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행궁 출입문인 신풍루 앞에 350여 년 된 멋진 보호수가 있고..

화성 트레킹과 행궁 관람을 마치고 막걸리 한잔으로 하루의 즐거웠던 시간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