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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헌인릉 답사와 한강나들이(22. 10. 7)

by 산사랑 1 2022.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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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인릉

 

서초구 헌인릉길에 자리 잡은 헌인릉은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과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을 합쳐 이름 붙인 곳이다. 서울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우거진 숲이 일품이며, 헌릉에는 아름다운 오리나무 숲에 둘러싸인 습지가 있다. 원래 왕릉 뒤에는 우거진 숲을 계획적으로 조성했고, 특히 봉분 뒤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가 나무 중의 나무로 제왕을 뜻하기 때문이다.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는다. 지대가 낮은 홍살문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헌릉이 그런 예다. 오리나무는 장수목으로 옛날에 5리마다 심어놓고 거리 표시를 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낙엽 활엽수의 교목으로 습하고 비옥한 정체수가 있는 토양에서 잘 자란다. 목질이 붉은 것은 오행 중 남측을 상징하며, 말라도 갈라지지 않아 가구 제조용으로도 많이 사용한다.

 

태종 때는 유달리 천재지변이 많았다. 태종이 사망하기 하루 전 지진이 일어났고, 홍수에 마소가 떠내려갔고, 태종이 만년에 애용한 정자 기둥이 무너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못내 안타깝게 생각한 태종은 자신이 죽어 혼이 있다면 이날 비를 내리게 하겠다고 유언을 남겼다. 이후 해마다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이 되면 비가 왔는데, '태종우'라고 하는 이 비는 헌릉의 혼유석 밑 하전석의 네모난 구멍 속에 고였다고 한다.

 

학자들이 헌인릉에 주목하는 이유는 400년 이상의 시간차를 두고 조성된 두 개의 왕릉에서 조선 초기와 후기 양식을 비교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인릉이 있고 우측으로 길을 따라가면 헌릉이 있다.(출처 : 과학문화유산답사기)

 

국방동우회 회원들과 대모산 산행 전에 헌인릉을 방문하였다.

인릉과 헌릉 위지..

홍살문 뒤로 인릉이..

인릉 들어가는 길..

인릉은 제23대 순조(1790~1834)와 순원왕후(1789~1857) 김 씨의 합장 묘이다. 사적 제194호.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1834년 순조가 죽자 파주 교하의 장릉 국내에 초장 했다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1856년(철종 7) 지금의 자리인 헌릉 오른쪽으로 이장했으며, 다음 해 왕비가 죽자 합장했다. 능제도는 외형상 일반적인 단릉과 같이 혼유석 1좌만을 두고, 2실로 합장했으며, 장명등은 영릉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출처 ; 다음 백과)

헌릉으로 이동합니다..

헌릉이 보이네요..

헌릉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황후의 능..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를 같은 언덕에 무덤을 달리해 안장한 쌍릉으로 앞쪽에서 봤을 때 왼쪽이 태종의 능, 우측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다른 능과 달리 홍살문이 일반 도로와 면해 있어 폐쇄된 것처럼 보이지만 홍살문에서 가능한 한 뒤로 가서 앞을 향하면 참도를 거쳐 정자각, 2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잘 보인다. 참도는 다른 왕릉과 달리 어도와 신도가 구분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며 신계와 어계도 일반적인 3단이 아니라 2단이다.

태종의 능이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크고 석물이 많은 이유는 세종의 효심 때문이다. 세종은 다른 왕자들을 물리치고 자신에게 선위 한 태종에 대한 효심으로 태종의 무덤에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태종의 은덕으로 예상치 못한 왕이 된 세종은 자신이 죽으면 부모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으로 남겨놓았다. 그에 따라 묘역을 헌릉 옆에 모셨는데 왕가에서 단종의 사사, 사육신 사건 등이 일어나자 결국 18년 후 여주 영릉으로 옮겼다.

헌인릉을 둘러본 후 대모산 산행을 하였다..

산행 중,,

대모산 기슭에 있는 조선 전기 왕릉의 원찰 혹은 능침으로 추정되는 건물터로 태종의 원릉 또는 세종의 영릉 관련 시설로 추정..

헌인릉과 세종이 처음 묻힌 영릉이 있던 서울 강남구 대모산 기슭에서 조선 초기 왕릉의 원찰, 혹은 능침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가 발견되었다. 수서동 540번지 일원 5,200제곱미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능선 기슭에서 남북 방향을 따라 길이 68미터에 달하는 대형 석축이 드러난 것이다. 석축의 단 위에서는 현재까지 건물 터 6개 동과 건물 터 중앙을 차지한 박석과 벽돌을 깐 마당, 아궁이와 배수로 시설 등이 밀집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인근에서 기와를 생산, 공급하던 가마터 4기도 함께 발견되었으며, 기와 폐기장 3곳과 묘역으로 추정되는 시설도 확인되었다.

 

학자들은 청자나 백자 등의 유물을 볼 때 조선 전기 중에서도 상당히 빠른 시기에 속하며, 격 또한 상당히 높아 태종의 헌릉 또는 이곳에서 여주로 옮겨간 세종의 영릉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했다. 이 중 석축과 건물 터는 현장 보존이 확정되어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가 제공될 것으로 보인다.(출처 : 과학문화유적답사기에서 발췌)

산행 후 오리구이로 식사를 하고..

한강 나들이..

바람이 잠잠하여 건물들이 한강에 투영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