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6~7일차(23. 6.28~29일.수/목) 이슬라마바드-탁실라-나란
전통이 살아있는 도시 이슬라마바드(Islamabad) / 간다라를 대표하는 탁실라(Taxila)유적 탐방(투어) 나란(Naran)으로 이동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건축한 탁실라 다르마리지카 유적지..
탁실라 / 파키스탄의 라왈핀디 북서쪽으로 약 35㎞ 떨어진 유적지
고대에 이곳은 3개의 큰 무역로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크게 번영했다. 무역로 중 하나는 그리스 작가 메가스테네스가 '왕도'(王道)라고 표현한 동부 인도에서 오는 길이고 또하나는 서아시아에서 오는 길이며, 나머지는 카슈미르와 중앙 아시아에서 오는 길이다. 이들 무역로의 중요성이 사라지면서 이 도시도 몰락했고, 5세기에 마침내 훈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탁실라는 인도와 그리스·로마 문헌에 언급된 것과 두 중국인 순례자 법현(法顯)과 현장(玄奘) 법사의 기술을 통해 알려졌다. 문자 그대로는 '깎아지른 바위의 도시', 즉 '타크샤의 바위'라는 뜻을 가진 타크샤실라(그리스 저자에 의해 탁실라로 음역됨)는 힌두교 비슈누 신의 한 화신인 라마의 동생 바라타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 Rāmāyaṇa〉에 기록되어 있다. 도시 이름은 바라타의 아들로 그곳의 첫번째 왕이었던 타크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전승에 의하면 자나메자야 왕이 뱀을 제물로 바치는 성대한 제사를 드릴 때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Mahābhārata〉를 처음으로 낭송했다고 한다. 왕은 이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불교문헌, 특히 자타카는 이 도시를 간다라 왕국의 수도로서 또 학문의 대(大)중심지로 언급했다. 간다라(간다리)는 BC 5세기에 만들어진 아케메네스(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의 비문에 사트라피, 즉 속주(屬州)로 적혀 있다. 따라서 간다라의 수도인 탁실라는 1세기 이상을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BC 326년 인도를 침략했을 때 탁실라의 지도자 암비(옴피스)는 이 도시를 넘겨주고 모든 것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처분에 맡겼다. 이 마케도니아 정복자를 수행한 그리스의 역사가들은 이 도시를 '부유하고 번영하는, 또 잘 통치되는 곳'으로 기술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지 10년이 못 되어 탁실라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세운 마우리아 제국에 합병되어 그의 지배기간중 지방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쪽에서 온 정복자들에게 지배되어온 탁실라의 역사에서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3세대에 걸친 마우리아 통치 후에 이 도시는 박트리아의 인도그리스 왕국에 의해 합병되어 BC 1세기초까지 인도그리스인의 통치를 받았다. 그 뒤를 이어 중앙 아시아에서 온 사카족, 즉 스키타이족과 파르티아족이 AD 1세기 후반까지 이곳을 지배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설에 의하면 파르티아 시대에 사도 토마가 탁실라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외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으로서 티아나의 신(新)피타고라스파 철인 아폴로니오스가 유명하다(AD 1세기). 그의 전기 작가 필로스트라토스는 탁실라가 대칭적 구도로 설계된 요새화된 도시이며 규모면에서는 니네베에 필적한다고 기술했다.
탁실라를 파르티아족으로부터 빼앗은 것은 쿠줄라 카드피세스 지휘하의 쿠샨족이었다. 위대한 쿠샨 통치가 카니슈카는 이곳에 3번째 도시 시르수흐를 세웠다(2번째는 시르카프로서 인도그리스 시대에 세워졌음). 4세기에 사산 왕조의 샤푸르 2세(310~379)가 탁실라를 정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그곳에서 발견된 수많은 사산 왕조 동전이 입증해준다. 사산 왕조 지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동진의 법현이 대략 5세기초에 이 도시에 왔을 때는 불교성지와 사원이 융성한 곳이었다. 그후 곧 훈족에 의해 약탈당했고 이후로 다시는 재건되지 못했다. 당나라 현장(玄奘)이 7세기에 이곳에 와서 도시가 폐허화되었음을 보았고, 그후로는 이곳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발굴작업은 인도 고고학의 아버지 알렉산더 커닝엄 경이 1863~64, 1872~73년에 시작했는데 사라이칼라로 알려진 현지의 유적터가 고대 탁실라임을 확인했다. 그후 존 마셜 경이 이 작업을 계속하여 20여 년 간 고대 유적터와 그곳의 기념물들을 모두 발굴해냈다. 탁실라의 건축유적에는 비르 토루(土壘) 지역, 시르카프의 궁궐터, 잔디알과 피팔라 사원, 기리 요새, 모라모라두와 자울리안 사원, 다르마라지카·발라르·쿠날라 탑(고분) 등이 있다
기념물에 사용된 여러 다른 유형의 석공술에서 각각 만들어진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가장 초기의 유적은 비르 토루의 유적들이다. 궁궐터는 아시리아의 궁궐터와 동일한 유형으로 설계되어 몇몇 입구가 있고 그 외곽에는 성이 둘러처져 있다. 가장 오래된 건물들은 잡석을 쌓아 만들었고 그후 계속해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거대한 불교 사원, 몇몇 작은 신전 및 구획으로 된 거주용 집들이 발견되었다.
2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상이 있는 신전은 돌출된 코린트식 벽기둥이 앞면에 있고 중간 벽면에는 움푹 들어간 곳이 몇 개 있어서 흥미롭다. 그밖에 테라코타와 도자기, 작은 청동기들, 구리와 철로 만든 물건들, 염주알, 보석, 인도-그리스, 파르티아, 초기 쿠샨 왕조의 동전 등 많은 골동품들도 발견되었다. 궁궐터 내부의 구식 구조물과 남쪽 구역의 돌로 쌓은 성벽 사이의 단층 관계는 1944~45년에 영국의 고고학자 R.E. 모티머 휠러 경의 발굴에 의해 밝혀졌다
치르 토페(Chir tope)로 잘 알려진 다르마라지카 유적은 지면을 주변보다 높여 바탕을 조성하고 지은 원형 구조물이다. 커다란 탑을 작은 기도실들이 둘러싸고 있다. 주탑(主塔) 주변의 건축물에는 뚜렷이 다른 3가지 양식의 석공술이 쓰인 점으로 보아 건물 건축작업이 여러 시대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카로슈티의 은판(銀板)으로 두루마리 비문과 석가의 사리가 들어 있는 작은 금궤가 한 기도실에서 발견되었다. 비문에는 "위대한 왕이며 왕중의 왕, 하늘의 아들인 쿠샤나"(쿠샨의 정복자 쿠잘라의 아들인 비마 카드피세스인 듯함)에게 건강을 내리게 하려고 BC 136년에 노아차 시 출신의 우르사카라고 하는 한 박트리아인이 사리를 사원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유적터에는 또한 부처와 보살의 여러 조각들도 있다. 인공 구릉 위에 세워진 잔디알 사원은 그리스의 고대 사원들과 매우 유사하다. 이 사원의 이오니아식 원주와 돌출된 벽기둥은 거대한 사암(砂岩)으로 만들어졌다. 스키타이-파르티아 시대에 세워진 이 사원은 필로스트라토스가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의 생애 Life of Apollonius of Tyana〉에서 언급한 사원일 것이다. 잔디알 사원은 불교 사원이 아니지만 절 하나와 두 군데의 탑터가 발견된 자울리아 유적은 불교유적이다.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탁실라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비하르의 날란다에 있는 것과 같은 강연장과 거주지역을 갖춘 대학 도시는 아니었다. 탁실라에서 교사는 제자들을 유숙시켰고 그들은 하숙비를 스승과 가족에게 현금이나 용역의 형태로 지불했다. 불교 사원에서는 학생과 승려가 원하면 음식을 제공했다.(출처 :다음백과)
8시 30분 숙소를 나와 약 55분 달려 탁실라(Taxila) 유적지에 도착하였다.뛰어난 돌 건축 문화를 가졌기에 ‘잘린 돌’이라는 뜻을 가진 탁실라는 페샤와르(Peshawar)와 더불어 간다라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일정 관계로 탁실라 유적지 중에 3곳만 구경 하였는데 오늘은 비가 조금 내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간다라 미술의 보고’ 로 불리는 탁실라박물관이었다. 간디 어머니 마야 관련 등 많은 유물들을 둘러보았고 알렉산드리아 대왕 원정에 따른 헬라니즘 시대의 영향을 받은 불상과 태국에서 부처님 이빨 두개를 탑에 넣어 기증한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입술에 화장을 한 것도 있다고 한다..
‘간다라 미술의 보고’ 로 불리는 탁실라박물관으로 들어 갑니다..
탁실라 박물관
이슬라마바드에서 폐샤와르(Peshawar)까지 가는 그랜드 트렁크 로드(Grand Trunk Road)의 35km 지점에 위치한탁실라 박물관은 파키스탄 펀잡 지역 탁실라에 있는 박물관이다. 탁실라는 고대부터 교통 요충지였으며 수많은 민족의 침입을 받아 다양한 문화가 혼재된 지역이다. 이곳에는 비르(Bhir) 언덕, 시르카프(Sirkap), 시르수흐(Shirsukh) 등 3대 유적이 있고, 많은 불교 사원도 지어져 있다. 이들 고대 도시 유적을 통틀어 탁실라 유적이라고 부른다. 탁실라 박물관은 탁실라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 간다라 미술 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1층 규모의 작은 박물관이지만 이곳에 전시돼 있는 작품의 가치가 높아 박물관을 ‘간다라 미술의 보고’로 부르기도 한다. 간다라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 받는 모흐라 모라두 대탑에서 출토된 좌불상을 비롯해 금과 은, 철로 만든 다양한 불상과 조각들, 식기와 동전, 항아리 등 일상용품이 전시돼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간다라 미술의 최고 걸작인 모흐라 모라두에서 발굴된 일곱 스투파의 복제품을 볼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뛰어난 돌 건축 문화를 가졌기에 ‘잘린 돌’이라는 뜻을 가진 탁실라의 정교한 사리탑들..
부처들이 칸에 들어 있습니다..
목만 있는 불상과 코가 없는 불상들은 불교 탄압 때의 여파인 것 같다..
얼굴에 눈과 코, 입이 없는 불상들..
알렉산드리아 대왕의 원정 이후 헬라니즘 영향을 받은 불상들로 곱슬머리와 그리스풍의 옷주름을 볼 수 있습니다..
간다라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불상을 처음으로 제작한 것. 그때까지 불교에서는 초월적 존재를 형상화하는 것을 금기시하여 부처를 표현할 때 참선하는 자리에는 금강보좌를, 설법시에는 법륜을, 전법은 불족적 등으로 상징화하여 표현했다. 이때를 무불상시대라 하고,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스투파가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1세기경부터 그리스인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불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세기부터 4세기초까지 암록색, 검은색 편암으로 불상이 주로 제작되었고, 이후 6세기까지는 소상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불상양식과 문화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한반도, 일본으로 전해져 불교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하나의 돌을 깍아 이런 조각들을 7세기 이전에 만들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목이 없는 불상과 목이 잘린 불상..
나무에 도금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불상,,
2~3세기의 아름다운 두상들..
도자기, 가위, 접시 등 생활용품들도 전시되어 있고..
부처님 이빨 두개를 태국에서 탑에 넣어 기증한 불탑..
‘잘린 돌’ 혹은 ‘잘린 머리’라는 뜻으로 대승불교와 불교예술이 크게 꽃 피웠던 탁실라 박물에서의 시간을 마무리 합니다. 탁실라 박물관을 둘러본 후 다르마리지카를 둘러보았다. 박물관에서오른쪽 길을 따라 잠시 달려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오르니 다르마라지카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3C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 대왕 시기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건축한 곳(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의해 지어진 불탑이 있기에 다르마라지카로 이름이 생긴 것)으로 다양한 불상이 출토되었으며 탁실라 박물관 등에 전시되어있다. 무너진 불탑 뒤쪽으로는 스님들의 주거 공간의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권력을 의미하는 손과 존경을 의미하는 코, 그리고 생명을 의미하는 머리가 잘린 불상들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이곳 유적지들도 제대로 복구되지 않고 있었다.
다르마리지카..
다르마라지카 사원
탁실라에서 가장 큰 사원인 다르마라지카에서도 기원전 3세기 이래 불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아쇼카가 세운 것으로 추측되는 다르마라지카의 대탑 둘레에는 원형 기둥들이 세워졌으나, 곧 기둥 대신 작은 탑들이 대탑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샤카,파르티아 시대까지 세워진 탁실라의 많은 건물은 기원후 30년경에 일어난 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선된 석축법에 다라 불교사원의 건축 활동은 위축되지 않고 활발하게 이어졌다. 신피타고라스파 사상가인 튀아나의 아폴로니우스(4~97)가 탁실라에 온 것은 지진이 일어난 뒤인 44년경이었다. 그는 카불을 거쳐 탁실라에 들렀다가 중인도까지 여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필로스트라투스가 쓴 아폴로니우스의 전기는 아폴로니우스가 탁실라에서 본 도시의 장관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폴로니우스가 전하는 대로라면 시르캅은 이미 상당히 재건되어 옛 영화를 회복하고 있었다. 인도 서북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다고 생각되는 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와 스와트의 붓카라 스투파도 모두 기단이 원형이었다. 쌍두취탑은 기단이 방형
현지역은 불교 승원이고 반대편에 탑이 있다. 아소카왕 시대의 수도가 탁실라라 한다.
당시 돌 벽은 지진에 대비하여 2중 형태로 조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부처의 발인데 아래쪽은 엄청 큰 것을 알수 입습니다..
거대한 나무가 보였는데 반얀트리 국가의 나무라고 한다. 그 옆에 보리수도 엄청 크다. 다르마라지카 불교유적지를 둘러보니 정말 엄청난 것을 느꼈다.
반얀트리라는 국가의 나무라고 합니다..
엄청난 크기의 보리수도 있고..
탑도리 같이 스투파를 돌아봅니다..
다음은 탁실라 제2의 고대도시 시르캅(Sirkap)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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