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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경복궁 설경(24. 2. 22)

by 산사랑 1 2024.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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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의 대설이 내린 다음 날 오후 경복궁을 방문하여 멋진 설경을 볼 수 있었다. 평일이라서 그런 지 관광객을 많지 않아 구경하기는 좋았으며, 외국인 관광객들은 다소 보였다. 오전에만 방문하였으면 더 좋은 경치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멋진 날이었다..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 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맛보시기 바란다. (출처 ; 문화재청)

 

경회루의 멋진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향원정도 맛깔스럽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흥례문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홍례문(興禮門 興禮 예를 일으킨다)

일곽의 가운데에는 백악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가 있고, 어구의 중앙에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어구(御溝)는 경복궁뿐만 아니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에도 있으며, 고려 궁궐, 중국의 궁궐, 베트남의 궁궐에도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궁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구와 영제교는 근정문(勤政門 - 勤政 : 정치를 부지런히 함)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조회 시에 신하들이 도열할 위치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했다. (출처 ; 문화재청)

 

조하를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의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던 북악을 등지고 있는 근정문..

근정문(勤政門 勤政 정치를 부지런히 함)

근정문에서는 왕과 문무백관이 조참의식(소조회)을 행하였다. 또는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 번째 왕이다. 근정문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영제교의 북쪽으로 정 2품 이상이 서고, 남쪽으로는 정 3품 이하가 자리를 잡았다. (출처 ; 문화재청)

 

유화문(維和門 - 維和 : 維는 어조사, 和는 온화함) : 신료들이 서쪽 궐내각사와 빈청을 드나들던 문이다.

조하를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의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던 근정전..

근정전(勤政殿-勤政 정치를 부지런히 함)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다.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조회의식)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大禮) 또는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정전인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중요 행사를 치를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조하를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의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던 근정전/ 근정전 내부의 어좌..

왕이 신하들과 일상으로 정사를 논의하던 편전인 사정전

사정전(思政殿 思政 선정(善政)을 생각함)

편전(便殿)은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이다. 또 종친, 대신들과 함께 주연을 즐기고,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한 곳이다. 경복궁의 편전 영역은 사정전(思政殿 - 思政 : 선정(善政)을 생각함)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정전(勤政殿 - 勤政 : 정치를 부지런히 함) 영역으로 통하는 사정문과 침전영역으로 통하는 향오문 사이에 사정전, 만춘전(萬春殿 - 萬春 : 만년의 봄, 오랜 시간 국가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 천추전(千秋殿 - 千秋 : 천년의 가을, 국가 기틀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이 남향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행각이 감싸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왕의 침전인 강녕전..

강녕전(康寧殿 康寧 편안하고 건강함)

사정전을 뒤돌아 가면 행각에 연이어 있는 향오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내진연)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침전이다. (출처 ; 문화재청)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교태전(交泰 천지음양이 잘 어울려 태평을 이루다) / 왕비의 침전

세종 때에 임금이 오래 머물 곳이라 하여 규모를 크게 하여 고친 후 온돌을 수리하는 도중 화재가 발생하는 등 세 차례의 화재를 당하였다. 역시 경복궁 중건공사 때 다시 세워졌으나 1918년 창덕궁의 침전이 소실되자 그 목재를 조달한다는 목적으로 헐렸으며 1920년 창덕궁의 희정당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지금의 강녕전은 1995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강녕전의 공간 구성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 넓은 월대를 꾸민 것이 특징이다. 이 월대는 의례를 행하는 공간으로 내진연, 외진연 등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잔치 때에는 주변에 보계(補階)를 설치하여 보조하기도 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불교 행사가 자주 열렸던 함원전..

경회루..

경회루는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경회루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에 중건된 것이다. 다시 지어진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회루는 중건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왔다. 연못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동·서·남·북의 담장이 철거되었으며, 2004년~2005년에 각각 북쪽과 동쪽 담장이 복원되었다. 경회루로 가는 3개의 돌다리에는 벽사의 의미를 가진 동물상이 새겨진 엄지기둥을 놓았다. (출처 : 문화재청)

경회루 안의 관람은 사전에 예약을 한 사람들만 입장이 가능한데 오늘은 관람자가 없습니다..

눈 덮인 나무가 마치 매화꽃이 핀 것 같네요..

경복궁에서 가장 운치가 있는 향원정과 그 일대가 눈으로 덮인 모습이 연못에 투영된 모습 정말 멋집니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눈 덮힌 향원정과 취향교(아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파노라마로 본모습들로 정말 아름답습니다..

눈으로 덮인 북악산을 뒤로 하고 경복궁에서 가장 운치가 있는 향원정과 취향교의 투영된 모습 정말 멋집니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눈 덮인 향원정과 취향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향원정과 취향교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인공의 섬을 만들어 2층의 육모지붕을 얹은 정자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 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가는 섬에는 나무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라 하였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 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풍경입니다..

눈 덮힌 향원정과 취향교의 투영..

향원정과 취향교 뒤로 국립민속박물관이 서 있네요..

향원정 위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고..

운치 있는 소나무 뒤로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이고..

고종이 머물렀던 장안당..

장안당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곤녕합의 누마루인 옥호루(玉壺樓 - 玉壺 : 옥으로 만든 호리병)..

담장 너머로 멋진 소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네요..

멋진 소나무가 있는 수정전..

수정전
근정전 서쪽에 자리한 전각이다. 월대 위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된 꽤 큰 건물로, 궁궐에 부속된 관청이 밀집한 궐내각사 권역의 중심이었다. 세종 때는 집현전이 있던 곳이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67년(고종 4년) 중건했고, 고종 때는 군국기무처와 내각이 이곳에 있었다. 주변에 있던 2백여 칸의 다른 궐내각사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수정전만 남아있다. 2차 복원 정비 사업의 2단계가 진행될 2026년~2034년에 주변 건물들을 복원할 예정이다.

 

동십자각..

동십자각은 궁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서있는 각루(角樓)이다. 궁성 담장이 헐리면서 현재와 같이 길 한가운데 서있게 되었다. 동십자각은 서십자각과 함께 궁성 전면 양 모서리에 궁궐 안팎을 감시할 수 있다(출처 :문화재청)

 

하얀 눈으로 덮인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뒤로 북악산이 우뚝 서 있고..

광화문光化 군주에 의한 덕화(德化)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 데 사용하였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또한, 광화문 홍예 개판에는 ‘사령(四靈)’인 기린, 봉황, 거북이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1968년 광화문 복원 시 그려진 것을 현황 모사한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폭설이 내린 다음날 오후에 찾은 경복궁으로 오전에 찾았으면 더 멋있는 모습을 담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