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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서울, 경기)

여주 영릉과 신록사(24. 5.29) 탐방

by 산사랑 1 2024.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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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동우회 등산팀에서 오늘은 여주 영릉과 신록사를 걸었다. 쾌청한 날씨 속에 힐링을 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영릉과 신록사를 구경한 후 여주쌀밥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세종대왕릉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로,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합장릉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세종전 밖의 잔디밭엔 전시되어 있는 해시계들로 좌로부터 현주일구, 정남일구, 천평일구, 앙부일구 등이다..

좌로부터 일성정시의(해시계와 별시계), 물시계인 자격루,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등이다..

좌로부터 앙부일구의 받침대인 일구대, 비의 양을 측정하는 측우기, 별자리 관측하는 혼창, 천체관측기구인 혼천의 등이다.. 

좌로부터 하천의 물높이를 재는 수표, 바람의 방향과 세기 측정 풍기대, 천문관측기기인 소간의 등이다..

좌로부터 고도와 방위, 시간을 측정하는 간의, 24절기를 측정하는 규표..

 

세종대왕의 재실(2020년 완공)은 새로 지어 운치가 없네요..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봉이실합장릉으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영릉(英陵)】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봉이실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광주(廣州, 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憲陵)에 있던 것을 1469년(예종 1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지세는 층층이 해와 달의 모습을 띠면서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형국이라, 최고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재실과 세종대왕 동상이 오른쪽에 서 있고, 왼쪽에는 세종대왕 기념관인 세종전이 있다. 세종전 안에는 집현전 학사도를 비롯한 여러 유물들이 대왕의 업적을 기리며 모작 혹은 진품으로 진열되어 있고, 세종전 밖의 잔디밭엔 해시계·자격루·관천대 등이 전시돼 있다.

 

봉문 앞에는 4개의 돌로 받친 혼유석 2개를 놓아 합장릉임을 표시했다. 봉분 둘레는 돌난간을 두르고 동자기둥에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넣었다. 그 앞에 팔각으로 다듬어진 장명등과 능 앞으로 석상·석마·문인석·무인석을 배치했다. 정자각은 합장 봉분에 축이 맞추어진 배치이나, 홍살문의 위치가 틀어져 있어 참도는 꺾인 축형이 되었다. 현재의 홍살문은 후대에 옮겨진 듯하며 원래의 위치에 초석이 남아 있다. 또한 수복방과 수라간의 위치가 정자각 바로 옆까지 올라간 특수한 예에 속한다. 1977년 능역 성역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마다 이곳에서 한글날을 전후하여 각종 행사가 열리며, 평소에도 찾는 이들이 많다. 매년 5월 15일(양력)에 세종대왕릉 정자각 일원에서 세종대왕탄신 숭모제전(崇慕祭奠;탄신일을 기념하여 올리는 제사)을 봉행하고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출처 :위키 백과)

 

세종대왕릉을 보기 위해 이동합니다..

세종대왕 합장릉으로 참으로 소박합니다..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합장릉인 영릉(英陵)에서 인증을 합니다..

영릉이 이곳 여주로 오게 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이두희 총무님..

세종대왕릉은 당초 헌인릉의 인릉자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에 의하면 그 자리는 장자들이 단명을 하는 자리라고 하여 세조 때부터 이전을  하려고 하였으며, 예종 1년인 1469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을 하였다.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전 결정 후 지관들을 보내어 명당자리를 찾도록 하였으나 지관들이 명당자리를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며, 그중 한 지관이 이곳을 지날 때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비를 피하기 위해 둘러보다 보니 움막이 있어 그곳으로 비를 피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이 명당자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묘가 있었고 지관이 비를 피한 곳이 묘역이었다. 지관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한양에 도착하여 역시 명당을 찾지 못하였다고 고하면서 한 곳에 조선을 100년 연장할 수 있는 명당이 있는데 이미 묘가 있다고 하니 당시 조정에서 그 묘를 이전하고 세종대왕릉을 이전토록 결정을 하였다. 그 묘는 광주이씨 집안의 묘로 이미 이런 사실을 예견하여 땅을 파 보니 이전을 하려고 하면 연을 날려 연이 떨어지는 곳으로 이전을 하라고 하여 그곳으로 이전을 했다고 한다. 현재 광주이씨 집안은 세종대왕릉에는 참배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조선 500년 역사에서 400년대는 영정조 시대로 조선의 마지막 르네상스로 이때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약 세종대왕릉을 여주로 이전하지 않고 조선이 400년 후 망했다면 일제의 침략을 막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왕의 숲길을 효종대왕 릉으로 이동을 합니다..

우측(앞쪽)에 있는 능이 인선왕후릉, 좌측(뒤쪽)에 있는 능이 효종대왕릉..

【영릉(寧陵)】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 상하 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구리(九里) 건원릉(建元陵) 부근에서 1673년(현종 14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정자각 뒤 봉분은 오른쪽이 왕비릉이고 왼쪽이 효종릉이다. 왕비릉엔 둘러쳐진 곡장이 없고 왕릉에는 곡장이 있다. 영릉은 다만 쌍릉이면서 앞뒤로 엇비슷하게 위치를 잡고 있어 지형과 상관없이 애당초 ‘나란히’ 놓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의 석물들은 똑같이 갖춰져 있는데, 배치와 양식은 조선 전기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영릉의 재실은 조선왕릉 재실 중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겨져 있어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재실 안에 심어진 수령 300년의 회양목은 키가 크고 나무의 모양이 양호한 노거수로 평가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출처 :위키 백과)

인선왕후의 능은 때를 새로 입힌 것 같네요....

효종대왕릉..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효종왕릉 재실에 있는 수령 300년이된 천연기념물인 회양목..

【여주 효종대왕릉 회양목】

2005년 4월 30일에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300년으로 추정된다. 나무의 높이는 4.4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는 동쪽이 29㎝, 서쪽이 43㎝이다. 수관 폭은 동서 방향이 4.4m, 남북 방향이 6.5m이다. 나무는 지상 15㎝ 높이 정도에서 동서 방향으로 분지 하여 전체적으로 반구형(半球形)의 단정한 수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가지의 끝이 지상 약 1m 높이까지 늘어져 있다. 효종대왕 영릉 재실 안에 위치하며 주변에 향나무와 느티나무 노거수가 함께 있다.

 

회양목은 경상북도 북부, 충청북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의 석회암지대에 주로 자생하는 늘 푸른 넓은잎 나무인데 나무 높이가 4.4m에 이르는 큰 나무는 흔하지 않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로 이와 같이 재실 내에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어 생물학적 가치가 큰 노거수이다.

영릉을 돌아본 후 봉미산 신록사를 찾아 일주문으로 들어갑니다..

신록사는 대부분 평지나 산에 위치한 여타 절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절이다. 

강월헌이라는 6각의 정자와 삼층석탑..

신록사 앞의 남한강에는 황포돛배가 다니고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라고 한다..

강월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사이로 관음보살상이 보입니다..

보물 225호인 다층석탑..

보호수인 600년 된 향나무(높이 5m. 둘레 1.3m, 지정연도 1982년. 지정번호 여주-65)..

신록사 전경입니다..

풍경에 물고기는 없고 야간에 불을 밝히려는 등이 있네요..

신록사 구경을 마치고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을 합니다..

여주쌀밥집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집니다..

반찬이 정갈하고 맛이 있어 모든 회원이 만족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