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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충청)

수원 화성 행궁(24.10.12) 탐방

by 산사랑 1 2024.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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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행궁】

 

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곳으로 그 어느 행궁보다 크고 웅장하였으며 활용도도 높아 경복궁의 '부궁'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곳이다. 화성행궁의 규모는 전체 557칸으로 다른 행궁에 비해 현저히 크며 정조 20년(1796) 화성 축조와 함께 지어졌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로 마련된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수원부 치소로 사용되었다.

 

행궁은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정면 중앙에는 약간 안으로 들여 정문인 신풍루(新豊樓)가 있고 중축 선상에 내삼문인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重陽門)이 있으며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가장 안쪽에 배치되었다. 봉수당 서북쪽으로는 모서리끼리 연결된 장락당(長樂堂)이 있는데 이곳이 왕의 침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장락당 정면에는 경룡관이라는 누각 형식의 삼문이 있다. 장락당 향좌측의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5량 18칸 건물이다. 복내당 앞에는 유여택(維與宅)이라는 5량가의 8칸 건물이 있다. 정당 향우측에는 초창 때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이 있다. 낙남헌은 본래 읍치의 득중정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건물 규모는 7량가로 14.5칸이고 낙남헌 뒤쪽으로는 용마루가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꺾인 노래당(老來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행궁 앞으로는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신풍루 향좌측에는 외정리소, 비장청, 서리청, 남군영 등이 있고 향우측에는 집사청, 북군영, 우화관 등이 있다. 원래 읍치 건물에는 남북 군영과 비장청, 무기고 등이 있고 나머지 외정리소, 서리청, 집사청 등은 성곽 축조 때 지은 것들이다.

 

1874년(고종 11)에는 2만 냥을 들여 행궁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 때 까지도 잘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구한 말 개화의 물결과 함께 수원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1910년 세워지면서 행궁 일부가 파손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촬영된 사진에는 신풍루 뒤로 좌익문이 보이고 중양문과 유여택, 정당인 봉수당과 장락당, 내당인 복내당 등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행궁 건물까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자혜의원이 도립병원으로 바뀌면서 크게 증축되었고 수원 농업시험소 등 여러 기관이 설치되고 주변에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1923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부근에 신풍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낙남헌 건물이 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1991년에는 수원 의료원 건물이 이전되면서 1993년에 수원시에서 화성행궁 복원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였다. 화성 축성 200주년인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2023년 우화관과 별주권역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119년간 이어 온 화성 행궁 파괴와 복원 여정이 마무리 되었다. (출처 : 다음 백과)

 

화성에 도착하여 트레킹을 하기 전에 행궁을 들러 보았다 / 화성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

 건강셀프등산회 제959차 산행은 수원화성이 추진되어 산행 전에 행궁을 먼저 둘러보았다. 행궁은 2023년 우화관과 별주권역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119년간 이어 온 화성 행궁 파괴와 복원 여정이 마무리되어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둘러보았다.

 

축제행사장..

신풍루 앞에 있는 보호수들..

 화성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 / 정각 9시에 입장을 합니다..

신풍루는 1790년 정조 14년에 세워졌으며, 처음에는 진남루라 했는데 이후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가 되었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정조대왕이 수원을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야간 개장을 하고 있습니다..

좌익문..

좌익문은 중앙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정조 14)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으며,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600년 이상 된 소원의 나무로 한 쪽면만 살아 있습니다..

 

행궁의 잡무를 맡아보던 집사청..

집사청 담장 너머로 '소원의 나무'가 보이고..

23년에 완공된 '낙남헌 동행각'으로 우화관과 낙남헌의 경계를 이루는 17칸의 행각이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로 들어가 좌익문 오른쪽에 있는 중약문으로 들어가면 이번에 복원한 우화관 공간이 나온다. 넓은 운동장과 우화관 내삼문이 보이고 내삼문으로 들어가면 우화관이 있다. 우화관은 정청과 동헌, 서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청 안에는 발굴 당시의 사진과 유물을 전시하고 복원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어 우화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우화관 서쪽에는 낙남헌이 있는데 낙남헌 동쪽에 동행각, 작은 연못과 취병을 복원했다.

 

2단계 복원공사로 모습을 드러낸 우화관..

우화관(于華觀)은 화성유수부의 객사이다. 객사란 지방 수령이 매달 1일과 15일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 앞에서 의례를 행하는 곳이면서 관아를 방문하는 사신이나 관리들이 머물던 곳이다. 별주는 왕이 행차할 때 음식을 준비하고 관련 문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수원화성이 축성되기 이전인 1789년에 건립한 우화관은 '신읍영건공해간수성책', '한글 정리의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전도 병풍' 그림을 참고해 복원했다고 한다.

정조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신 화령전..

235년 전 화성행궁을 건립한 정조(조선 22대 임금, 1776~1800년 재위)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화령전(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이다. 종묘가 선왕의 혼령을 모셔 놓고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라면, 영전은 선왕이 생존해 있던 때를 그리워해 생전의 초상화를 모셔두는 곳으로 지금은 전주한옥마을 근처의 경기전(태조 어진 봉안)과 이 화령전만 남았다. (출처 : 대전일보)

 

회령전(사적 11호)으로 들어갑니다..

운한각 앞에 기품 있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정조대왕의 영전이 모셔진 운한각의 오른편으로는 우천에 대비하여 복도각이 설치되어 이안청으로 연결됩니다. 이안청은 정전인 운한각의 영정을 임시로 봉안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안청 오른쪽 앞으로는 풍화당이라는 바람소리 즐거운 재실이 있습니다. 화령전에 있는 운한각과 이안청, 복도각 등 건물 3동은 조선시대 왕실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창건 당시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아 5년 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됐을 만큼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옆에서 본 기품있는 소나무..

1992년 표준영정으로 그려진 정조의 어진이 80여 년만에 화령전에 봉안됐고,

2004년 다시 그려진 어진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구군복(具軍服)을 입은 정조의 어진..

풍화당 (風化堂)은 재실(齋室)로 제향이 있을 때 의례를 주관하던 제관이 머물던 곳입니다.

회령전 제사에 사용하는 물을 길어 올리는 어정..

제사 때 쓰는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과 제사에 필요한 그릇이나 물품 등을 보관하는 전사청입니다.

당시 때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洛南軒)으로 건물 규모는 7량, 가로 14.5칸입니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2023년 우화관과 별주권역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119년간 이어 온 화성 행궁 파괴와 복원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낙남헌 뒤쪽으로 용마루가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꺾인 노래당(老來堂)은 정조가 늙으면 머물려고 했던 곳(23.11월 사진)..

낙남헌 앞의 연못과 취병/ 취병은 고리버들이나 향나무 등 침엽수의 가지를 지지대에 엮어 문이나 병풍모양으로 만든 생울타리..

활을 쏘는 정자인 득중정..

낙남헌 뜰에 있는 멋진 향나무로 한쪽만 살아 있습니다..

임금이 행차 시 정전으로 쓰여진 건물인 봉수당..

회갑연 진찬례(進饌禮)를 거행하여 혜경궁에게 수복(壽福)을 기원하며 잔을 올린 곳..

봉수당】

봉수당은 정면으로 삼문 형식의 중양문(中陽門), 좌익문(左翊門)을 두고, 행궁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와 일직선이 되는 위치에 동쪽을 향하도록 앉아 있어, 행궁 전체의 중심축을 이룬다. 봉수당은 정조 13년(1789)에 지은 건물로 1790년 원행(園幸) 때에 정조가 직접 편액(扁額)을 써서 장남헌(壯南軒), 또는 화성행궁(華城行宮)이라 하였다.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 때에 정조가 머무르던 행궁 정당(正堂)이었으며, 평상시에는 부사(府使)가 집무하는 동헌(東軒)으로 쓰였다. 정조 19년(1795)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을 축하하는 뜻을 담아 정조가 새로이 봉수당(奉壽堂)이라는 당호를 내려 전참판 조윤형(曺允亨, 1725-1799)에게 편액(扁額)하게 하고, 회갑연 진찬례(進饌禮)를 여기서 거행하여 혜경궁에게 수복(壽福)을 기원하며 잔을 올린 곳이다.(출처 : 다음 백과)

 

 

현재 공사 중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미로한정 등 아래 사진들은  23.11월 방문 시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미로한정 가는 길에 있는 군사시설이었던 내포사..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 한가로움이다’라는 의미의 미로한정/ 미로한정에서 본 행궁의 모습으로 신풍루, 좌익문 등이 보이네요..

미로한정은 당초 육면정이었으나 1795년 미로한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미로한정이란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 한가로움이다’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으로 정조가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넘겨준 후 이곳에 내려와 한가롭게 노년을 즐기려고 했다고 한다. 

 

봉수당 뒤편..

수원읍 고을 수령과 가족들이 거주하던 복내당 / 복내당 부엌..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던 유여택..

유여택과 유여택에 붙어 있는 공신루라는 누마루..

화성에서 거행되는 국왕의 행사비용을 총괄하는 외정리소..

조선시대 타악기들..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방인 경룡관으로 당태종의 궁전 이름이다..

조의 침전이었던 장락당..

정조 모친인 혜경궁 홍 씨의 회갑잔치상..

화장하는 상궁과 거처..

환관들의 일상..

사도세자의 죽음을 체험하는 뒤주...

비장들이 근무하는 비장청 / 하급관리들의 근무처인 서리청..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영용 외영(화성을 지키는 부대) 군사들이 거주하는 남군영..

화성 행궁 관람을 마치고 트레킹을 하기 위해 팔달문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다음은 수원 화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