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둘러본 후 마지막 코스로 국립부여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국립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부여 시내 남동쪽 금성산 기슭에 위치한 국립부여박물관은 1929년 재단법인 ‘부여 고적 보존회’가 발족되어 백제의 문화재. 유물을 모아 부소산 남쪽에 자리한 조선시대 관아의 객사에 전시하게 된 것이 국립부여박물관의 시작이다. 1939년부터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 분관’이라 하여 비로소 ‘부여박물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1970년에는 부소산 남쪽 기슭에 새 박물관을 지어 부여지역을 비롯하여 백제권에 흩어진 백제문화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였다. 1993년 8월 6일 현재 위치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모습으로 개관하였다.
국립 부여 박물관은 61,429㎡의 면적에 4개의 전시실과 야외 유물전시장을 마련하고 약 1,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건물 설계 당시 한국의 전통양식을 도입하여 8각형의 중정(中庭)을 중심에 두고 상설전시실인 선사실·역사실·불교미술실과 야외전시실을 배치하였다. 선사실에는 부여 지방을 중심으로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유물들을, 역사실에는 사비시대의 백제 유물과 삼국시대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불교미술실에는 사비시대 백제의 불교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야외전시실에는 불상과 석탑 등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1909년 부여 부소산성 내부에서 발견 당시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는 붕괴된 채 조각이 났다고 한다..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보물 제21호】
비신 높이 3.35m, 비신 두께 31cm, 이수 높이 1.14m, 이수 너비 1.33m.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에서 온 장수 유인원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실질적인 당비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현내면에 있는 부소산에 세워져 있던 것을 8·15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몸돌의 앞면과 머릿돌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비문의 글도 심하게 마멸되어 알아보기 힘들다.
비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릿돌에는 좌우 양쪽으로 용 3마리씩이 서로의 몸을 휘감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유인원의 생애와 활동상에 대해 적혀 있다. 〈대동금석서 大東金石書〉에서는 이 비문을 유인원이 썼다고 밝히고 있으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않고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663년(문무황 3)으로 추정된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 16-1번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출처 : 다음백과)
보물 107호인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扶餘普光寺址大普光禪師碑】
보물 제107호. 높이 1.97m.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을 새긴 비로, 1281년(고려 충렬왕 7)에 세워졌다.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가신리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놓았다. 비문 앞면은 1358년(공민왕 7)에 새겼고 뒷면은 1750년(조선 영조 26)에 추가했다. 현재 비받침과 비머릿돌이 없고, 비몸만 남아 있다. 비몸의 가장자리는 덩굴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러 새겼다. 석재는 편마암이고 위쪽의 양끝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비문 윗부분에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碑)라는 전액(篆額)이 있고, 비제(碑題)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중창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重創碑)로 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설법을 펼치다가 1351년 65세로 입적했다. 죽으면서 문도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않도록 당부하여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고려 후기의 석비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출처 : 다음백과에서 발췌)
부여 천왕사지 석조여래입상..
【부여 천왕사지 석조여래입상(부여 천왕사지 石造如來立像)】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1933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천왕사 절터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옮겨져 있는 불상이다. 몸체에 비하여 머리가 크며 어깨와 하체가 거의 일직선으로 곧바로 서 있는 자세이다. 얼굴은 살이 올라 풍만하며 눈은 반쯤 감겨있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으며,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아무런 무늬 없이 발 밑까지 내려져 있다. 오른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왼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게 표현되어 전체의 균형을 잃고 비례가 맞지 않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충청도 일원에서 유행했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으로 추정된다.(출처 : 위키백과)
부여 동사리 석탑(扶餘 東寺里 石塔)..
【부여 동사리 석탑(扶餘 東寺里 石塔)】
원래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있던 석탑이다.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몸돌이 올려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각 면마다 무늬를 얕게 새겼고, 위층 기단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네 모퉁이마다 돌출된 꽃조각을 두었다. 탑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는데, 2층 몸돌부터는 심하게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 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지금의 장식은 훗날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고려시대에 유행한 석탑양식이다. (출처 : 위키백과)
박물관 안으로 들어 갑니다..
보물 194호인 부여석조
【부여석조扶餘石槽 보물 194호】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1.57m, 지름 1.42m. 현재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원래는 박물관 건물 동쪽의 우물자리 아래쪽으로 1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기왕에 추정하기로는 왕궁에서 쓰였던 석련지(石蓮池) 관련 유물로 보아 왔으나, 실상은 석가모니 열반 이후의 세계에 있어서 여래의 정법을 상징하는 이른바 '깨어진 불발(佛鉢)'을 표현한 조형물이라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를 통하여 밝혀졌다. 『연화면경(蓮華面經)』에 교리적 근거를 두고 있는 바로서, 인도의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성행하던 간다라의 봉발(奉鉢) 신앙과 불발(佛鉢) 조형이 백제에 전래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불교 미술품이다.
한 개 돌로 된 ‘工’ 자형 받침대 위에 둥근 꽃봉오리 형태의 석조가 한 개 돌로 조성되어 있다. 받침대는 상·중·하대의 뚜렷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아무런 장식이 없다. 위에 놓인 석조는 입구가 약간 오므라들면서 밖으로 둥글게 원호를 그리며, 바닥은 평평한 듯하나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석조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8개의 세로줄을 새기고 그 사이에 글을 새겨 넣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글은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으로,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의 1층 탑몸돌에 새긴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 석조는 안쪽면과 바깥쪽면, 그리고 받침돌에도 장식이 전혀 없다. 석조가 자리하였던 곳이 백제시대의 궁궐터로 전해지고 있으므로, 당시 궁중 불교신앙의 일면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받침돌이나 몸통에 나타난 풍성하고도 우아한 곡선미는 백제 사람의 돌다듬기 수법을 잘 보여주기에, 백제미를 대표하는 석조물로 평가되고 있다.(출처 : 다음백과 등에서 발췌)
제1 전시실은 금당 수당리, 논산 마전리 등 부여의 청동기 생활문화와 한국식 동검문화 등을 전시하고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 송국리선사취락지(사적 제249호)를 비롯하여 지석묘와 청동기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제1 전시실에는 청동기, 초기 철기, 원삼국 시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백제가 세워지기 전 이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부여 지역은 중국 요령 지역의 문화와 한강 유역의 문화가 어울려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형성했다.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 '부여 송국리 유적'이다. 송국리 돌널무덤에서 발견된 요령식 동검과 한국식 동검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자.
부여의 한국식 동검문화는 날이 곧고 허리가 만들어지는 특징이 있으나 철기 보급으로 쇠퇴하게 된다..
덧띠토기(혹은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는 청동기 후기에서 철기 초기에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종류의 토기가 유입된 부여의 고대문화..
백제 사람들의 생활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인 제2전시실에서 사비천도와 왕경문화, 능산리사찰과 백제금동대향로 등을 전시한다.
능산리 사리장..
백제 문화의 정수인 국보 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국보 287호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의 향로. 1996년 5월 3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중첩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지 위에 올려져 있는 봉황은 꽁지를 쳐들고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묘사되어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번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출처 : 다음백과)
높이 61.8cm, 무게 11.85kg으로 한 마리의 봉황이 장식된 머리 부분, 신선이 살았다는 상상 속의 산을 표현한 뚜껑 부분, 연꽃잎 모양을 도드라지게 표현한 몸통 부분, 한 마리의 용이 향로 전체를 받드는 받침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향로는 청동으로 만든 다음 금칠을 했다.
백제의 불교문화
제3 전시실에는 석불상, 금동불상, 탑과 각종 꾸미개 등 백제의 예술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있다. 백제 침류왕 1년(384년)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사비시대는 불교가 가장 융성한 시기로 일본에까지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그래서 불상 조각이 발전해 지금까지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예산화전리사면석불 보물 제794호..
【예산화전리사면석불禮山花田里四面石佛보물 제794호】
보물 제794호. 높이 좌상 120cm, 동면입상 130cm, 북면입상 168cm. 현존하는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오래된 큰 규모의 석불이다. 돌기둥 4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는 백제시대 유일의 사면불(四面佛)로 이 사면석불의 제작시기는 태안마애삼존불상보다는 다소 앞선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사면불은 일명 ‘사방불’이라고도 하는데,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사방 정토에 군림하는 신앙의 대상인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불, 미륵불을 뜻한다. 남면에는 본존불로 생각되는 여래좌상이 있고, 나머지 면에는 여래입상이 각각 1구씩 새겨져 있다. 머리 부분은 서면과 북면만 많이 훼손된 채 남아있고,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되어있는 손은 모두 없어졌다. 4구의 불상은 모두 양 어깨에 옷을 걸치고 있으며 가슴 부분에 띠매듭이 보인다. 옷주름이 매우 깊고 가슴아래에서 U자형으로 겹쳐 있다. 머리광배는 원형으로 불꽃무늬·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백제 특유의 양식이다. 머리 부분이 20년 넘게 공주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왔다. 볼이 도톰하며 미소를 짓고 있다. 성왕이 무령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령왕릉이 완성된 뒤인 527년 무렵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 사방불로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과 비교할 수 있어 백제미술사와 불교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출처 : 위키백과 등에서 발췌)
박만식 교수 기증실도 있고..
큰 항아리와 독널이라고 하며 주봉성님이 기증..
홀에 있는 능산리 고분의 백호도..
박물관 실내를 둘러본 후 바깥으로 나와 서 보았던 비석머리와 비석받침..
고려시대 후기 당시의 석탑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동남리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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